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01화 (301/357)

301. <자신을 보이는 흑염룡(5)>

천하를 사분하고 있는 거대 상단들은 이미 평범하게 식료품을 사고파는 상단이라 볼 수 없었다.

하나의 세력.

하나의 시장 그 자체.

수백만의 삶을 쥐고 흔드는 세상 그 자체나 마찬가지인 존재들.

특히 은하상단은 북경을 중심으로 한 정부 관리들과의 깊은 인연을 바탕으로 국가 단위의 물류를 도맡아 유통하면서 몸집을 키워온 만큼, 북경의 권력과도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이다.

왕가장을 비롯한 다른 삼대 거상들이 은하상단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은하상단과 한 몸이 된 거대한 권력 때문이었다.

관과 분리된 무림과 달리 상계는 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니까.

삼대 거상들의 입장도 이러할진대 그보다 세가 약한 상단들은 은하상단에서 감히 숨도 편히 쉬지 못한다.

그 상단이 아무리 거대 무문과 연관이 되어 있다 한들.

상업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후엔 돈의 힘이 상하를 결정하는 것이니까.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닌데…….’

은하상단의 무사를 족쳐 꿍쳐둔 별채를 받아내고, 거한 술상까지 대령시킨 채 희희낙락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진소운을 보며 왕소소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적진 한가운데서, 그것도 적들에게 한바탕 시비를 걸어놓고도 술이 넘어가는 걸까?

“……진 오라버니. 괜찮은 거예요?”

“으응?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느냐? 책임자 불러줄까?”

“아, 아니에요.”

왕소소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내공을 얼마나 담았는지 책임자를 부를 때마다 은하상단이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무시당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수치심이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 말을 직접 할 수 없기에 왕소소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 정소군이요. 그 사람 학관 선배잖아요. 무림맹은 출세하기 위해선 선배들의 평가나 위에서 끌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이렇게 막 나가도 되는 거예요?”

“출세?”

진소운은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신경도 쓰지 않고 술잔을 넘겼다.

그 모습에 왕소소만 더욱 속이 타들어 갔다.

“네. 무림맹에서 출세하려면 훌륭한 인맥이 필수라고 들었어요.”

“인맥이라…….”

“세상일이 결국 다 사람으로 통하는 거잖아요.”

당장 자신의 아버지만 해도 물질적으로 돌려받는 것 없이 꼭 챙기는 사람들이 있다.

거대 문파들의 수장들이나 친분이 있는 관리들.

실력이 좋은 장인이나 그 장인들을 이끄는 책임자 등.

그 사람들에게 큰일과 작은 일이 생길 때마다 왕금산은 바쁜 시간을 쪼개어 그들을 방문하여 축하하고, 위로하고 격려한다.

장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라는 지론을 왕소소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그런데 어찌 오라버니는…….

눈빛이 혼란스레 흔들리는 왕소소와 달리, 진소운은 태연자약하게 술잔을 채우며 말했다.

“본디 인맥이라는 건 말이다. 그냥 내가 잘해준다고 생기는 게 아니야.”

그러곤 또다시 술잔을 넘겼다.

“일단은 내가 상대와 비슷하거나 그 위에 있어야 인맥이라는 게 형성이 되는 거지.”

“그게…… 무슨 말이죠?”

“상대가 존중할 만한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면, 애당초 인맥은 만들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진소운의 말로 인해 인맥을 다시금 되돌아본 왕소소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왕금산이 만들어 온 인맥은 모두, 왕가장이 있었기에 형성될 수 있었던 인맥이기도 했다.

왕소소가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진소운이 말을 이었다.

“내가 정소군에게 아무리 굽신거린다 한들, 그는 날 이끌어 주지 않을 거란 이야기지. 되려 날 이용하면 모를까.”

“그렇다고 깽판을 쳐요?”

“에헤이, 정확히 이야기하면 깽판은 아니지. 시작은 저쪽에서 했으니까.”

애당초 시비 걸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지 않았나?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왕소소는 이야기를 끊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아버지에게선 듣지 못했던 숨겨진 세상의 비밀을 듣는 듯한 기분이 느껴졌으니까.

