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 <기회를 가질 자격(3)>
미래를 안다는 건 많은 이점이 있지만, 그에 완전히 기댈 순 없다.
정보가 완전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
일례로 천동굴이 그렇다.
강호영약서에는 천동굴의 어떤 지점에서 오령선화유가 나왔는지 나와 있을 뿐이고, 무림맹 서안지부 보고서에서는 결국 그 오령선화유를 차지한 것이 종남이었다는 사실만 기재되어 있으니까.
‘먹물쟁이들이 하는 일이 다 그렇지’라고 폄하하기엔, 필수 정보만 간략히 기록하는 게 효율성 측면에서도 낫다.
만약 사소한 것들까지 모두 기록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면, 전생에 나는 곽궁의 손에 뒈지기 전에 이미 만통부의 자료를 외우다가 돌아버려 쓸모가 없어졌을 테니까.
‘그러니 아쉬워하거나 불평할 필요는 없지.’
세상의 일이란 게 본래 사소한 부분은 그냥 넘길 줄도 알아야 하는 법.
그런데 그릇이 큰 나와 달리, 우리 귀여운 사제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런 게! 무슨! 후욱- 병법이라고!”
“성동! 격서?! 아니! 왜……! 우리가! 성동인 건데!”
“세상! 어떤! 사기꾼이! 흐앗! 자기! 사기에! 말려드냐고……!”
“이잉…… 힘드러!”
이제 막 세 번째 종남의 제자들과 맞닥뜨린 태을문의 제자들.
그런데 녀석들은 종남의 제자들을 상대하는 와중에도 기합 대신 불만을 내지르며 상대를 제압했다.
음, 손속을 보아하니 확실히 다들 성장했군.
그런데 왜 기분이 좋지만은 않지?
“……방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냐?”
왜,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뜻을 왜곡해 들으면 안 된다는 옛 성현의 말씀도 있지 않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확인해 보니.
“후우! 후우! 후우! 아니요!”
“헥! 헥! 헥! 그럴 리가요! 아닌데요!”
“네네! 대사형한테 한 말 아닌데요! 진짜 아닌데요!”
“…….”
뭐야, 왜 이리 기를 쓰고 아니래.
어쨌든 입술을 달짝거리며 주저하는 동룡을 제외하고 다른 녀석들은 극렬히 고개를 저으며 내 말을 부정했다.
“다행이다.”
“…….”
“네놈들 가뜩이나 힘들 텐데 철환이랑 강판을 더 추가하고 싶진 않았거든.”
“…….”
“뭐 해? 철환, 원해?”
대사형의 하해와도 같은 마음에 감동했는지, 그 뒤로 녀석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착실히 종남 제자들을 처리해 나갔다.
사실 나도 이렇게까지 계획이 틀어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천동굴 전체에 제자들을 퍼트려 놓은 건가?’
일부러 세 번째 입구가 열릴 때와 우리가 진입하는 시기에 차이가 나도록 설계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인파를 막기 위해 종남의 제자들이 세 번째 입구로 몰려가면, 그 혼란을 틈타 반대편으로 진입하여 빈집털이를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게 있었다.
종남이 내 생각보다 더 병신이었다는 것.
‘아무리 입구를 막아놨어도 제자들을 이렇게까지 퍼트려 놓다니.’
자신들이 틀어 막은 입구가 절대 뚫리지 않을 거라 생각한 건가?
아니면 감히 천하의 종남이 막은 길을 뚫고 들어올 간 큰 이들이 없으리라고 생각한 건가.
뭐, 어느 쪽이든 대가리 속에 선민의식이 꽉 차다 못해 흘러넘친다고밖에 볼 수가 없다.
더구나 본산의 제자들을 싹싹 긁어왔는지 우리를 맞이하는 제자들은 아직 뼈도 제대로 영글지 못한 어린 친구들이었다.
“응? 웬 놈이냐!”
“침입자다!”
다음 동굴에서 만난 종남의 사대 제자쯤으로 보이는 이들이 화들짝 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지만.
