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벽을 부수는 자들(3)>
“백호출동!”
한 아이의 기합에 스물에 달하는 아이들이 똑같은 동작을 펼친다.
“““핫!”””
이어 검진을 조종하는 아이가 다시금 외친다.
“백호파석!”
“““핫!!!”””
촤르르르르르르르르륵
동시에 뻗어나온 검들에서 수십 개의 환검이 쏟아져 나온다.
검진을 중심으로 마치 검날의 폭풍이 일 듯 사방을 휩쓰는 환검의 향연.
본래 개개인만 보아서는 환검을 저리 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건만, 검진 안에서는 마치 다들 일류 고수라도 된 듯 환검을 펼친다.
스물에 달하는 인원이 동시에 펼치는 쌍천검결은 보는 이로 하여금 충분히 위협을 느끼게 했다.
태을문의 제일 강자라 손꼽히는 강채석마저도 저 검진 안에 포위된다면 과연 대응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
‘끄응…….’
물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서, 체면상 검진에 패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기에 시험해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일대제자 다섯이 이룬 검진을 대상으로 맞붙어 본 결과, 검진을 깨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고, 그 이후엔 더더욱 삼대제자들이 펼치는 검진에 대항할 생각 따윈 덮어두게 되었다.
‘대체 진소운 그놈은 뭘 남겨두고 간 거야!’
애당초 백호검진은 태을문의 무공도 아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가르친 적도 없고, 아이들에게 배우라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금·은·동 삼형제가 죽어라 백호검진을 수련한 후.
그들이 나가 철혈삼룡, 이후엔 철벽삼룡이라는 별호를 얻으면서 아이들 사이에선 백호검진을 익히는 일이 하나의 놀이처럼 번졌다.
단지 호기심으로 깔짝대는 것이 아니었다.
금·은·동 세 형제가 그랬듯 귀를 봉하고 눈을 봉하며 수련을 한다.
‘봉문을 했기에 천만다행이지…….’
애당초 금·은·동 세 형제가 했던 수련 방식도 상식을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를 넘어 태을문의 제자들 전부가 그런 수련에 매진하는 기괴한 꼴을 보다 보니, 혹여나 이 광경이 세간에 알려지진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된 지경.
‘이게 다 그 빌어먹을 진소운 때문이지…….’
하지만 그런 빡빡한 훈련을 하고부터는 아이들의 성장세가 두드러지게 발전되기 시작했다.
태을진경 자체를 사부와 제자가 동시에 배우는 처지라, 아이들은 배움에 목말라했지만 사부들이 제대로 된 수련을 가르칠 수가 없었다.
아이가 벽에 부딪히면 사부들은 이틀을 꼬박 밤새워 궁리한 후 겨우 가르치는 것이 일상.
상황이 이리되니 호기심이 충만한 아이들의 갈증은 사라지질 않았고, 자연스레 진소운과 금·은·동 형제가 남기고 간 백호검식에 눈이 가게 된 것.
무림맹에 있을 적, 강채석도 백호검식을 익히긴 했지만 백호검식 자체에는 특별함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태을문의 제자들이 익히는 백호검식에는 뭔가 다른 특별함이 있다.
“백호통아!”
촤르르르르르르륵!
환검이 펼쳐지며 연무장 전체를 가득 메운다.
아직 약관에 들지도 않은 아이들이 펼치는 검진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
‘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검진이람.’
환검이란 내공 소모가 많은 무공.
보통의 아이들은 환검을 뽑아내기도 어렵건만, 검식 안에만 들어서면 환검을 줄줄이 뽑아낸다.
제갈천기의 말로는 개량된 백호검식 안에 동공(動功)의 효과가 있어 내공이 부족한 아이도 환검을 쓸 수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백호검식 안에서 느낀 감각을 토대로 홀로 공부하여 태을진경을 수련하는 것이 현재 태을문의 일상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스스로 모여든 아이들로 가득 찬 연무장.
“그만!!!”
검진의 중심을 이루는 아이의 입에서 말이 이어진다.
“지금부터 체력 훈련을 시작한다.”