“만약…… 오라버니가 정소군에게 도움을 받고 싶다면요? 그럼 그와 인맥을 만들어 두어야 하잖아요.”

“불편한 사이에 굳이 뭐 하러 관계를 만들려 애써? 그냥 정소군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나도 필요한 것을 받으면 되지.”

“…….”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이야기다.

거래는 서로 간의 필요만 충족시키면 되는 거니까.

하지만 그걸 정소군에게 적용시키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다.

말마따나 정소군은 외모면 외모, 무공이면 무공, 집안까지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인물이니까.

오만하긴 하지만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이가 오만을 떤다 해서 그것을 두고 욕할 사람은 없다.

그는 실제로 부족한 게 없으므로.

왕소소는 마음속으로 떠오른 의문을 조심스레 입 밖으로 내었다.

“하지만…… 그는 필요로 하는 게 없을 텐데요.”

거래란 자고로 상대가 원하는 걸 내가 가지고 있어야 성립되는 법이니까.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던 진소운이 손을 우뚝 멈춰 세웠다.

그러곤 입술을 귀까지 당겨올린다.

“그렇다면…….”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동안, 왕소소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뭔가를 필요로 하게 만들면 되겠지.”

“…….”

허공에 붕 뜬 말이었지만, 진소운이라면 왠지 진짜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뭐, 뭐지…….’

그간 왕금산의 소개로 만난 걸출한 사람들에게서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이상한 기분.

왕소소는 더욱 궁금해졌다.

“……자꾸 질문드려서 죄송해요.”

진소운은 즐겁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새 눈꼬리도 반달 모양으로 변해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면요, 오라버니. 어쨌든 대천상단은 계속 은하상단과 거래를 해야 하잖아요. 이런 경우 인맥을 유지해야 할 텐데…… 어쩌실 생각이신 거예요?”

“아까 인맥은 어디서 나온다 했지?”

“……존중이요.”

“그럼, 존중은 어디서 나오는지 아느냐?”

돈이나 지위라 이야기하려던 왕소소는 뭔가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내저었다.

높은 벼슬이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왕금산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니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소운이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나직이 말했다.

“공포다.”

“……네?”

“굳이 그의 위에 설 필요까지는 없다. 단.”

진소운의 눈동자가 번뜩인다.

왕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상대를 잘못 건드렸을 때, 자신에게 큰 피해가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 주어야지. 그것만으로도 어떤 상대에게서든 존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러다…… 은하상단과의 거래가 불발되기라도 한다면…….”

“상단주에겐 신용이 생명이자 목숨이다. 신용을 이어가기 위해선 가진 재산을 다 털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존재들이지. 더구나 자신들의 실수로 시작된 일로 거래를 불발해? 과연 세간에서 그의 신용이 어디까지 떨어질까?”

순간, 왕소소는 온몸에 소름이 쫘악 퍼지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위협도, 살기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언가 봐선 안 될 것 같은 심연을 목격한 듯한 기분.

‘처음부터…… 다 계획된 거였나.’

입구에서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실력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진소운이 달라졌다 생각했다.

본래 약소무문에 불과했던 태을문의 제자, 과거의 진소운이었다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테니까.

이제는 태을검제의 무공을 되찾고, 학관의 수석 자리에 올랐으니 이 정도의 변화도 괜찮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들어보니 아니었다.

진소운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자존심 때문에 제멋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이고 있었던 것.

그러고 보니.

[아오! 그놈이 무림 정신지 정신병 잔치인지를 치러 갈 때 그으냥 왕가장에 앉혔어야 하는데 아오!]

아버지는 술에 취한 밤이면 그렇게 한탄에 한탄을 했었다.

물론 진소운의 훌륭함이야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아버지의 탄식은 다른 인재를 놓쳤을 때에 비해 몇 배는 더 길고 오래 갔다.

‘되려 내가 진 오라버니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건가?’

허허실실 웃으며 주향에 취해 몸을 떠는 진소운이 새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빤히 보냐?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

“아, 아니에요.”