이제껏 그랬듯 추가로 달려오는 제자들은 없었다.
사제들이 동시에 달려들어 종남의 제자를 제압했다.
처음에는 검을 쓰던 네 사람도 이내 그럴 필요가 없는 상대라는 것을 알고는 적수공권으로 덤벼들었다.
“이 악적! 검을 뽑아라!”
“아니, 악적까지는 아닌데…….”
“이익! 감히 종남을 무시하는 거냐!”
아직 내공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아이들치곤 검법이 매섭다.
하지만.
캉!
“응?”
철환을 찬 손을 들어 날카로운 검을 막는 태을문 제자들의 몸빵, 아니 신위에 당황을 금치 못한다.
“수, 수갑을 찼다! 심장을 공격해!”
눈치 빠른 이들이 재빨리 검을 회수하여 다시금 몸통에 검을 찔러넣어 보지만.
캉!
“으응?”
……이번엔 강판에 막혀 검극이 상하며 검만 상처 입을 뿐이다.
“씨, 씨바, 뭐야…….”
뭐긴 뭐야. 고된 훈련의 결과물이지.
무거운 강판 배자를 입고도 몸을 날쌔게 놀리는 금·은·동 형제와 사련을 보니 몹시도 흡족했다.
“내가 종남의 제자를 상대로 이렇게 여유 있게 손을 쓰는 날이 올 줄이야.”
타닥! 철그럭-
이어 은호가 가볍게 금나수를 펼쳐 검을 빼앗고 아이의 마혈과 아혈을 짚자, 아이는 털썩 자리에 쓰러졌다.
다섯 명의 종남파 제자가 제압되는 데에 반각도 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쪽 체력에도 언젠가 한계가 오는 법.
“대사형, 이거 이대로 계속 괜찮은 겁니까? 계속 싸우면서 나갈 수는 없을 텐데요.”
은호의 말대로 고민이 된다.
지금이야 사대제자들이니까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지, 다른 공간에도 똑같이 사대제자들만 있진 않을 테니까.
삼대제자까지야 어찌어찌 넘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이대제자가 섞여있는 무리나 일대제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단순히 제압하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 없는 굴을 찾아 가자니 사방 팔방에 종남의 제자들이 퍼져있고.
‘최악의 경우 만약 북두 검수를 만나게 된다면…….’
아니다. 나쁜 생각은 그만두자.
소정대 시절에도 꼭 재수 없는 소리를 할 때마다 현실이 되었다.
‘죽었나?’, ‘이겼나?’, ‘살았나?’ 등등 말을 할 때마다 일이 터지곤 했었으니까.
나중에는 이 말들을 금기어로 설정할 정도였다.
그때.
쫑긋-
맨 뒤에 선 동룡이 귀를 까딱거리더니 지나온 동굴들을 바라본다.
“왜 그러느냐?”
“……그게요. 뭔가 안 좋은 기분이 들어서요.”
천살성이 가진 감각은 초인간적인 부분에서 발휘된다.
특히나 생존과 죽음에 관해서는 어지간한 고수들보다 감각이 좋다고 봐야 하겠지.
나는 재빨리 기감을 한 점으로 쏘아 보내었다.
지나온 동굴들을 차례차례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가 들어왔던 입구까지 갔을 때.
쭈뼛!
온몸의 솜털이 오소소 돋아나는 감각이 느껴졌다.
‘내 기감을 눈치챘다고?’
소정대 시절부터 없느니만 못한 내공을 활용하기 위해 미세 내공 운용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감각을 갈고닦았던 나인데.
은밀하게 펼친 내 기감을 눈치채다니.
“……!”
거기다 내가 보낸 기감을 따라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듯 살기까지 쏘아보낸다.
보통 고수가 아니다.
“하…….”
좆대따.
일대제자? 아니면 당주급?
모르겠다.
다만 그 위험한 인물에게 우리가 동굴 안으로 들어온 사실을 들켰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덜덜덜덜.
옆에 서 있는 동룡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대, 대사형…… 그, 그만 가면 안 될까요?”