“““넷!”””
단 한 명도 그 명령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다.
“화운산까지 전력 질주 시작! 마지막으로 들어온 세 놈은 다시 뛴다!”
“““넷!”””
우렁찬 대답과 함께 아이들이 우르르 연무장을 떠나가고.
“후우…….”
텅 빈 연무장에 홀로 남은 강채석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지정된 쾌화당의 수련이 모두 끝나고 아이들끼리 자발적으로 하는 개별 훈련이기에 강채석이 뭐라 할 순 없다.
아니, 되려 기특해하며 이뻐해 줘야 하지만…….
‘스승이 되어, 달리 아이들을 도와줄 방도가 없는 것이 통탄스럽구나…….’
그때.
“음?”
연무장 한구석에 홀로 수련하고 있는 아이가 보였다.
처음엔 다른 아이들과 백호검식을 함께 수련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수련에 참여하지 않고 홀로 수련을 하는 시간이 많아진 아이.
강채석이 그쪽으로 걸어갔다.
“유성아, 뭐가 막히는 것이냐?”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강유성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당주님.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할 것까지야…….”
강유성이 서둘러 손을 모으곤 차분히 설명했다.
“쾌(快)에 대해서 좀 고민을 해보고 있었습니다. 소천검법에서 쾌(快)는 환(幻)을 위한 쾌를 지향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극쾌를 발현할 다른 무공이 있으면 어떨까 해서 말입니다.”
“응?”
그러나 이미 무아지경에 빠진 듯, 강유성은 골똘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가령 이런 겁니다. 태을진경에 따르면 소천검법은 단지 속도가 빠른 검법을 지향하는 것이 아닌, 중도. 그러니까 변과 환의 방향 그 어느 것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요하지 않습니까.”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나랑 다른 태을진경을 익힌 건가?
“으음, 그…….”
“그렇다면 소천검법은 변화의 중심뿐만 아니라 방어적 요소를 갖춘 검법으로 볼 수 있는데, 전 이 쾌를 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어…… 어……? 그, 그러냐?”
“당주님도 알다시피 제가 부족하여 쌍천검결과 만해천지검결의 수련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죄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유성을 보며 강채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애당초 만해천지검결이나 쌍천검결은 내공이 만만찮게 소모되기에, 당주인 자신도 쉬이 펼치지 못하는 무공.
그런데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유성이 자유자재로 검법을 펼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강채석은 당주로서 아이를 위로하고자 유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조금 더 나이가 차고 내공이 더 쌓이면…….”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요. 극단적인 효율을 가지는 극쾌는 어떨까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래?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강유성이 착검하며 발검 자세를 취했다.
“이게 본래 소천검법인데요.”
쐐액-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빠르게 뻗어나간 검이 상대의 심장을 찌르고 돌아온다.
유성이 나이대 아이들에게선 볼 수 없는 속도.
강채석이 감탄할 새도 없이, 뻗었던 검을 착검한 유성이 다시금 발검 자세를 취했다.
“이걸 이렇게 펼치는 겁니다.”
쾌애앵-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조차 하기 힘들었다.
분명 소리가 울리고 바람이 뒤따랐건만.
……검이 움직이는 궤적은 보지도 못했다.
이게 적의 검이었다고 생각하자 등골이 서늘하다.
“이, 이걸 너 혼자 만들었다고?”
“네? 만든 건 아니고 태을진경에서 배운…….”
아니, 그러니까 태을진경에서 그런 거 못 봤다니까.
벌어지는 턱을 겨우 다문 강채석이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네?”
“무공 이름.”
유성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영락없는 소년의 모습이다.
“단천검법이 어떨까 생각만…… 헤헤. 부끄럽습니다.”
처음 가르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재능을 가진 아이라는 건 알았다.
특히나 무에 대한 집착이, 무에 대한 애정이 무한한 아이다.
더군다나 모용세가에 교환제자로 다녀온 뒤부턴 이미 가르칠 것이 없었는데, 이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없는 무공까지 만들어 내는 지경에 다다랐다니.
