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67화 (267/357)

267. <빌어먹게 그리운 얼굴(2)>

“뭐냐?”

“…….”

“넌 뭐냐고 개쉐끼야!”

돌아선 야율재의 사나운 눈초리를 본 순간 깨달았다.

‘시부럴…….’

현재의 야율재는 나를 모른다. 그리고.

“대답해 개쉐끼야! 멀쩡히 가던 사람을 왜 붙잡은 거야!”

……전생의 야율재는 성격이 더러웠다.

“……설마 장식영 그놈이 보낸 거냐?”

금방이라도 칼날을 뽑을 듯 칼자루에 손을 가져가는 야율재.

현생의 삶에서도 성격은 전생과 그리 다르지 않은 듯 보였다.

‘어쩐다…….’

내가 과거로 회귀했다는 것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이름까지 불러놓고 그냥 지나갈 수도 없다.

싸운다면 지진 않겠지만, 그랬다간 나에 대한 의심이 생기지 않겠나.

“왜 대답이 없어! 벙어리야!? 벙어린데 어떻게 부른 거야!”

말 못 하는 내 사정은 고려도 하지 않은 채, 곧장 싸울 준비를 취하는 야율재.

하여간 소정대 새끼들은 하나같이 성질머리가…….

‘하아…….’

천하독행신을 펼쳐 도망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그때.

“진소운?”

야율재의 뒤로 삐쭉삐쭉 솟은 더벅머리의 소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왠지 낯이 익은…….

“진소운 네놈이 여긴 어쩐 일이냐!”

다름 아닌 야율극이었다.

그 순간 내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으래! 야율극! 너, 널 불렀다.”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는 야율극.

나는 모른 척 녀석에게 물었다.

“나……는 너를 불렀는데 다른 분이 반응을 하시네……. 크흠, 이분은 누구시냐?”

“…….”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않은 야율극이 퉁명하게 답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하여튼 이 싸가지 없는 애새끼…….

학관 돌아가서 하루 종일 굴러봐야 정신 차리지, 쯧.

내가 야율극 갱생 계획을 세우는 사이.

“진……소운이라면 흑염룡 소협 아니시오?”

답변이 돌아온 건 야율재 쪽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뵙게 되다니!”

방금 전 날 장식영의 부하로 알고 살인멸구하려던 양반이 갑자기 포권을 쥐며 고개를 꾸벅거렸다.

응? 뭐지?

“말씀 많이 들었소. 극이의 형인 야율재라 하오.”

말투도 갑자기 바뀐다. 영 적응하기가 어렵다.

“아, 그……러셨군요. 어쩐지 낯이 익다 싶었습니다.”

“저 또한 흑염룡 소협을 이리 뵈니 감회가 남다르군요.”

“네? 소, 소협이요?”

고개가 갸웃해졌다.

얘, 뭐야? 내가 아는 야율재가 아닌데…….

“극이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학관 생활을 많이 도와주는 친구가 있다고.”

“혀엉!! 내가 언제!”

야율극이 눈깔을 뒤집으며 제 형에게 달려들었다.

야율재는 제자리에 선 채, 손을 길게 뻗어 야율극의 머리를 제압했다.

“솔직하지 못한 녀석을 챙겨주어서 고맙습니다. 협의가 대단하다는 소문을 많이 들었는데 역시 거짓이 아니었군요.”

저 캬악- 거리는 애새끼랑 친구라고 하니 조금 닭살이 돋는 느낌이지만.

뭐, 녀석도 비슷한 심정인지 어떻게든 야율재의 입을 막으려 하는 것 같고.

의협심 넘치는 학관 대표 행세를 해줘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인자한 미소를 만면에 걸며 마주 포권을 쥐었다.

“별말씀을요. 당연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확실히 야율재의 인상은 전생에 내가 봤던 모습과 비교하면 많이 다르다.

날카로운 면이 엿보이지만, 그렇다고 독기가 차 있는 느낌은 아니고, 캬악- 거리는 제 동생을 볼 때는 가끔 웃기까지 한다.

전생의 성격은 야율극이 죽은 이후에 만들어졌던 건가?

거참, 되게 어색하네.

“녀석도 진 소협을 무척이나 따르는 것 같더군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거 아니라고! 입 닥쳐!”

반면에 야율극의 얼굴은 곧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호오, 이건 그냥 넘길 수가 없지.

나는 야율극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극이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니……! 앞으로 더 챙겨줘야 하겠군요.”

내 말에 야율극의 얼굴은 빨갛다 못해 시꺼멓게 죽어가는 낯빛이 되었다.

이거 꽤 볼 만하잖아?

그러니까 함부로 기어오르지 말란 말이다, 이 자식아.