상대가 누구든 살의의 욕구가 느껴지면 겁 없이 나서는 동룡이었지만, 천살성을 억누르고 나선 살의보단 냉철한 이성이 먼저 반응을 한다.
동룡이가 불편해한다면 그만치 위험한 인물이라 생각해야겠지.
“그래. 움직이자.”
나는 여태껏 그랬듯 익숙하게 귀식행보를 밟으려는 사제들을 제지했다.
“지금부터 귀식행보는 물론이고 동공도 펼치지 마라. 최대한 빨리 이동한다.”
“…….”
흔적이 남는 것은 물론이고, 추격자들이 늘어날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위험하기 그지없는 선택이지만.
지금은 당장 저 추격자를 떼어내는 것만 생각할 때니까.
[종남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오령선화유를 확보하려 할 겁니다.]
철순직이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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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악!”
“큭!”
“억!”
종남의 제자들이 쓰러진다.
우리가 맞닥뜨린 놈들은 삼대제자들이 종종 섞여있는 무리.
이동한 후, 어느새 시간은 벌써 반각이 넘어버렸다.
내 기감을 퍼트려 확인하는 건 상대에게 내 위치를 직접 알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기에 동룡이를 바라봤다.
“동룡아!”
“……아직 오고 있는 것 같아요!”
빌어먹을.
여전히 창백한 동룡의 얼굴.
나는 곧장 다른 사제들에게 명령했다.
“그냥 지나간다!”
“사형! 그럼 더 늘어날 거예요.”
벌써 두 무리가 합세하여 우리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느새 길목마다 종남의 제자로 꽉 찬 상황.
절망할 여유조차 없다.
“대신 속도를 올려!”
나는 오성의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단박에 대천검법을 휘둘렀다.
채채채채채채채챙!
작은 공간 안에 수없이 많은 검의 잔상들이 가득 차며 종남의 제자들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횃불에 의지한 이들이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환검과 진검을 구분하긴 힘들다.
더구나 이들은 삼대와 사대제자들.
검들이 들이닥치는 모습에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고, 그 틈을 타 사제들이 동굴을 벗어났다.
난 맨 뒤에서 종남파 제자들의 머리 위 돌들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촤악! 촤악! 촤악! 촤악!
동굴 천장 일부가 잘려 나가 돌들이 떨어져 내리며 입구가 반쯤 막혔다.
남은 반을 막기 위해 다시금 검기를 날려낸 순간.
퍼퍼퍼퍼퍼퍼펑!
동시에 종남의 장법이 떨어지는 돌들을 향해 쏘아진다.
미친, 동굴에서 저런 장법을 함부로 쓰면 피할 곳 없는 파편들이 튀어 나올 텐데…….
쐐액-
아니나 다를까, 사람 머리통만 한 돌들이 대포처럼 바깥으로 쏘아져 나온다.
‘제길…….’
동굴이 얼마나 튼튼한지 모르겠지만, 여기서 섣불리 반격했다간 이 일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
결국 사제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돌들을 막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다들 뒤로 피해!”
만화무적권으로 날아오는 돌들을 쳐내려 하는 순간.
“흐압!”
내 앞을 막아서는 그림자가 있었다.
퍼퍼벅! 퍼퍼벅! 퍽! 퍼퍽!
그건 다름 아닌 금표.
“사형, 괜찮아요?”
금강패로 돌들을 막아내며 되려 내 안위를 물어보는 녀석.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내게 등을 보이며 정면을 주시했다.
“제가 뒤를 막겠습니다.”
제법 단단해 보이는 등이다.
나는 피식 웃고는 대답했다.
“그래. 부탁한다.”
금표 덕분에 한숨 돌리는 사이.
우르르릉!
불온한 소리와 함께 천정이 무너져 내렸다.
종남파의 장력에 의해 충격이 번져 나간 동굴 일대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
나는 사제들을 향해 외쳤다.
“달려!”
콰르르릉!
내가 천장을 잘라 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의 돌과 흙더미들이 마구 떨어져 내린다.