사문에 버거운 천재(天才)가 굴러들어 왔건만, 그 천재의 앞길을 막고 선 지경이다.
강채석이 굳은 얼굴로 말이 없자 강유성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저어…… 혹시,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그래.”
“네?”
이윽고 강채석의 얼굴 위로 부끄러움과 결연함이 뒤섞인 빛이 떠오른다.
“아, 네게 하는 말이 아니다. 잘못이라면 우리가 잘못했지.”
“그게 무슨…….”
“더 매진해라.”
강채석은 더 이상 지켜만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자리를 떠 당장 문주전으로 향했다.
애당초 자신들이 먼저 성장한 뒤에 아이들을 키울 생각을 하면 안 되었다.
애당초 어린 제자들보다 성장의 속도가 빠를 리 없지 않은가.
어차피 늦은 자신들보다, 지금 당장 키워야 할 이들은 젊은 세대들이다.
지금 저 아이들은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은 와중에 있는데, 나이 든 자신의 세대가 그 아이들의 날개를 꽁꽁 묶어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아이들에게 훨훨 날 기술을 가르쳐 주지 못할망정 날개를 부여잡고 있어선 안 된다는 경계심이 들었다.
꽈당!
“문주님!”
“응? 강 당주”
개인 연무장에서 연신 땀을 흘리던 홍문기가 의아한 눈으로 강채석을 바라봤다.
“영단! 영단이 필요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갑작스레 영단이라니.
이어지는 말은 더욱 오리무중이었다.
“아이들이 날질 못하고 있습니다. 날 수 있게 영단을 줘야 합니다.”
“아니……, 강 당주. 말을 알아듣게…….”
“영단, 영단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차근차근…….”
“영단 줘! 영단!!! 영단 달란 말이야!!!”
“…….”
급기야 바닥을 뒹굴며 난리를 치는 강채석의 모습에, 홍문기는 그간 갈고닦은 무공을 실험해 볼 기회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
“……그러니까. 영단이 필요하다?”
진태산은 첫 번째 잔을 넘기기도 전에 목이 콱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니, 무슨 영단이 옆집 개똥도 아니고.
“흐음, 어디 가서 구할 수 있지? 소림사의 대환단이 가장 효과가 좋으니 그곳에 구매 문의를 넣어볼까?”
진태산의 비아냥에도 강채석은 굳힌 표정을 풀지 않았다.
“농담하는 거 아니다.”
“……대체 눈은 왜 그런 거냐?”
어쩐지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강채석이 홍문기를 힐끗 바라보지만, 홍문기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은 채 술잔만 넘길 뿐이었다.
“……걷다가 넘어졌다.”
“멍든 자국이 꼭 대양권 같은데……. 돌멩이가 대양권을 쓰던가? 아니면 너까래가 대양권을 쓰던가?”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라니까!”
“……농담 던진 거 아니었어?”
그렇지 않고서야 영단이 필요하다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올 수가 있나.
그러나 강채석은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읊었다.
“지금 아이들의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미 실력은 충분하나 내공이 못 따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영단이 필요해.”
진태산은 관자놀이를 꾸욱꾸욱 눌렀다.
“영약 정도면 어떠냐? 왕가장을 통하면…….”
쾅.
“애들한테 다들 만년화삼 한 뿌리씩 먹일 거냐? 아님 공청석유를 단체로 나눠 먹일 거냐! 영단, 영단이 필요하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 영단을 대체 어디서 구하냐고!”
“그건 외당 당주인 네가 해결해야지.”
“…….”
이거 미친 새끼인가?
대책도 없이 그냥 지 필요하다고 말하면 땡이야?
그럼 검강의 고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면 쏙쏙 키워주려나?
진태산은 핀잔을 주려다가 관두었다.
이성이 날아간 미친놈을 상대로 똑같이 미친짓을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니까.
대신 참을 인(忍) 자를 새기며 홍문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주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의 물음에 홍문기 또한 입을 꾸욱 다물었다.