“너 혹시 나 몰래 술 먹었냐? 얼굴이 빨간데?”

“네? 숙녀에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전 그런 짓 안 하거든요!”

“하하하.”

그렇게 왕소소가 발끈하는 사이, 외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공자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정중했다.

“연회에 참여하실 시간입니다.”

왕소소가 진소운을 바라봤다.

진소운이 술잔을 내려놓고 씨익 웃었다.

“그럼 어디 한번 존중을 받으러 가볼까?”

진소운이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하고 그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왕소소는 기대감이 마음속에 차올랐다.

그때.

“근데 저 무사 말이다…….”

몸을 일으키다 말고 고개를 삐딱하게 꺾는 진소운.

“뭔가 강압적이게 들리지 않느냐?”

“네?”

당최 무슨 소리람.

분명 은하상단에 들어온 후 여태껏 보았던 이들 중에 제일 정중했던 것 같은데…….

“아니, 목소리 말고 하는 말 말이야. ‘참여하실 시간’이라니. 마치 우리가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제하는 것 같지 않나 이 말이다.”

“…….”

어…… 그건 좀 많이 나간 거 같은데…….

하지만 왕소소가 뭐라 말할 새 도 없이, 성큼성큼 걸어간 진소운이 문을 벌컥 열었다.

콰앙-

문밖의 무사는 내부의 대화 소리를 들은 건지 이미 얼굴이 사색이 되어 있었다.

“저, 저, 진 공자님, 전 그게 아니라…….”

진소운은 무사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러게 연회에 참여할 건지 어쩔 건지 먼저 물어봤어야지.”

무사는 이미 포기한 듯 눈을 꾸욱 감아버렸고.

진소운의 목소리가 다시금 별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뭐지? 이것도 계산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즐기는 듯한 모습은 그저 자신의 착각인 걸까?

#

우린 무사의 안내에 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연회장에 처음 들어선 나는 짐짓 놀란 표정을 감추느라 애를 써야 했다.

‘태을문의…… 대연무장보다 더 큰 거 같은데?’

더구나 대연무장은 실외에 존재하는 건축물.

지붕까지 천장을 뻥 뚫어놓아 실내에 있음에도 개방감을 느끼게 하는 연회장의 위용은 그야말로 사람을 압도할 만했다.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니야?’

이 층과 삼 층에는 연회장이 내려다보이는 난간이 존재했다.

정부 관리들과 은하상단의 중요인사들이 그곳에서 연회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압도될 지경인데. 연회장의 끝에는 들어온 입구보다 두 배는 더 큰 문이 존재했다.

당최 어떤 용도로 쓰는 건지 알 수 없는 기이한 형태에 나는 왕소소를 바라봤다.

“소소야, 저 문이 무슨 용도인지 아느냐?”

“음, 아마 연회장이 좁을 경우에 저길 터서 공간을 확보하려는 걸 거예요. 아마 중요 인사들을 대접하는 공간이기도 할 거고요.”

“…….”

이렇게 큰 연회장을 사람으로 다 채울 일이 있나?

더구나 중요인사를 대접할 자리라면 따로 별채를 만들면 되는 거잖아?

“자기가 방구 좀 뀐다고 하는 사람들은 자리에 엄청나게 연연하거든요. 저 문도 여기 연회장보다 조금 높게 지어져 있죠?”

그녀의 말마따나 큰 문에 다가가기 위해선 또 열 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저 위에 앉으면 아마 여기 연회장이 뻥 뚫려 보이겠죠. 그럼 무희들의 공연을 보기에도 편할 거고요. 그걸 위해서 붙여서 지은 걸 거예요.”

진짜 세상엔 돈이 썩어나는 놈들이 있구나 싶다가 문득 왕소소를 다시 보게 되었다.

“넌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냐? 이전에 여기 와본 적 있는 거냐?”

“아뇨. 저도 처음이에요. 왕가장에 비슷한 건물이 있어서 짐작한 거죠.”

“…….”

맞다. 얘도 겁나게 잘사는 집 딸이었지.

“아, 그리고 여기선 대사형으로 부르는 게 더 좋겠죠. 대사형은 어디까지나 태을문의 사람으로 온 거…….”

