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00화 (300/357)

300. <자신을 보이는 흑염룡(4)>

챙! 챙! 챙! 챙! 챙!

무사들이 일제히 뽑아 든 검날이 왁자지껄 시끄럽던 일대를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에 가라앉게 만든다.

“이게 뭐 하는 짓이죠!”

안쪽에 먼저 들어갔던 왕소소가 당차게 치고 나오려 했으나 호위가 그녀를 막아섰다.

“소소야.”

나는 왕소소에게 손을 들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신호를 보내곤 가만히 무사들을 바라봤다.

“검을 뽑은 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무사들.

“나를 침입자 혹은 무뢰한으로 생각한 것이겠지?”

검을 뽑아 든 무사들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아차 싶다는 표정.

“근데 뭐 하고 있는 거지? 검을 뽑았으면 싸워야지?”

“…….”

하지만 그럴 수가 없겠지.

빌어먹게도 나는 은하상단의 상단주가 초대한 손님이니까.

“은하상단의 호위들은 도적 떼가 습격해도 덤벼들지 않는 건가?”

내 말에 길게 줄을 선 이들이 하나둘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겨우 이 행동 하나로 인해 상단의 신용에 금이 가지 않겠지만, 사람이란 존재는 본래 타인을 깎아내리는 걸 기가 막히게 좋아하지 않던가.

나 같은 올곧은 사람을 두고 흑염룡이라는 별호로 수군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리고 이런 상황은 결코 은하상단이 바라지 않던 상황.

척! 척! 척!

은하상단 안쪽에서 군기가 느껴지는 발걸음과 함께 일단의 사내들이 입구로 다가왔다.

탕!

일제히 창을 바닥에 내리꽂는 인원들의 모습에 웅성거리던 사람들이 놀람을 금치 못했다.

“수성당이다!”

“그 추혼채를 홀로 토벌했다지.”

“그럼 유성창은 어디 있지?”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짐에도 수성당원들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장내를 둘러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맨 앞에 선 이가 오만한 눈빛으로 나를 훑은 뒤 검을 뽑은 무사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다, 당주님. 그, 그것이 저분…… 저자가 다짜고짜 폭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당주의 눈동자가 내 얼굴 위로 서늘하게 꽂혀 든다.

“감히 뉘시기에 은하상단의 즐거운 날에…… 흡! 이 무슨!”

나는 그의 목을 틀어쥐기 위해 손을 뻗었다.

말을 하던 당주가 두 눈을 부릅뜨며 뒤로 물러선다.

타탁, 타타탁!

그의 목을 조르려던 내 손이 다시금 뱀처럼 움직이며 그의 목덜미를 쫓는다.

“그만 두시……!”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똑같이 금나수를 펼치는 수성당 당주.

창법 솜씨는 모르겠는데 금나수는 별로였다.

하긴 상단 무력 단체 당주라고 해봐야 무림맹의 당주와는 비교가 안 되는 거니 당연한 건가?

그럼 추혼채는 어떻게 토벌한 거지?

나는 백봉수를 펼쳐 그의 손을 두 번 쳐 내고 마혈을 짚은 뒤 그의 목을 쥐어 번쩍 들어 올렸다.

“꺼억 꺼억─”

다시금 반복된 광경에 은하상단의 무사들은 가히 기절할 것 같은 표정들이었다.

“이런 미친……!”

촥─ 촥─

수성당의 인원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팔방을 점해 나를 에워쌌다.

당장에 명령만 있으면 언제든 온몸에 구멍을 내주겠다는 듯 창날을 가까이 겨눈다.

“당장 손을 떼라!”

“당주님을 놔줘!”

나는 놈들이 무슨 소릴 지껄이건 부들부들 떠는 당주의 목을 붙든 채로 내공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상단 내부 어딘가 있을 주동자에게 외쳤다.

“은하상단은 손님을 이따위로 대접하는가!!!”

소리치는 내 귀가 다 아플 정도로 큰 목소리.

기다리는 이들 중 몇몇은 견디지 못하고 귀를 잡으며 쓰러졌다.

분명 은하상단 내부에까지 들렸겠지.

아마 모르긴 몰라도 얼굴이 굳는 이들이 꽤나 많이 나왔을 것이다.

지금 날 죽이고 싶은 인간이 최소 다섯은 넘지 않을까?

그렇다고 여기선 멈출 순 없었다.

지금 난 단순하고 무식하고 지 꼴리는 대로 사는 흑도여야 하니까.

그래. 난 지금 사흑련주가 인정한 흑도의 신성, 흑도의 공동전인 흑염룡이니까.

어지간히 자존심이 상해서 열 받은 모습으론 안 된다.

진짜 기분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근질거려 죽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본래 흑도들이 그러하듯.

“난 상단주의 초대로 온 사람이다!!! 은하상단은 상단주의 손님을 겨우 이따위로 대접하는가! 나 진소운이 그렇게 우습던가!!!”

손에 들린 당주를 볏짚처럼 흔들며 외치자, 나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던 이들도 하나둘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남의 잔치에 재 뿌리러 온 이라면 당장에 창꼬치가 되어도 모자랄 무도한 행위이건만 정작 놈들 중엔 창을 겨누기만 할 뿐 호기롭게 나서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본래 세상일이 그렇다.

