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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88화 (288/357)

288. <기회를 가질 자격(4)>

“으음…….”

왕금산의 눈꼬리가 처졌다.

무(武)를 숭상하는 문파들이 더 많은 무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금(金)을 숭상하는 이들이 돈에 집착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그였으니까.

그런데 그 집착의 정도가 이 정도일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게 뭔가?”

“구령사(救靈蛇)라고 한답니다.”

진태산의 대답에 다시금 왕금산의 시선이 구령사라고 불리는 존재에게로 향한다.

구령사라는 이름답게 뱀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뱀 특유의 민들거리는 몸체가 아니다.

마치 갑주를 입고 있는 듯 외피 전체가 단단하기 그지없어 보이고, 머리에는 작은 뿔 두 개가 돋아 있는 게 암만 봐도 일반적인 뱀의 모양새는 아니었다.

“이걸 애들에게 먹이겠다고?”

암만 강해질 수 있다고 해도, 뭔가 사람이 먹을 만한 형체가 아니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정확히 말하면 구령사를 먹이는 건 아니지요. 그 안에 있는 기운을 뽑아내어…….”

현재 태을문이 내공 문제로 곤란을 격고 있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영단을 제조할 능력이 없기에 백방으로 내공을 보조할 만한 수단을 찾고 있다는 소릴 듣고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라!”

라는 말을 했었다.

예하 소속된 상단과 다른 업체들에 영약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었다.

그렇게 확보한 영약의 목록을 진태산에게 넘겨주었고, 그중 필요하다고 이야기한 것들을 추려 왕가장에 소속된 약초꾼들에게 재료를 찾아오라 넘긴 게 마지막 기억.

그사이 뭔 일이 있었는지.

“끄응…….”

이 해괴하게 생긴 뱀이 그들의 공동 집무실에 와 있는 것이었다.

“……그냥 먹일 수 없습니다. 구령사가 워낙 독기가 강하기 때문에 특별하게 처리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영단을 만든다면 그 효능을 더욱 살릴 수 있겠지만…….”

아아, 뭐 어렵게 말을 하는데.

그러니까 간략하게 이야기하면.

“지금 당장은 먹을 수 없다는 소리지?”

그건 알아들었다.

영단 제조는 각 사문마다 가장 비전으로 삼는 기밀 중에 하나이기에, 쉬이 구할수도 만들수도 없다.

태을문이 영단 제조 대신 영약 수급을 택한 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

그 영약 중에 기이한 뱀이 있는 것도 다 이해하겠다.

그런데.

‘이걸 왜 집무실에 가져오냐고!’

왕금산의 의문에 진태산이 담담히 대답한다.

“영약……이지 않습니까. 함부로 취급할 수는 없지요.”

“아니……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냥 창고에 두면 안 되겠나? 그…… 좀 신경 쓰여서 말일세.”

무감하게 서류를 보던 진태산이 왕금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서우십니까?”

진태산의 도발(?)에 왕금산이 두 눈을 시퍼렇게 떴다.

“……허! 하! 참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로고! 감히 이 왕금산이 한낱 뱀 새끼 따위에게 두려움을 느낀단 말인가?”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저리 크게 어깨를 펴는 거지?

“내가 이야기 안 했나? 내가 말이야! 어? 왕년에 표행을 할 때, 어! 집채만 한 백호도 만나고 그랬어!”

백호는 무슨 얼어죽을 백…….

그 순간.

“……!”

진태산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구령사를 바라보았다.

“노, 놈이 누, 눈을 떴습니다!”

“뭬야!”

덩달아 화들짝 놀란 왕금산이 펄쩍 뛰어올라 집무실 구석으로 뛰어갔다.

왕장주께서 무공을 익힌적이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었군. 저 무거운 몸이 저리 높이 튀어 오르다니.

“자, 자네도 얼른 피하……!”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절친인 진태산이 혹여나 횡액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왕금산이 고개를 돌린 순간.

“백호오……?”

진태산의 미간이 길어지며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다시 아래로 시선을 옮기니.

