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289화 (289/357)

289. <기회를 가질 자격(5)>

“우린 종남이 아닙니다.”

내 말에 경계하던 무인들이 미간을 찌푸린다.

어차피 이들과 우리는 싸울 상대가 아니다.

적의 적은 동지라 하지 않던가.

“검을 넣어라.”

내 말에 긴장하고 있던 사제들이 주춤거리다가 이내 검을 집어넣었다.

우리가 공격 의향을 보이지 않자, 무인들도 하나둘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너희들 왜 거기서 나온 거지? 그 꼴은 또 뭐고?”

그래도 아직 미심쩍은지 무인의 질문을 던진다.

근데 우리 꼴이 그렇게 심각한가?

고개를 돌려 사제들을 살펴보니.

……심각하네.

“크흠, 우린 애초에 다른 동굴을 향해 가다가 이쪽으로 오게 된 참입니다.”

내가 듣기에도 어처구니없는 변명이었지만, 당장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걸 어쩌겠나.

적당히 둘러댈 수밖에.

그런데 이게 먹혔나 보다.

“욕심 때문에 갔다가 모진 꼴을 당했나 보군.”

“종남도 아닌데 싸울 필욘 없겠지.”

“지금은 영약을 찾는 게 우선이니까.”

무인들은 의외로 순순이 납득했는지 이내 우리에게서 관심을 끄기 시작했다.

다들 품속에서 개방의 지도를 꺼내어 길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이쪽으로 가야 한다니까!”

“아냐! 이전에 나타난 곳은 이곳이 아니라고!”

“그럼 넌 저쪽으로 가든지!”

그들이 길 찾기에 여념이 없는 동안, 우리는 인파 사이로 적당히 스며들었다.

동룡에 얼굴에도 살짝 핏기가 돌아왔다.

조금 급박함이 가시자 사람들의 행색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근데 이 새끼들은 왜 이렇게 깔끔하지?

핏자국은커녕 흙먼지 하나 묻은 놈들이 없다.

‘설마 여기까지 오면서 종남놈들이랑 하나도 마주치지 않은 건가?’

그제야, 낯선 우리가 나타났음에도 그다지 경계하지 않았던 태도가 납득이 되었다.

편안한 길로만 오다 보니 경계심이 절로 느슨해질 수밖에.

“대사형, 저들은 여태껏 한 번도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 같네요. 그래서인지 경계심도 금방 풀고요.”

역시 은호다. 단번에 간파해 냈군.

칭찬을 해…….

“이럴 줄 알았으면 굳이 반대편에서 들어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응?

설마 대사형에게 감히 눈치를 준 거야?.

못된 아이에겐 벌을 내려야겠구나.

“은호야.”

내 목소리에 녀석의 어깨가 움찔한다.

저저, 어깨선 아직 가냘픈 거 봐라.

검수의 어깨가 저리 연약해서 어찌할 꼬.

나는 웃으며 봇짐에서 철환 두 개를 꺼내 은호에게 건넸다.

“차.”

“……죄송…….”

“응, 됐고. 차.”

눈동자마저 흔들리던 녀석이 이내 주먹을 꽉 쥔다.

“동공도 쓰지 않는데 철환을 추가하는 의미가 있을까요?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야, 정말 맞는 말을 잘한다.

그러니까.

“비논리적으로 맞아볼래?”

“…….”

결국 철환을 받아 든 은호.

녀석은 발에 찰까 손에 찰까 고민하는 듯 보이더니 이윽고 발에 철환을 추가했다.

뭐, 고작 저 정도 무게로 힘들어질 리는 없으니까.

나는 다시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은 인파 속에 몸을 숨기는 것이 중요하다.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보고 있다면 종남도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겠지.

사제들을 향해 고갯짓으로 명령을 내린 후, 인원들 사이에 더 깊숙히 섞여 들려는 찰나.

“……어?”

지금 제일 만나기 싫은 인물을 마주쳐 버렸다.

하, 진짜.

“진 대표, 왜 여기 있습니까?”

철순직 이 새끼는 왜 이렇게 눈치가 없지?

낄 데 안 낄 데를 모르는 건가?

나는 소란이 일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크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근데 죽현방은 안 들어온다 하지 않았…….”

“……설마.”

이젠 말도 끊네.

내 말을 무시한 철순직이 우리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경악한다.

“반대쪽에 구멍을 뚫고 들어왔다가 결국 이곳까지 온 겁니까?”

시벌, 이래서 눈치 빠른 새끼들은 질색이라니까.

나는 시치미를 뚝 떼려다가.

“아니, 입구를 뚫자마자 바로 들어온 건…….”

“……역시 새로운 입구를 뚫은 건 진 대표 당신이었군요.”

아아아악!