뭔가 예상한 대로 그림이 착착 그려지지 않으면 그때부턴 비상식적인 행동에도 뭔가 사정이 있는 건가 하며 당위성을 부여하고 싶어 하니까.

“씨이이팔!!! 여기 책임자 누구야!!! 책임자 나오라그래!!!”

주변에서 검과 창을 겨누고 있는 무사들의 얼굴은 원치 않게 똥 맛을 느껴 본 사람처럼 일그러진다.

그러게 왜 트집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사람을 건드려. 건들기는.

#

“이게 무슨 소란이냐!”

은하상단 무사들의 목이 일제히 돌아간다.

그러곤 구세주를 만난 것마냥 간절히 그를 불렀다.

“소단주님!!!”

“오, 오셨습니까! 저 무도한 자가 감히 은하상단에서……!”

무사들의 말이 이어지기 무섭게 사내는 굳은 손을 들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마치 모두들 입이 꿰매진 것처럼 입을 꾸욱 다물었다.

소단주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낮게 읊조렸다.

“넌 누구지?”

이제 서른 중반이 지나 보이는 이 싸가지 없는 새끼는 본인이 누군지 소개도 하지 않고 대뜸 호구조사를 하네.

“그러는 넌 누군데?”

내 반말에 사내의 넓은 이마에 핏대가 섰다.

“방금 듣지 못한 건가? 은하상단의 정소군이다.”

정소군이 이름을 밝히자 군중 사이로 숙덕거림이 빠르게 퍼지기 시작했다.

“유성창 정소군!”

“현무각의 대당주 정소군 말인가?”

“대당주에 오르는 데 십(十) 년밖에 안 걸렸다지?”

“더 올라갈 수 있었는데 상단을 물려받기 위해 돌아왔다고 하더군.”

사람들은 심각한 상황보다 유명인을 만났다는 데 더욱 관심을 두고 있었다.

뭐, 신기할 수 있지.

그만큼 구경꾼들에겐 심각한 상황이 아닐 테니까.

정작 정소군은 나를 쏘아보느라 바빴다.

자신의 정체를 밝혔음에도 내가 아무런 행동, 정확히는 굽히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이름을 밝히지 않을 셈인가?”

“귀가 이상한가 보군. 방금 전에 은하상단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는데.”

“……보군?”

정소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요즘 학관에선 기본적인 예의도 배우지 않나 보군.”

짐짓 능청을 떨었다.

“나를 아나?”

“흑도 신성 흑염룡이 학관 대표를 맡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 우리 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은근히 본인이 학관 출신인 걸 상기시키며 선·후배 사이임을 강조한다.

너무 얕은수에 의도가 훤히 드러난다.

그의 가소로운 공격에 나는 코웃음이 난다.

사라진 은전 한 냥 때문에 온갖 심리전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며 서로 죽이니 살리니 하는 도박판 같은 건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하여간 온실 속 화초들은 허술하다니까.

“아! 선배님이셨군요.”

내가 머리를 긁적이며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놈의 입가에 금세 미소가 어린다.

“오늘 네가 한 실수는 무림맹에 있는 내 동기들에게…….”

“근데 소단주이신 선배님도 알고 있는 내 정체를 어찌 은하상단의 무사들은 몰라서 이 사달을 만들었을까?”

“뭐?”

“천하사대상단이라 불리는 은하상단의 수준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거였나, 선배님?”

놈이 나를 공격하면 난 놈의 자부심인 은하상단을 공격한다.

그리고 그 공격에 정소군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정소군도 그냥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내 손으로 향했다.

“……수성당의 당주를 죽일 셈인가?”

그곳엔 입가에 게거품을 물고 눈알이 돌아간 당주가 있었다.

쩝.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정소군 저 새끼 때문에 애 상태가 이리되어 버렸네.

“죽이지 않을 거라면 돌려주지.”

마치 물건을 달라는 듯 말하는 그의 말에, 나는 손에 들린 당주를 정소군에게로 던졌다.

짐짝처럼 그를 받아 든 정소군은 재빨리 상태를 파악하고 혈도를 짚어 그를 깨웠다.

“……크, 크헉 소, 소단주님. 소, 송구합니다.”

“설 수 있겠나?”

“네? 아! 네! 이, 이제 설 수 있습니다.”

정소군의 품에서 정신을 차린 수성당 당주는 얼른 제 역할을 수행하려는 듯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퍼퍼퍼퍽!

“크허헉!”

순식간에 네 방의 주먹이 당주의 요혈에 뚜렷한 권격을 남겼고, 방금 겨우 제힘으로 섰던 당주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부터 무사들까지.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감히 은하상단의 기념행사에 초를 쳐! 이따위 사고도 막지 못하고도 네가 수성당의 당주라 할 수 있느냐!!!”

엄혹한 호통에 한 움큼 피를 토했던 당주는 재차 억지로 일어섰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엉망진창의 몰골로 고개를 푹 숙이는 수성당의 당주.