달리 이야기를 한다고 해결이 가능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영단을 조제한다는 건 단지 재료가 있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지. 각 문파의 영단에는 그 문파만의 특별함이 깃들어야 하니 말일세. 오랜 시간을 이어온 문파들이 단지 두세 개에 불과한 영단을 만드는 데 그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게 당연한데, 저 미친놈이 이성이 날아가서 헛소리를 하고 있지 않습니…….”
“영단! 영단! 영단!”
연신 같은 단어를 연호하는 강채석을 보며 진태산과 홍문기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가 같은 곳에 의뢰를 해볼 수야 있겠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약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문이나 의가 등에서 간혹 영단을 만들기도 하지만, 실제 주문하는 사람의 체질이나 심법에 딱 들어맞는 경우는 거의 없다.
더구나 가격은 말도 못 하게 비싼 경우가 다반사여서, 잘못하면 쓸데없이 돈만 날려 가세가 기우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게다가 태을문의 살림살이가 나아졌다곤 하나, 당장 영단 제조 의뢰를 맡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진태산은 미친놈…… 아니, 친우를 달랬다.
“일단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영약들 먼저 공급하는 게 어떻겠냐?”
강채석은 ‘영단! 영단!’ 외치던 소리를 멈추고 대뜸 반문했다.
“영약을 섭취하는 데 가장 주의해야 할 게 뭔지 아냐?”
“……주화입마.”
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영약 좋다. 없는 것보다 낫지. 하지만 지금 아이들이 운공을 잘못하다 실수라도 하는 날엔…… 그를 받쳐줄 사람이 태을문엔 없단 걸 잘 알지 않느냐.”
“…….”
강채석이 얼굴에서 장난기를 싹 지웠다.
“지금 애들 상태가 어떤지 아냐?”
“…….”
“머리와 몸으로 무공을 이해했는데, 내공이 못 받쳐줘서 활용하질 못하고 있다.”
태을진경이 태을문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더구나 그간 주력으로 익혔던 대진신공 때문에 태을진경의 성취가 진일보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문제.
“환검을 뽑을 수 있는 애들이 검진에 매진하고, 검기를 뽑을 수 있는 애들은 환검에 매진하고 있는 마당이다. 더구나 유성이 그놈은…….”
연무장에 홀로 남아있던 유성의 모습을 떠올린 강채석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침음을 흘렸다.
“자신의 내공 부족 때문에 다른 무공을 혼자 만들고 있더라.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형설지공(螢雪之功)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여 성공을 이룬다는 매우 좋은 말이지만, 제 자식이 이런 상황에 처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게 부모.
“나도 알고 있다. 영단을 부르짖는다고 그게 뚝 하고 나오지 않는다는 거. 근데 머리론 알고 있어도…….”
강채석이 가슴을 두드리며 고개를 숙인다.
”가슴으론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다.”
“…….”
부서져라 가슴을 팡팡 두드리는 강채석의 말에, 홍문기와 진태산이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두 사람도 강채석과 같은 마음이었기에.
“…….”
“…….”
한참의 정적이 감돌았다.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술잔을 들지 않은 상태로.
결국 정적을 깬 이는 홍문기였다.
“일단은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영약을 먼저 먹이는 걸로 마무리하세.”
“문주님!”
“그 점에 대해선 자네도 이해해 주게. 우리가 삼시 세끼 고기를 먹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음을 벌써 잊은 건가?”
“하지만 영약은 체질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술잔을 매만지던 홍문기가 술잔을 꽉 쥐었다.
“그건…… 조심하세. 더구나 무리를 하다가 가세가 다시금 기운다면 그것 또한 문제 아닌가.”
“…….”
“태산이 이 친구에게만 너무 짐을 지우지 말게.”
홍문기의 말에 너무 자신만 생각했다 깨달은 강채석이 중얼거렸다.
“미안하네. 태산.”
한 바가지 욕을 먹긴 했지만, 그 또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을 길이 없기 때문이란 걸 아는 진태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됐네.”
술자리가 다시금 이어졌지만, 개운한 표정을 짓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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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약이요?”
은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래. 영약. 가는 길에 영약을 좀 구해가야 하거든.”
“…….”