나는 전방으로 기감을 펼쳐 종남의 제자들이 없는 방향으로 사제들을 이끌었다.
“왼쪽!”
“오른쪽! 다시 오른쪽!”
순식간에 다섯 개의 갈림길을 지나자 동굴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헥! 헥! 헥! 와! 이번엔 진짜 죽을 뻔했다.”
“어우 미친놈들…… 누가 동굴 안에서 장을 그렇게 날려.”
“대사형, 이제 괜찮은 겁니까?”
괜찮냐고? 나도 모르겠다.
일단 동굴이 무너지는 것부터 피하려 도망쳤기 때문에 우리 목적지와는 방향이 조금 틀어졌다.
가장 큰 문제는 아까 기감에 잡혔던 고수의 행방.
그가 무너진 동굴에 휘말려 더 이상 쫓아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면 가장 좋겠지만.
“동룡아.”
“……네.”
내 부름에 동룡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자신이 그냥 가자고 한 말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나는 녀석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정확한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그냥 네 느낌만 알려다오.”
지금은 천살성의 육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내 눈빛에 동룡이 주먹을 꽉 쥔다.
“……아직 불안해요.”
제기랄.
우리가 왔던 동굴은 막혔으니 그 고수는 다른 길을 찾을 것이다.
이제는 고수가 어디에서 튀어나올지도 예상할 수조차 없는 상황.
“움직이자.”
당장은 그냥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여기서 그 고수를 만났다간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 상상도 할 수 없을 테니.
“왼쪽.”
“왼쪽.”
“왼쪽.”
“오른쪽.”
나는 일단 고수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대한 인적이 없는 곳으로 사제들을 이끌었다.
다행히 아까의 그 고수만큼 감이 날카로운 자는 없었는지, 내가 펼치는 기감을 알아챈 자는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동할 때마다 동룡의 안색이 점차 돌아왔다.
그 무엇보다 반가운 신호.
조금씩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
“여기서 잠시 쉬었다가 간다.”
사제들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운기행공을 하는 사이, 나는 머릿속의 지도를 펼쳤다.
하오문에서 새로 얻은 천동굴의 지도.
개방이 표기하지 않았던 남은 삼(三) 할의 그림마저 모두 채워진 지도였다.
‘본래 경로보다 너무 멀리 왔다.’
종남이 온전한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앞으로의 여정에 기대를 가질 수 있겠지만.
철순직의 말로는 개방에서 종남에 온전한 지도를 건네주었다고 했다.
그 빌어먹을 고수가 지도에 문외한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 상황.
그때.
벌떡.
운기조식을 끝낸 동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토끼눈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
“…….”
딱히 뭔가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다시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다른 사제들도 눈치를 챘는지 금방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가자.”
다시금 최대한 인적이 없는 길을 찾아 동굴을 질주한다.
하지만 아무리 움직여도 동룡의 표정은 나아지질 않는다.
‘얼마나 가까이 있는 거지?’
그렇게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하.”
눈앞에 놓인 세 개의 갈림길에서 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사형?”
빌어먹을…….
세 개의 동굴 전부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그것도 꽤 많은 숫자가.
어디로 가야 하지?
도무지 답을 내릴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뒤로 가선 안 된다는 것쯤은 알겠군.’
나는 흑룡검을 움켜쥐었다.
“전투 준비를 해라.”
“…….”
나를 따라 사제들이 굳은 얼굴로 검을 뽑아 들려는 찰나.
우르르.
세 개의 동굴에서 동시에 인원들이 쏟아져 나왔다.
“응? 뭐여? 선객이 있었나?”
“종남의 제자냐?”
“아닌데. 종남파 무복이 아니야.”
하나같이 제각각의 무복을 입은 이들.
무기 역시 다양했다. 검부터 태도, 곤, 창까지.
서로 다른 무기를 든 이들은.
바로, 천동굴 입구에서 시위를 하던 무인들이었다.
“대사형…….”
“설마…….”
정신없이 달리는 사이.
우리는 어느새 세 번째 입구 인근까지 와버린 것이었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