내 입으로 구멍을 뚫었다고 자백해 버렸다.

빌어먹을 종남의 고수 때문에 머리가 멈춰선 탓인지, 철순직의 말에 숨겨진 음흉한 의도들이 전혀 간파가 되지 않는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그래서 뭐, 종남에 이를 건가?”

소란을 피울 순 없기에, 나는 흑룡검을 조용히 반쯤 꺼내 보이며 철순직을 노려보았다.

“……진 대표답지 않군요. 협박을 다 하고.”

니가 날 가지고 놀면 나도 그땐 왈패가 되는 거야.

“종남에 이를 건지 물었다.”

“애당초 내가 이곳에 들어온 것도 종남에 허락을 득하지 않고 행한 겁니다.”

아, 생각해 보니 그렇겠군.

새로 뚫린 입구에서 다른 무인들을 막아야 할 죽현방의 제자가 천동굴에 들어와 있는 걸 보면 종남이 퍽이나 좋아하겠다.

흥분이 조금 가라앉고 냉기가 머리를 채우자 이성이 서서히 돌아왔다.

“무슨 깡다구로 여기 들어온 거지?”

내 질문에 철순직은 꽤나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보고 싶은 것이 있어 들어왔습니다.”

“보고 싶은 것?”

꽤나 진지한 목소리.

“그런 게 있습니다.”

쓸데없이 무게 잡네.

분명 무인들과 종남 간에 피바람이 불게 뻔한 천동굴 내부에서 볼 수 있는 거라곤 피랑 시체밖에 없지 않나?

하여간 음흉한 새끼들 대가리 속은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니까.

“그럼 영약을 찾으러 온 건 아닌가?”

“……애당초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내 질문에 질린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철순직.

“만약 얻을 수 있다면 가질 건가?”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하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내공을 익히고 무기 좀 꼬나쥔 놈들 중에 과연 영약을 앞에 두고 무관심할 수 있는 놈들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니까.

“너 나랑 일 하나 하자.”

“…….”

차라리 이용하면 된다.

“성공하면 오령선화유 오 푼을 줄게.”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겁니까.”

“저 뒤에 쫌 귀찮은 놈이 하나 쫓아오고 있거든. 그놈 좀 막아줘.”

내 말에 철순직의 눈이 살짝 커진다.

“제가…… 그 정도 실력이 되리라 믿…… 아니, 생각합니까?”

나는 피식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누가 그놈이랑 싸우래?”

“……?”

“너 잘하는 거 있잖아. 그거 해서 막아달라는 거지.”

“제가 잘하는 거요?”

철순직이 처음으로 궁금하다는 듯 되묻는다.

“사람들 선동해서 벼랑 끝으로 모는 거.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거, 너 그런 거 잘하잖아.”

“진 대표…….”

철순직이 뭔가 불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근데 뭐.

내가 솔직히 없는 말 한 것도 아니고.

그게 본래 얘 특기니까.

하지만 철순직의 눈빛은 여전히 사납다.

후, 어쩔 수 없지.

“좋아, 인심 썼다. 팔 푼을 주지.”

물론 철순직에게 아무리 쉬운 일이라고 해도 위험성이 있는 만큼 헐값에 움직이진 않을 것이다.

놈이라면 최소 삼할 내지 사 할까지 뜯어가려고 하겠지.

그러니 최대한 삼 할 내에서 승부를 보는 게 핵심이다.

최소 칠 할의 오령선화유가 있어야 영단 백 개를 만들 수 있으니까.

“목숨 걸고 싸우라는 것도 아니고, 서로 싸움만 붙이라는 거잖아. 너한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쉽게 이야기하시는데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말할 줄 알았지.

뭘 보러 들어왔는진 모르겠지만, 셈이 빠른 철순직은 영약을 얻을 기회를 놓칠 놈이 아닐 테니까.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좋아, 그럼 인심 써서…….”

“일 할.”

“응?”

얘, 뭐라는 거야?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녀석이 말을 잇는다.

“만약 진 대표가 오령선화유를 얻는다면 그중 일 할을 제게 주십시오. 그럼 누군지 모를 이를 막아드리지요.”

뭐지, 철순직 이놈이 절대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거래를 제안한 순간 이미 머릿속으로 제 손익 계산을 마쳤을 터인데.

……일 할만 요구한다고?

대체 뭔 일이지?

철순직에게 뭔가 더 물어보려는 찰나,

“……대사형.”

동룡이 사색이 된 얼굴로 내 팔을 붙잡는다.

빌어먹을, 벌써 다가온 건가?

당최 철순직이 뭘 꾸미고 있는지 짐작이 가진 않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긴 힘드니 일단 넘어가는 수밖에.

“좋아. 일 할.”