……구령사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푸훗, 큼, 제가 잘못 본 거 같군요.”

갑작스레 몰려드는 수치심에 왕금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왕금산이 그러거나 말거나 진태산은 웃음을 꾸욱 눌러 참았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겨울은 구령사가 겨울잠을 자는 시기라, 봄이 되기 전에는 깨어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왕금산이 악귀 같은 얼굴을 하며 진태산을 노려보았지만 진태산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태도였다.

“집채만 한 백호도 두려워하지 않으시는 왕 장주시라면, 당연히 한낱 뱀도 무서워하지 않으시겠지요?”

“…….”

이제 아주 가지고 노는구만!

하지만 여기서 화를 냈다간 결국 지고 만다.

왕금산은 일부러 크게 거드름을 피웠다.

“커허흐흠! 사람을 뭘로 보고 말이야!”

그는 씩씩거리며 구령사 앞으로 걸어갔다.

“내가 이깟 미물에 겁을 먹을 거 같아!”

툭! 툭!

동작은 컸지만, 그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충격이 철창에 전해졌다.

진태산은 그 모습을 보며 조소를 숨기느라 애를 썼다.

황실의 고관대작 앞에서도 쉬이 기가 꺾이지 않는 사내가 어찌 한낱 팔뚝 길이만 한 뱀에게 겁을 먹는단 말인가.

그래도 여기서 더 토라지기 전에 놀리는 건 이 정도만 해야겠다.

그래도 공동집무실을 써서 심심한 일이 덜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이, 이보게.”

“네.”

왕금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이것 보게. 이놈이 누, 눈을 떴어.”

장주님도 참 거짓말이 서투르시군. 이리 빨리 장난을 치면 금방 알아차린다는 것도 모르나?

역시나 당하고는 못사는 그답게 금세 복수를 하려 하지만, 진태산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겨울 내내 제 몸에 불이 붙어도 깨어나지 않는 구령사가 갑자기 눈을 뜨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린가.

그래도 아까 한번 놀려먹었으니 자신도 그 장단에 놀아나 줘야지.

여기서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일주일간 말없이 딱딱한 표정을 봐야 할 테니까.

진태산이 손에 쥔 서류를 놓으며 익살스럽게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아! 그렇습니까? 이거 정말 큰일이군요.”

“아, 아니. 진짜, 진짜로 눈을 떴다니까!”

“네네. 이거 영단을 만들 사람을 빨리 구해서 처리해야 할 텐데. 진소운 녀석이 보낸다는 의원이 실력이 있을지 참으로 걱정입니다.”

대충 맞장구를 쳐주곤 다시금 일에 매진하려 할 때.

덜컹!

“히익!”

철창이 크게 흔들리며 왕금산이 화들짝 놀라는 소리를 내질렀다.

나참, 나이 먹고도 저렇게 장난치는 게 재밌나.

그래도 슬슬 말려야겠다.

구령사가 영약으로서 가치가 있다곤 하나, 독성이 강해서 땅꾼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영물이라 하지 않던…….

덜컹!

다시금 철창이 거세게 흔들리는 소리가 나고.

씁── 도가 지나친데.

“장주님…… 장난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그만하라 경고를 주려는 찰나.

진태산은 보았다.

번들거리는 황색의 두 눈을 번쩍 치켜뜨고 자신과 왕금산을 노려보는 구령사의 눈빛을.

‘저게 왜…… 눈을 떴지?’

진태산이 잠시 상념에 빠져 있을 여유도 주지 않고.

쐐액-

구령사가 몸을 웅크렸다가 화살처럼 몸을 쏘아대며 철창에 몸을 가져다 박았다.

털컹!

그 충격에 단단한 철창이 한 자나 스스로 움직였다.

구령사가 자신을 구속하는 철창임을 알고 빠져나가려 몸을 뒤척이기 시작한 것.

“이, 이보게…… 어, 어떻게 좀!”

구령사는 영물이라는 이름답게 자신의 처지를 금방 깨달은 듯했다.

