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76화 (276/357)

276. <벽을 부수는 자들(2)>

홍군…… 아니, 학관생 전부는 현 상황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일개 전투는 대(大)전략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것이 학관에서 배운 정설이었다.

아니, 학관에서뿐만 아니라 사문이나 가문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병법(兵法)을 배웠다.

대(大)전략은 전체의 판도를 움직인다.

그렇기에 장차 지휘관이나 최고위직에 오를 이들은 항시 작은 것보다 큰 것을 보도록 배워왔다.

작은 전투의 승·패에 연연하기보다는 큰 전략의 이득을 가져오는 것.

그것이 그들이 배워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분명 홍군은 필패하는 것이 맞았다.

학관생 모두가 내공을 전폐당했고, 소단위·중단위로 뭉쳐 전투를 벌였다.

전략 전술 평가라곤 하지만 삼군이 서로 경계하고 싸우는 작은 전쟁이라 치면, 진소운을 패배시키기 위해 대(大)전략을 세운 철순직의 의도대로 백군과 홍군이 서로 싸우다 양패구상하고 청군이 승리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헌데 지금 이 꼬라지를 보면.

“아이고, 삭신이 다 쑤시네.”

……손자병법을 쓴 손자도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지랄하지 마’라고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희생하며 백군을 패퇴시킨 홍군.

그리고 그런 홍군을 잡기 위해 움직인 청군의 뒤를 치는 홍군의 기습조까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과정은 끝내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

‘뭔 놈의 시험을 이따위로 친대.’

‘누가 이딴 식으로 싸우냐고.’

‘하여튼 못 배워 처먹은 놈들이란…….’

‘시험 좆같이 치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지만, 쉬이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

“뭘 봐 새끼들아, 눈 안 깔아?”

물론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저 미친…… 아니, 학관 대표를 자극해선 안 된다는 본능의 경고가 가장 컸지만.

“…….”

백군은 열세인 상황의 홍군에게 발렸고, 홍군 내부에선 배신을 했다가 보복받을 일만 남은 이들이 즐비했으니까.

그나마 청군에게 ‘시험 좆같이 치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지만, 대다수가 구파일방의 인원으로 구성된 청군은 자신들이 홍군에게 결국 저버렸다는 것에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대체 뭐 하고 있었던 거냐!”

“저 열 명을 못 막아서 결국 저버렸다고?”

“진지 지키지 않고 대체 뭐 한 거야!”

백산에 올랐던 인원들이 엄청난 비난을 쏟아냈지만, 진지 근처에 있던 이들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저 야율극 새끼 몰라? 저 독종한테 한번 걸리면 뼈가 부러진다고!”

“이은호는 또 다르냐. 철벽삼룡 중에서 머리를 담당하는 게 그놈이다!”

“그렇게 자신 있었으면 진즉 니들이 백군이나 홍군을 무찔렀으면 됐잖아!”

서로 간의 비난이 오가고 있는 사이.

시끌벅적한 것은 학관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실기 시험을 종료하고 평가를 내려야 할 교관과 교두들 사이에서도 수없이 많은 말이 나왔다.

“이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애당초 이런 식으로 치르는 시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어쨌든 홍군이 이기지 않았습니까.”

“이건 전략 전술입니다. 무식하게 치고받는 싸움이 아니라고요.”

“대(大)전략의 성패도 결국은 작은 전투의 승리가 모여야 한다는 걸 모르십니까.”

홍군의 최종 승리를 인정해야 한다,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방식으로 치른 시험을 인정해선 안 된다라는 의견이 극명하게 갈린 가운데.

“다들 그만.”

결국 북원평이 나서서 정리를 했다.

“상대의 약점을 알고 그걸 이용하는 것 또한 실제 전쟁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일. 애당초 정론으로만 싸워야 한다는 조건을 걸지 않았고, 백군과 청군의 동맹을 허락한 이상 홍군의 승리에 문제가 있다 볼 수 없소.”

북원평의 말에 교관들이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애당초 초반 동맹을 허락하였던 편파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 자신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에.

“학기말 전략 전술 평가는…… 의심할 여지 없이 홍군의 승리요.”

북원평의 말과 함께 교관과 교두들이 일제히 평가지를 마저 완성시켰다.

그 광경을 보던 북원평이 백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서는.

“크흠…….”

……머리통에 이빨 자국이 난 채로 고개를 푹 숙인 일각을 놀리는 진소운이 보였다.

‘참으로…… 예상이 안 되는 놈이란 말이지.’