내가 구두 약속의 의미로 손을 내밀자 철순직이 마주 잡았다.

그러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얘 진짜 뭐 잘못 먹었…….

“……꼭 살아남아서 ……약속을 지키십시오.”

왜 또 마지막에 재수 없는 말을 하고 그래.

“알았다.”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니까.

#

타다다닥.

진소운 일행이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던 철순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최 무슨 생각인 건지.’

거기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서 손과 발에 찬 철환은 또 뭐란 말인가.

내공을 쓰는 무인에게 모래주머니를 단 수련이 무용하다는 것은 진즉 밝혀진 사실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와 어울리다 보면 자신도 자꾸 이상해지는 걸 느낀다.

아직 얻지도 않은 물건을 가지고 흥정을 하다니.

‘근데 난 왜 협상을 한 거지?’

생각에 생각이 이어지려던 순간.

스윽-

강제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진소운이 말한 ‘귀찮은 놈’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엄혹한 기세를 가진 이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으니까.

“참 내…….”

피식 웃음이 삐져 나온다.

멀리서 느껴지는 기척만 봐도 보통은 넘는 이건만.

단지 ‘귀찮은 놈’이라니.

철순직은 앞에 선 무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의문을 표하며 고개를 돌린 그에게 나직이 말했다.

“잠시만 제 얘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그의 말대로 자신의 손에 진짜 오령선화유가 들어오는지 확인해 보려면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

아까 종남의 머저리가 쏘아 올린 작은 장력이 천동굴 내에 엄청난 파장을 만들어 냈다.

“여기도 막혔습니다.”

“대사형, 여기도 막혔네요.”

“여기도요…….”

그 머저리 덕분에 우리는 천동굴 내에서 같은 길만 뱅뱅 돌고 있었다.

거기에 더불어 종남의 인물을 만나지 않으려 계속 피했던 탓에 오령선화유에는 좀처럼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는 상태.

오령선화유가 나오는 시간이 다가오는 만큼 초조함이 들기 시작했다.

애써 판을 이만치 만들어 놓고 먹지도 못한다니.

억울해서 반년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 뻔했다.

“일단은 좀 쉬자.”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다.

나는 일단 사제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어쩌면 지금 쉬는 것이 마지막 휴식이 될지도 몰랐으니까.

“대사형, 그냥 싸우면서 가면 안 되나요?”

동룡이 조심스레 말했다.

자신이 혹시 싸움에 미친 살인귀로 보이지 않을까 괜한 걱정을 하는 모습.

하지만 다른 사제들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관을 통해 실력이 월등이 상승한 녀석들에겐 종남의 사대나 삼대제자들은 그다지 어려워 보이는 상대가 아닐 테니까.

“싸워선 안 된다. 제압을 해야지.”

“……네?”

동룡이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한다.

“이번 쟁탈전에서 종남의 인원이 죽으면 안 된다.”

“…….”

“심지어 중상을 입어서도 안 되지.”

“……왜요?”

동룡은 영 이해가 안 가는 듯 눈알을 데구루루 굴렸다.

그때 생각하던 은호가 툭하고 내뱉었다.

“명분.”

“그래.”

종남이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천동굴을 통제하고 영약을 독점하려 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종남의 제자가 죽는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된다.

“종남의 제자가 죽는다면, 지금 종남이 저지르는 일 같은 건 안중에도 보이지 않을 거다. 그리고 종남은 피의 대가를 받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지. 더구나 여기 들어온 이들은 개방에 모두 기록된 인물들. 그들 사문에까지 영향을 끼칠 거다.”

“……히익!”

사문에 악영향이 간다는 말에 동룡의 얼굴이 다시금 사색이 된다.

밤중에 호랑이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천동굴에 들어온 이들도 대부분 그걸 알고 있을 거다. 더구나 이곳은 종남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곳. 이곳에서 종남의 제자가 죽었다는 것에 종남은 심히 자존심이 상하겠지. 그리고 그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얼마의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남을 죽일 수 없지만, 종남은 우릴 죽일 수 있다.

정말 엿 같은 상황이지만 별수 없다.

이것이 정치.

이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구조.

잔혹하지만 아이들도 알아야 할 이야기다.

그래야 이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할 수 있으니.

“그러니 종남의 제자들은 어지간하면 피하는 게 좋지. 이해가 가느냐?”

질문을 했던 것이 죄스러운지 동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세 번째 입구로 들어온 무인들이 종남의 제자들을 만날 때가 왔다.

방심하고 있던 종남도 외부 인물들이 들어온 사실을 알게 될 것이고, 정보가 종남 전체에 퍼지면 그들을 막기 위해 제자들을 움직일 것이 분명했기에.

그나마 다행이라면 종남은 오령선화유가 어디서 나올지 모른다는 것.