철창이 단단하게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다시금 철창 끝으로 가 몸을 단단하게 휘감는다.

그러곤 궁시탄영의 수법을 쓰듯 몸을 튀겨 내어 철창에 계속 부딪힌다.

무인인 진태산이 표홀한 대자연의 신법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와! 확실히 영물은 영물일세!

“이보게! 지금 감탄할 때가 아니지 않은가!”

왕금산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진태산.

그는 헛기침을 하며 슬금슬금 문가로 향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구령사라고 한들 저 철창을 부수고 나오진 못할 겁…….”

“시벌! 그럼 왜 자꾸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으잉? 장주님! 욕도 하십니까?”

“아니, 이것 좀 어떻게 해 보라고!”

왕금산이 진태산의 옷자락이 찢어져라 부여잡고 있는 동안.

다시금 몸을 웅크린 구령사가 격렬한 몸놀림으로 철창에 몸을 부딪쳐온다.

털커덕!

또다시 한 자나 움직인 단단한 철창.

구령사는 쉬이 부서지지 않는 철창에 더욱 표독스런 상태가 된 듯 보였다.

쐐애액-

아가리를 쩍 벌리며 날카롭게 솟아나온 네 개의 송곳니에서 독액을 뚝뚝 흘리는 구령사.

그 울음소리에 진태산과 왕금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보, 보십시오. 저놈은 저기서 절대 나오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철창이 많이 찌그러지지 않았나!”

“찌그러질지언정 부서지진 않습니다. 한낱 미물 따위가 인간의 손재주를 어찌 감당하겠…….”

털커덕!

“으헉!”

화들짝 놀라자빠질 뻔한 진태산을 부축하던 왕금산이 진태산을 구령사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그간 관중과 포숙<관포지교(管鮑之交)>이 자신들에 비할 바냐며 우정을 과시했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빠, 빨리 어떻게든 해보게. 잠 재우든지 아니면 죽이든지.”

“죽이면 안 됩니다! 그럼 영약으로서의 가치가…….”

“저, 저놈! 저놈 봐!”

몸을 부딪치던 구령사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이내 그 날카로운 송곳니고 철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콱!

철창 바깥으로 튀어나온 송곳니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진다.

“거, 걱정 마십시오. 저놈 치악력이 아무리 강해 봐야 강철로 만든 철창에…….”

“아니, 왜 강철로 만든 걸 썼나! 영물이라면서! 그럼 최소 현철로 철창을 만들었어야지!”

“장주님! 철창이 무슨 호미 만들 때 쓰는 금속입니까! 한낱 미물…….”

콱!

드드득!

몇 번이나 철창을 물던 구령사가 이내 철창의 내구도를 파악했는지 철창의 틈 사이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꺄아아악! 철창! 철창이!”

“꺄아아악!”

귀밑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나이의 남성들이 질렀다고 믿기 힘든 가냘픈 목소리가 내질러진다.

콱! 털커덕! 콱! 털커덕!

이제 아주 끝까지 악에 받친 구령사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작은 상자만 한 철창이 제멋대로 뒹굴고 덜커덕 움직일 때마다 진태산과 왕금산의 심장이 털썩털썩 떨어졌다.

드드드득!

결국 철창이 벌어질 때로 벌어지고 탈출할 공간이 확보된 순간.

구령사가 몸을 한껏 웅크리더니 화살처럼 쏘아져 나가며 철창의 입구를 더욱 벌렸다.

이윽고.

털커덕!

탕!

철창 밖으로 나온 구령사의 몸이 집무실 바닥을 굴러 벽에 부딪쳤다.

“……!”

“……!!!”

진태산과 왕금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살려줘!”

먼저 움직인 것은 왕금산이었다.

섬전같이 움직인 그가 집무실 문을 열고 튀어 나가려는 순간.

덜컹!

“……으?”

덜컹덜컹!

……집무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덜컹덜컹덜컹!

“으아아아아아아!”