북원평은 불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사형을 바라보며 끌끌 웃음을 흘렸다.

#

학기 말 평가가 모두 끝났다.

마지막 실기 때 먹은 군자산이 모두 소화되고, 학관생들이 자신의 몸에 다시금 적응하기 시작할 때쯤.

낙오 인원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허윽…….”

“말도 안 돼!”

“제발! 제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한 학관생들은 하늘이 무너진 듯 좌절과 절망에 빠져버렸다.

열 명이 채 안 되는 적은 인원들이지만, 그들 하나하나와 연관된 문파들을 생각하면 그들의 낙오는 가벼운 무게가 아니었다.

낙오된 인원들의 동료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괴로움과 고통에 함께 울어주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가 되돌려지진 않았다.

“말도 안 돼! 이, 이건 거짓말이야!!!”

그중에서도 가장 큰 파장을 일으킨 낙오 인원은 다름 아닌 악주평이었다.

오대세가의 소속된 산동악가의 후손이자, 악가 내에서도 기재로 촉망받았던 악주평의 낙오는 다른 학관생들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기에 충격이 더욱 컸다.

물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이는 악주평 본인이었지만.

“그래! 이, 이건 음모야! 음모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 어?! 나 산동악가의 악주평이야! 감찰각의 숙부님께 말씀드려 이 말도 안 되는 사건을 조사하여 진상을 밝히겠어!”

악주평은 이성을 잃은 채 교관실 집기를 때려 부수며 난리를 피웠다.

그는 분명 음모가 있다고 핏대를 세웠지만, 교육각 또한 만통부 직속 산하기관인 만큼 심사에 있어서 비리가 있을 리 만무.

악주평의 이런 행동은 결국 집행각으로 하여금 나서게 했다.

“숙부……! 숙부님을 불러줘! 내 숙부가 삼당의 당주라고!”

집행각에 끌려가며 절절하게 외쳤지만, 결국 감찰각에선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집행각에서 악주평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후.

악병비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 악주평은 결국 집행각의 인원을 붙잡고 억울함을 성토했다.

“분명 음모가 있습니다! 산동악가의 후손인 제가 낙오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조사 서류를 읽던 집행각 조사관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戊) 평가 다섯 개? 이걸 성적이라고 받은 거냐?”

“……그, 그건 어디까지나 야율극이라는 놈의 괴롭힘 때문에…….”

“그러고 보니 학관 내 불량조직을 창설하고 용의주도하게 한 학관생을 괴롭혔다는 기록도 있구나.”

악주평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럴 리 없습니다! 전, 전!”

조사관이 책상을 탕 내리치며 일갈했다.

“네놈 숙부인 감찰각의 삼당주가 쓴 조사 보고서다. 이래도 이게 거짓말이라고?”

“네?!!!”

“악병비…… 그가 인물은 인물이군. 자기 가문의 인원을 이렇게까지 냉철하게 끊어내다니. 과연 삼당주의 명성에 걸맞다고 할까?”

“그, 그게 무슨…….”

조사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기대해도 좋다. 감찰각이 이리 협조적으로 나오면 우리 집행각도 일할 맛이 나거든.”

악주평은 지옥에 떨어진 기분이었다.

#

낙오된 인원들이 먼저 짐을 정리하고 학관을 나선 이후.

조금 침체되어 있던 학관엔 다시금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겨울 휴식기로는 여름 휴식기의 두 배에 달하는 기간을 제공한다.

거리가 멀어 여름 휴식기에 돌아가지 못했던 학관생들도 학관의 지원을 받아 사문이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너무 기대돼요.”

은설란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지난여름 휴식기 동안 방문하지 못한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북해는 춥다며. 여기도 추운데 거긴 더 심하지 않아?”

성모란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은설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춥지 않아요! 겨울엔 풍경이 얼마나 이쁜데요. 온 사방이 하얗고 지평선이 끝도 없이 보이는걸요. 아! 이번 휴식기에 함께 가보시는 게 어때요? 저희 궁의 사람들도 좋아할 거예요.”

은설란이 말했지만, 성모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난 이번에 고향에도 안 돌아갈 생각이야. 조용한 학관에서 수련이나 빡세게 해야지.”

“그걸 왜 절 보고 이야기하십니까?”

성모란이 분하다는 듯 진소운을 흘겨본다.

“대체 진 공자는 뭘 처먹었길래 그렇게 강한 거예요?”

“허, 거참! 처먹다니요. 그저 매일 거듭된 수련으로 하루하루를 쌓아온 것이지요.”