“죄, 죄송합니다. 소단주님!”

“뭣들 하느냐! 이놈과 사고를 막지 못한 놈들 모두 치워버려!!!”

“넷!”

벼락같은 명령에 대기하고 있던 수성당의 인원들이 입구를 막고 있던 무사들과 당주를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소군은 방금 전 자신이 흥분했다는 기색도 지운 채 무감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행사 진행에 있어 미흡한 점이 있었던 점 사과하네.”

그러면서 고개를 까딱거리는 정소군.

최소한 포권 정도는 쥐어 줄 줄 알았는데.

‘재밌는 새끼네.’

문제가 뭔지 파악했고, 원인이 어디 있는지도 알고 있는 눈치다.

그런데 정소군은 끝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무사들에게 문책하지 않았다.

내가 일으킨 ‘사고’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해서만 문책했을 뿐.

대가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온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해서 이리 무도한 행동으로 상대의 명예를 바닥에 떨어뜨린 자네의 품행은 분명 잘못되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겠지.”

그러면서 은근히 과민하게 행동한 나를 질책한다.

‘대당주까지 올라간 게 제 아비의 뒷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가?’

이런 것들은 만통부의 서류에는 적혀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더구나 이곳엔 상단주님의 초청으로 온 북경의 신료분들께서 오신 상태다. 이런 소란을 벌인 일을 어떻게 책임질 셈이지?”

근데 듣자 듣자 하니 이 새끼가 계속 선을 넘네?

내가 흑도 흉내를 좀 냈다고 돌대가리로 보이나.

“제가 왜 책임을 집니까?”

“……자네 목소리가 크군.”

왜냐면 이건 너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니까.

난 혹여나 못 듣는 사람이 있을까 목소리에 내공을 조금 더 실었다.

“굳이 선배의 동생까지 태을문으로 보내서 오라고 오라고 세 번이나 초청해 놓고선 명단에 없다고 중문으로 들어가라 한 건, 진짜 은하상단이 무능해서입니까?”

나는 좌중을 한차례 둘러본 후, 정소군을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아니면 저를 욕보이기 위해서입니까?”

“…….”

“진정 제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한참 말없이 나를 노려보던 정소군이 겨우 입을 뗐다.

“……경솔하군. 순간의 자존심과 자신의 앞날을 바꾸다니.”

뭐라는 거야.

더 이상 볼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서는 정소군.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입구에 있는 학자의 따귀를 힘차게 날렸다.

짝!

날벼락처럼 따귀를 맞은 학자가 미처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정소군은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손님 제대로 모셔라!”

“네, 넷!”

그제야 검을 뽑아 들었던 무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내 앞에 도열했다.

공손한 태도와 적대적인 표정으로.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 길을 따라 은하상단으로 들어섰다.

왕소소도 내 옆에 바짝 붙어 걷기 시작했다.

왁자지껄했던 은하상단 내부엔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의 불편한 시선들이 우리 쪽으로 몰린다.

그 시선이 불편한지 왕소소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 오라버니. 은하상단은 북경의 고관대작들과 연줄이 깊어요……. 저희 왕가장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이요.”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관과 무림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이 강호의 법칙이지만 상단을 운영하든 문파를 운영하든 관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으니까.

관이 작정하고 방해하고자 나선다면 얼마나 귀찮은 일을 겪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결국 은하상단주가 나서지 않으면 움직일 사람은 없을 테니.”

“네?”

“상단주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왔다면 상단주가 진작 나와 봤겠지. 소단주라는 놈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듯 부하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백팔십 주년 기념 행사?

이백 주년도 아니고 백 주년도 아닌 애매한 행사에 놀이패는 부를지언정 눈치 봐야 할 상사를 부르지는 않는 법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내가 주인공이어야 할 행사에서 다른 이가 주인 행세를 할 수 있거든.

“반대로 이야기하면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벼슬아치들은 대부분 상단주에게 잘 보여야 하는 이들이라는 거다.”

“허…… 설마, 처음부터 다 계산하신 거예요?”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어느 정도는 실시간으로 계산을 하는 거지.”

왕소소가 경악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와…… 사련 사저 말대로 잔머리가 정말 잘 돌아가시네요.”

“…….”

뭐지 칭찬인가? 욕은 아니겠지?

“이쪽입니다.”

길 안내를 하던 무사가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전각을 가리킨다.

딱 봐도 한 방에 대여섯 명씩 묶는 곳인 듯했다.

참으로 여러 가지 준비했다.

내 기를 꺾으려고 이 정도로 애를 쓰다니.

나 생각보다 더 대단한 사람인가 봐.

“설마 여기가 우리가 묵을 숙소인가?”

“……네?”

무사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린다.

나를 농락하기 위해 얼마나 정교한 판을 짜뒀는지 모르겠지만 은하상단은 큰 실수를 저질렀다.

“나는 상단주의 초대를 받고 왔다!!! 그런데 이런 숙소에서 묵으라고?!!!”

어떤 판이든 내가 아주 개판을 만들어 버릴 거니까.

“씨이이팔! 여기 책임자 누구야!!! 책임자 나오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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