나는 새끼 살쾡이 녀석을 향해 한번 웃어준 후, 야율재에게 물었다.

“혹 대협께선 어떤 일을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대협이라……. 하하하.”

당장이라도 폭발하여 내게 달려들려는 야율극을 점혈로 제압한 야율재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전 그런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소소하게 칼 밥이나 먹고 있지요.”

“그렇습니까? 그래도 유운문의 공부가 그리 얕지 않다 하던데.”

야율재가 공손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도 다 한때의 일이지요. 그래도 근래에 들어서 극이 저 녀석이 뭔가 새로운 길을 발견한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곤 다시금 포권을 쥔다.

“깨달음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들었습니다.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다시금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

본래는 야율재가 스스로 찾았던 길이건만, 내 사정을 알 리 없는 야율재는 자신이 고생 끝에 찾은 깨달음을 선물을 받은 듯 느끼고 있었다.

“아니요. 전 전달만 했을 뿐입니다.”

“……응? 전달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보다 고생했을 전생의 야율재를 떠올리면서.

“네. 본래 주인은 그렇게 되길 바랐을 테니까요.”

야율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차피 설명해 봤자 이해도 못할 이야기들.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앞으로도 계속 낭인 생활을 하실 계획이십니까?”

“아, 사실 그 일도 여의치 않아 정착할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정착할 곳이라면…….”

“이번에 무림맹에서 하급무사들을 모집한다 하기에 거기에 지원해 볼 생각입니다.”

결국 이렇게 되는가.

분명 그간 벌어진 사건은 전생과 그 궤가 달랐지만, 펼쳐진 결과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는 괜한 조바심에 채근했다.

“혹 다른 일을 해볼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상업이라든지…….”

“그게 무슨…….”

야율재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드리웠다.

나는 그에게 욕지거리를 들을 각오를 하고 말했다.

“무림맹의 하급 무사 일이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어서 말입니다.”

“…….”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그는 곧장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칼을 뽑아 들지 않았다.

“걱정해 주신 점은 감사하나 유운문의 제자로서 어떤 어려움도 헤쳐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몸담은 강호에서 떠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유운문의 부흥을 생각하고, 무인으로서의 삶을 단 한 순간도 버린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전생의 그가 죽는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렇군요…….”

“아…… 미안합니다. 괜히 흥분을 해서…….”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제가 실례되는 말을 드렸지요.”

무림맹이 아니더라도 결국 강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전생의 그가 그랬듯, 내 눈앞에 있는 그 역시 유운문의 부흥을 위해 하염없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정마대전에 발을 디디게 될 것이다.

‘어차피 그리 될 거라면…….’

그가 강호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내 곁에 있는 게 가장 좋을 터.

“만약 합격하신다면 백랑각에 지원하시길 추천드립니다.”

“백랑각이요?”

“네. 그곳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이 배정된다고 들었거든요.”

“흐음…… 그렇습니까?”

“네.”

그가 전생처럼 백랑각의 소정대에 가 있기를 바라며,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나는 몸을 돌려 내 일행의 곁으로 돌아갔다.

#

“흑흑, 난 쓰레기야.”

“맞아, 모 금표 공은 쓰레기예요.”

은호의 말에 금표가 찌릿 녀석을 째려본다.

“이 자식이 자꾸 왜 성(姓)을 갈아!”

“설마 무(戊) 평가를 받고도 계속 이씨 성을 가져갈 생각이야?”

“실수야! 실수라고! 실기 평가에서 뒤집으면 되잖아!”

그러나 은호도 물러서지 않는다.

“매번 제 동생인 동룡이한테 지는 분께서 퍽이나…….”

“이 씨! 죽을래!”

“네네, 전 이씨가 맞고 금표 공은 성이 없지…….”

우당탕.

금표가 은호에게 달려들고, 동룡이 말리는 난장판이 벌어지는 동안.

요 며칠 계속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남화성이 툭 하니 말을 내뱉었다.

“난 왜 데려온 거냐?”

“응?”

“네 일행들과 자리하는 곳에 간자는 왜 데려왔냐고.”

저저, 덩치도 커다란 놈이 입술을 삐쭉거리니 징그럽기 그지없다.

나는 녀석을 향해 픽 하고 웃어주었다.

“간자가 혼자 대표단에 남아있으면 기밀을 빼갈 거 아냐. 그래서 데려왔지.”

“씨부럴…….”

남화성은 한입에 술잔을 털어넣고 거칠게 입술을 닦아냈다.

연이어 빈 술잔을 채우고 한입에 털어넣으려던 남화성이 갑자기 내 쪽으로 홱하니 고개를 돌렸다.

“나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잠시 주저하던 남화성이 다시금 술잔을 비우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내게 물었다.

“하나 묻자. 네 사람이 되면…… 사문은 지켜주냐?”