“말이나 못 하면!”

마치 일각이라도 빙의한 듯 두 손을 모아 보이는 진소운에, 성모란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근데 들어보니까 내가 준 거 외에도 여기저기서 많이 주워 먹고 다녔다면서요?”

“크흠.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결국 은설란이 중재에 나섰다.

“아유……! 그만들 싸우시고, 다른 분들은 어떠세요? 이번에 저와 함께 빙궁으로……!”

“이번엔 다 같이 사문으로 가봐야 할 듯합니다.”

진소운을 비롯한 태을문의 사람들도 은설란의 제안을 거절했다.

다만 모용재화는 한참을 고민하다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은 소저, 할아버님께서 이번엔 꼭 돌아오라 하셔서…….”

정작 제안한 은설란은 아무렇지 않건만, 미련이 뚝뚝 남는 눈동자로 은설란을 바라보는 모용재화.

“폭력배…… 아니, 할아버님 말씀이라…….”

역시나 가슴을 두들기는 이보다는 온몸을 두들기는 이의 말에 움직이는 게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인원들이 각자 휴식기에 고향에 돌아가거나 성모란처럼 남아서 수련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사이.

“순직아, 사문에 가지 않을 생각이더냐?”

철순직은 새로 산 검을 계속 휘두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김이 푹푹 나오는 추운 날씨였지만, 철순직은 비라도 맞은 듯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를 측은하게 바라보던 철현직이 무겁게 입술을 떼었다.

“다들 널 기다리고 있다.”

“……아직 부족합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철순직이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지는 형인 철현직이 제일 잘 알았다.

그는 한발 물러서며 동생을 다독였다.

“그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래 걸리지 않겠느냐? 천천히 부모님께 얼굴 보여드리고 하자꾸나.”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린 이미 삼백 년을 기다렸다. 더 늦어진다 한들 다르겠느냐?”

잠시간의 침묵.

검 끝만 응시하던 철순직이 더운 숨을 토해냈다.

“……지금의 모습을 보여드리기가 너무 창피합니다. 형님.”

“부모님께선 그저 네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하실 거다.”

“…….”

연무장엔 다시금 침묵만이 내려앉았다.

제각각 학관에 남아있든 돌아가든, 학관생들은 한 가지씩 큰 짐을 지게 된다.

이번 휴식기는 그 짐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지 족쇄로 만들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휴식기는 또 다른 설렘을 가져오기도 했다.

특히 태을문의 제자들에겐 더더욱.

금의환향하여 훌륭한 내 새끼라며 둥가둥가 어여쁨을 받을 수 있는 여름 휴식기를 지나쳐 버린 태을문의 제자들은 누구보다 오래, 그리고 간절히 이 겨울 휴식기를 기다렸다.

더구나 정시 때부터 시작해 단 한 번도 쉼 없이 달리기만 했던 일 년.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때가 아닌가.

간만의 휴식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진소운이 머리를 바삐 굴리는 사이.

“대사형, 합비로 가는 일정입니다.”

“응?”

은호가 내민 일정표를 진소운이 받아 들었다.

“유한표국에서 절강으로 가는 마차를 타고 가다가 안휘에서 성현표국으로 갈아타고 가는 일정입니다. 가는 내내 숙식은 모두 표국에서 준비해 준다고 합니다.”

흔히 많이 이용되는 단체여행상품.

고향으로 돌아가는 학관생들이 많이 쓰는 방식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매번 말을 갈아타고 노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상품.

학관 휴식기가 다가오면 연일 계속되는 매진으로 예약을 하기가 힘듦에도 불구하고 은호는 미리 준비를 마쳐둔 것이다.

진소운은 눈썹을 늘어뜨리며 은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미안해서 어쩌냐, 예약하기 힘들었을 텐데.”

대사형의 인정에 은호가 손가락으로 인중을 쓸었다.

“에이,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 정도는 사제인 제가 준비해야…….”

“응? 아닌데, 내가 미안하단 건 다른 의미였는데.”

“네?”

찌이이익.

일정표와 함께 예매권을 찢어버리는 대사형의 행태에 태을문의 제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무, 무슨!”

진소운은 태연하게 찢어진 예매권을 달랑거리며 씨익 웃었다.

“미안하지만, 우린 할 일이 있어서 이거 못 쓰거든.”

“…….”

염라 같은 대사형의 흉악한 미소에, 사제들은 붕어처럼 아무 말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뻐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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