종남이 제자들을 동굴 전체에 퍼트려 놓은 이유도 그 때문일 테지.

퍼진 제자들을 모아 외부 무인들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그사이 나타날 오령선화유를 종남이 발견할 가능성을 조금은 낮췄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더불어 놈들 손에도 슬슬 제약이 걸릴 테고.’

내가 세 번째 입구를 뚫은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외부의 시선이 많을수록 종남의 움직임도 과감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문에 무단으로 쳐들어온 놈이라면 쳐 죽여도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서 천동굴을 막았다는 종남이 천동굴에 무단으로 들어왔다는 이유로 사람을 쳐 죽이면 그건 또 나름대로 문제가 되지 않겠는가.

나는 눈을 감고 귀에 내공을 집중했다.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린다.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때가 왔다.

나는 봇짐 속에서 복면을 하나씩 꺼내 사제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도둑이 되는 거군요.”

은호가 잠시 농담을 건네곤 복면을 쓴다.

하여간 갈수록 배포도 커지는 게 녀석답다.

나 역시 서둘러 복면을 뒤집어썼다.

이미 개방에 눈에 들었기에 완벽히 신분을 감출 순 없겠지만, 최소한 오리발을 내밀 수 있는 성의라도 보여야지 않겠는가.

“다시 가자.”

사제들을 일으켜 다시금 전진했다.

싸움이 일어났으니, 제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고, 제자들이 움직이면 동굴에 퍼진 제자들이 한곳으로 몰려갈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적중했다.

‘뭐, 완벽한 적중은 아니지만.’

목표로 한 동굴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만, 숫자가 확연히 적다.

‘두 명…….’

애당초 여섯 명의 제자들이 한 조였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완전 양호한 상태.

더구나 오령선화유가 나오는 동굴로 가기 위해선 이곳을 반드시 지나쳐야 한다.

이 길이 아니면 한참을 돌아가야 할 테니까.

상대가 일대 제자만 아니면 해볼만 하다.

여기까지 오면서 봤던 종남의 조 구성을 보면 일대 제자가 둘 이상 있을 리 없다.

계산을 마친 나는 동룡을 바라보며 전음을 보냈다.

-귀식행보로 접근해 단박에 제압해라. 아마 놈들도 최대한 경계를 하고 있을 테니 약점을 노려 제압해야 한다.

내 명령에 동룡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가장 어린 동룡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사련이 나서려 했다.

난 고개를 저었다.

-이건 동룡이 해야 한다. 이 중 가장 날카로운 검은 동룡이니.

사련이 짓씹듯 입술을 앙다물자, 동룡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뭇 이해가 안 갈 수도 있겠지.

왜 어린 사제에게 이런 일을 시키느냐고.

하지만 몰이해적인 감정과 미움을 받아 저들을 생존시킬 수 있다면, 난 어떤 오물을 뒤집어써도 상관없다.

‘딱딱하게 죽어버린 녀석들의 주검을 보느니 차라리 경멸스레 찡그린 표정을 보는 것이 낫다.’

나는 마음을 다지며 동룡과 함께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작은 횃불에 일렁거리는 긴 그림자가 우리 발끝에서 흔들린다.

나는 중도를 든 동룡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그 순간 나와 동룡이 순식간에 상대를 향해 짓쳐들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동룡의 검이 상대의 발목을, 나의 검이 다른 상대의 요혈을 찔러 들어갔다. 죽지는 않겠지만 더 싸우긴 힘든.

촤악!

촤악!

하지만 분명 눈에 보여야 할 핏물과 살점은 온데간데 없었다.

“……!”

그저 찢겨 나간 천쪼가리와 머리카락 일부만 허공에 나풀거릴 뿐.

문제는 상대가 이미 흩날리는 천과 머리카락 사이로 검을 꽂아 넣고 있었다는 것.

쐐액-

나는 철판교의 수법으로 아슬아슬하게 검을 피하며 동룡을 뒤로 당겼다.

상처를 입진 않았지만, 나와 동룡이 또한 옷자락 일부가 잘려 나갔다.

그때.

“누구냐. 감히 종남의 행사에 겁 없이 끼어든 이가.”

낮게 깔린 고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점차 분명해지는 인영.

검은 머리 사이로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두 중년의 사내는.

“외부인이 들어왔다더니 우리가 종남임을 알면서도 기습한 건가?”

기습을 당했음에도 불쾌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빌어먹을…….’

되레 흥분하지 않은 모습이 더욱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위급한 상황에서 당황하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위험한 상황을 충분히 겪어봤다는 이야기.

일대제자만 아니길 그렇게 바랐건만.

‘당주급이라니.’

이거 좀 귀찮아질 것 같은데.

아직도 마신 새끼의 저주가 몸에 붙은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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