힘들게 예매한 마차표이긴 하나 영약 때문이라면 찢어버린 걸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말이 좀 이상하지 않은가.
영약이란 게 씨뿌린 밭에서 절로 자라는 것도 아니고.
대체 저 대사형 머리는 어떻게 생겨먹…… 아니, 그러니까 어찌 저리 태연하게 영약을 마치 지나가다 주울 수 있는 돌덩이처럼 말한단 말인가.
“어디 맡겨놓은 영약이 있으신 겁니까?”
별안간 진소운이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 아프냐? 누가 영약을 맡겨 놔.”
“…….”
아니, 당신이 그렇다는 듯이 이야기했잖아!
대사형만 아니면 진짜……!
은호의 속이 터지든 말든, 진소운이 기지개를 켜며 명령했다.
“아무튼 준비할 것들이 많으니 빠르게 움직여라. 너희가 그렇게 기다리던 금의환향 아니더냐.”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건 왜 준비하라는 겁니까?”
진소운이 주문한 것은 철로 만든 손바닥만 한 강판과 주머니가 달린 가죽 배자.
그 외에 철로 만든 원형의 환 같은 것들이었다.
이를 내려다보던 진소운이 흡족한 듯 씨익 웃는다.
“어떠냐? 이번에 내가 고안한 것들인데. 그 가죽 배자에 강판을 넣어 무게를 조절할 수 있다.”
소운의 자세한 설명에 은호의 고개가 더욱 기울어진다.
“배자는 추울 때 저고리 위에 덧입는 것 아닙니까. 거기에 강판을 넣어 무게 조절을 왜 하는 겁니까?”
“몸이 무거우면 훈련의 성과가 두 배가 될 테니까.”
“…….”
은호는 자신이 뭔가 잘못 들었는지, 손바닥으로 귀를 탁탁 두드려 보았다.
“이동 중에 수련은 아무래도 효율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배자와 철환을 착용하면 효과는 두 배가 될 것이다.”
……잘못들은 것이 아니었다.
은호는 순간적으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럴 거면 그냥 고향에 안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사내가 성공하겠다 한번 고향을 떠났으면 성공할 때까지 고향에 돌아가지 않는 것도 응당 지녀야 할 배포가 아닌가 하고.
“자자. 얼른 움직여라. 사문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사제들이 눈에 아른거리지도 않느냐?”
그러나 이내 체념하고 몸을 움직인다.
힘든 게 죽도록 싫지만 그래도 사제들과 부모님이 그립기도 했으니까.
‘더구나 저 염라보다 더한 사람이 학관에 남는 걸 그냥 허락할 인간도 아니고. 후…….’
은호는 어느새 단념하는 것이 훨씬 빨라진 스스로가 불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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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겨울 휴식기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이번 겨울에 나타나는 영약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것들을 싹 쓸어 담는 데만 해도 휴식기 절반을 소모해야 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간 내가 먹어온 영약에 비할 만한 물건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약들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태을문 제자들을 위한 영단을 만들 중요한 재료이기 때문.
‘슬슬 필요할 때가 되었지.’
금·은·동 형제들과 사련의 발전 속도를 보면 얼추 가늠이 된다.
지금 태을문은 아마 커다란 벽에 막혀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건 단지 재력이나 권력이 아니다.
바로, 절대적이고 누구에게나 공평한 시간.
태을문은 아직 영단을 만들 만한 재력이나 역사, 규모를 갖춘 문파가 아니다.
명문 대파들의 경우만 보아도, 긴 역사 속에서 의술 재능이 뛰어난 제자들이 문파의 지원을 받아 평생을 쏟아부어 하나의 영단 제조법을 남기고 죽는다.
명문 대파들도 그러할진대 태을문 같은 작고 귀여운 문파에서 언감생심 그런 일이 가능하겠는가?
“하지만 꼭 정론으로 갈 필요는 없잖아.”
이빨이 없으면 잇몸으로 사는 법.
나는 이빨 못지않은 튼튼한 잇몸을 찾으러 집무실을 나섰다.
마침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멍청한 놈들이 금덩이인지도 모르고 가져다 버린 원석이 눈앞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