“갑자기 뭔 소리 하냐?”

“진심이다 진소운. 내가 너를 따라다니면…… 우리 삼원문의 백팔봉 지위를 지켜줄 수 있냐 이 말이다.”

남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뭔가 일이 있었나 보다.

“내가 왜?”

“뭐?”

“내가 왜 너희 사문의 지위까지 챙겨야 하는데?”

애당초 내가 정도회, 백도회, 12봉성. 그 어느 곳에도 적을 두지 않은 건, 같잖은 정치 싸움에서 한발 물러서기 위함이다.

학관대표단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

“…….”

굳은 표정을 짓던 남화성이 한쪽 입꼬리를 올린다.

“그렇지, 네가 책임질 일이 아니지.”

남화성이 다시금 술잔을 털어넣으려 할 때 난 말을 이었다.

“대신, 네 사문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는 알려주마.”

술잔을 넘기려던 그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뭐?”

“도래할 전쟁에서 사문이 멸문당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마, 그리고 위험에 처하면 함께 싸워주지.”

“…….”

소란스럽던 술자리에 갑작스런 정적이 감돌았다.

일각을 비록한 간부단의 인원들도, 사제들을 비롯한 나의 일행들도 모두 말을 멈춘 채 나와 남화성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게 무슨…….”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남화성이 멍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왔고, 나는 확실히 대답해 주었다.

“내가 약속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다. 네놈들의 출세나 사문의 직위 같은 건 네놈이 알아서 챙겨라. 난 그딴 거 해줄 능력도 할 마음도 없으니까.”

“…….”

남화성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지 한참을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그를 대신해 질문을 한 건 일각이었다.

“진 시주…… 전쟁이 일어날 거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전쟁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요?”

“하지만, 혈교는 이미…….”

“적이 혈교 하나뿐인가?”

“…….”

“무림맹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황금기를 보내고 있지. 하지만 그렇다 해서 적들이 없는 건 아니야.”

나는 고개를 들어 일행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이 황금기가 끝나는 때에 커다란 혼란이 몰려올 것이고 강호는 커다란 전쟁의 화마에 갇힐 거야.”

“…….”

내가 단편적으로 이야기한 미래에 대해, 다들 내가 말한 ‘적’이 누구인지를 고민하는 사이.

남화성이 결심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진소운, 정말 삼원문을 위해 싸워줄 거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와 부하의 사문은 곧 나의 사문이다.”

“동료와 부하…….”

내 말을 되뇌던 남화성이 술잔을 단숨에 털어넣었다.

“크으…… 진소운, 네가 알아야 할 일이 있다.”

“뭐지?”

“얼마 전 철순직을 만났다. 그런데…… 12봉성 녀석들이 일을 꾸미고 있는 것 같더라.”

철순직,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나.

#

모사(謀事) 철순직.

전생에 그의 별명이었다.

별호가 달리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사(謀事)로 불렀다.

권모술수와 모략에 관해선 누구도 쉽사리 그를 당해낼 수 없었으니까.

전쟁 중에 그는 가장 적은 피해로 가장 많은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의 부대에 소속된 이들 대부분이 12봉성의 인원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단지 실력이 좋거나 전략 전술이 대단해서는 아니다.

애당초 마교는 전략 전술이 제대로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수많은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어디에 있냐고?

그는 항시 가장 약한 부대와 싸웠다.

그의 부대가 강한 적과 마주칠 때가 되면 그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 다른 부대에 적을 넘겼다.

‘하긴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라 할 수 있겠군.’

애당초 무림학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가장 경계할 대상으로 꼽았던 이가 바로 철순직이었다.

전생에서도 철순직의 부대 때문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곳이 바로 백랑각이었으니까.

그와의 악연은 어쩌면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그놈도 오래 참았지.’

정시를 볼 때부터 이어졌던 인연을 생각하면, 철순직 입장에선 오래 기다린 것과 다름없다.

나 역시도 슬슬 자신의 목적을 위해 그가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대표님, 학관생들이 대표와의 대담 자리를 마련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대담 자리?”

전생에서 듣지 못했던 이야기에 고개가 갸우뚱한다.

장우재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보고를 이었다.

“네. 학관의 향후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답니다.”

“학관생 전부가?”

“아뇨. 학관생들을 대표한 이들이 따로 있답니다.”

“…….”

장우재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조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자신들을 ‘학관의원’이라고 부르더군요.”

‘의원’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듣는 순간, 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 사이에 철순직이 끼어 있나?”

“어?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긴.

학관 대표가 버젓이 있는데, 그 와중에 학관생들을 대표하는 인원을 새로 뽑는다는 발상은…….

“하 새끼,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네.”

철순직 그 인간 말고는 할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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