왕금산이 미친 듯이 문을 흔드는 동안 진태산이 그의 옆으로 다가와 함께 문을 흔들어 댔지만, 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내가 진작 고치자 하지 않았습니까! 장주님!”

“이제 와서 내게 책임을 묻는 건가! 저 빌어먹을 괴물을 가져온 건 다름 아닌 자네야!”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묻나! 무공을 익힌 건 자네인데! 그 전설의 검수인 태을검제의 무공으로 저놈을 제압하게!”

“……비켜보십시오. 제가 대양장으로 문을 부술 테니.”

“아니! 예전 태을문 무공 말고 태을검제의 무공을 쓰라니까!”

“전 돈 버느라 못 익혔단 말입니다!”

“이런 젠장! 자네에게 실망일세! 실망이야!”

“대양장!”

퍽!

진태산의 내공이 깃든 대양장이 쏘아졌지만, 애당초 파괴력이 그다지 크지 않은 무공으로 왕가장의 일급 목수가 만든 집무실 문을 부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장주님! 집무실 문인 만큼 대포가 터져도 부서지지 않게 단단하게 만들겠습니다.

갑자기 일급 목수가 엄지손가락을 척 올리며 웃는 모습이 언뜻 지나간 듯했다.

잠시 왕금산이 일급 목수의 빌어먹을 미소를 보고 있는 사이.

쐐애액-

철창을 빠져나와 독기가 가득 어린 구령사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마치 자신을 철창에 가둔 게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으아아아아! 누구 없나! 나 좀 살려줘! 이쪽일세!!”

“대양장!”

구령사가 두 사람과 일정 거리를 두고서 몸을 웅크리며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사이.

두 사람의 얼굴엔 절망이 어렸다.

그때.

덜컥.

바깥에서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의 몸이 기우뚱하며 문 밖으로 쓰러졌다.

“자, 장주님? 상단주님?”

볼품없이 넘어진 두 사람.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사용인이 의문을 표하는 사이.

“도, 도망쳐! 괴물! 괴물이 쫓아오고 있어!”

“괴물이요?”

“그래! 철창을 제힘으로 물어뜯고 빠져나온 괴물이…….”

진태산과 왕금산이 허겁지겁 문 밖으로 뛰쳐 나가는 사이.

사용인과 함께 온 낯선 사내가 집무실 안쪽을 살폈다.

“제가 잠시 봐도 되겠습니까?”

“응?”

그러나 왕금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몸을 잔뜩 웅크린 구령사가 화살처럼 몸을 튕겨 내며 네 사람에게 쏘아져 나갔다.

“으허허헉!”

사용인이 기겁하며 비명을 내질렀고, 사내가 태연하게 집무실 안으로 한 발짝 들어서며 손을 뻗어 구령사의 목을 잡아챘다.

“어이쿠야. 힘이 장사인 놈이로군요. 이거 구령사 아닙니까?”

“응?”

“구령사는 천천히 온도를 올려주면 겨울잠에서 금방 깨어나지요.”

철창을 물어뜯고 부쉈던 구령사가 어째서인지 사내의 손안에선 옴짝달싹을 못 하고 있었다.

“대신 추위에는 쥐약이지요.”

사내는 제압한 구령사를 들고 마당으로 나가 눈 안에 처박았다.

격하게 몸을 흔들던 구령사의 몸이 천천히 잔잔해진다.

이윽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구령사는 마치 죽은 것처럼 사내의 손안에서 축 늘어졌다.

“실내에서 보관할 경우, 서늘한 곳에 보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

몹시도 태평한 사내의 얼굴.

진태산과 왕금산이 멍한 눈으로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 혹시 누구십니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어서 반짝반짝 후광이 비치는 얼굴.

왕금산이 더없이 공손한 말투로 존함을 물었다

사내는 이런 인사를 받는 것이 당연한 듯 소탈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전, 사마정이라 합니다. 진소운 학관생의 소개로 왔습니다.”

괴물을 단박에 제압했다고 믿기지 않는 선이 고운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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