“아니, 오라버니라 부르거라.”

“네? 하지만…….”

“되었다. 너와 나 사이에 그런 거리감 있는 호칭은 집어치우거라.”

“……정말요? 그래도 될까요?”

그간 내가 푼돈 좀 벌었다고 긴장이 풀렸던 게 분명했다.

왕소소를 동네 아는 여동생처럼 대하다니.

앞으론 친여동생처럼 대해야지.

친여동생과도 같은 왕소소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어린다.

“……근데 다들 호의적이지 않네요.”

거야 당연하겠지. 입구에서부터 그 깽판을 부렸는데.

힘 있는 자들은 무식해 보이는 내 모습에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고, 힘없는 이들은 나와 친한 모습을 보였다가 경을 칠까 무서워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우린 어디에 앉아야 하지?”

우리 옆에 목석처럼 서 있던 무사에게 묻자 그가 움찔하며 되묻는다.

“자리를 안내해 드려도 될까요?”

“왜 두 번 묻게 하지?”

움찔.

무사가 얼른 양손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연회장 가장 상석으로 보이는 맨 앞줄이었다.

거, 처음부터 이랬어야지.

“이제 좀 일을 제대로 하는군.”

“네. ……책임자가 신경을 썼을 겁니다. 그, 그럼 편히 즐기십시오.”

무사는 혹여나 내가 말이라도 걸까 싶어 부리나케 연회장을 나갔다.

처음 우리가 들어섰을 때 느껴졌던 정적도 잠시, 음악이 흐르고 무희의 공연이 계속되자 사람들은 우리가 없는 것처럼 다시금 연회를 즐기기 시작했다.

문제라면 정말 없는 듯이 행동했다는 게 문제지만.

“진짜 아무도 안 오네.”

“네?”

“아니다. 그래도 나름 통성명이라도 할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

관리나 상인들은 모르겠지만, 강호의 무인들 중에는 호기 넘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더러는 상단주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시비를 거는 자들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이들도 일절 없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라 하셨거든요.”

가냘픈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이 부실 만큼 화려한 궁장의 정소을이 있었다.

지난밤에 보였던 뇌쇄적인 붉은 색이 아닌 하얀색의 금실이 수놓인 궁장을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선녀의 모습 같았다.

그러면서도 걸을 때마다 치마 사이로 보이는 늘씬한 다리가 뭍 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다시 뵙습니다. 진 공자님.”

정소을이 고개를 숙이며 기품 있게 인사를 한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으로 답했다.

“이렇게 또 뵙는군요.”

신기하게도 그녀는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모두 잊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소녀, 오늘을 애타게 기다렸답니다.”

“허! 참!”

왕소소가 기가 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정소을은 여전히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아주 능숙하시군요.”

“물론…… 공자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남자를 많이 상대하다 보니 저를 창부라 부르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요.”

난 여우 정도로 표현하려 했는데, 이 여자…… 본래도 이렇게 뒤가 없는 여자였네.

표독스런 눈빛으로 쏘아보던 왕소소도 그녀의 거친 언사에 순간 놀랐는지 토끼처럼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소녀의 마음을 진정으로 설레게 한 건 공자님이 처음이셨답니다.”

“네?!”

나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게, 훗날 제 오라비를 제치고 은하상단을 차지하는 ‘은범’의 입에서 튀어나올 종류의 말이 아니니까.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정소을이 소맷자락으로 제 입을 가리며 어깨를 들썩인다.

“어머! 제가 드디어 진 공자님을 놀라게 했나 보네요.”

정소을은 뭐가 그리 좋은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여자 진짜 뭐냐.

“그보다 아까 한 말…… 뭡니까? 문제라니?”

“진 공자님이 이곳까지 오신 일로 심기가 불편해지신 듯하니, 그러지 않도록 다른 분들에게 당부를 하신 거지요.”

그러니까 내가 깽판 놓지 않도록 나를 제지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뒤로 물렸다?

정말이지 끝도 없이 신경전을 펼치는구나.

“그렇군요.”

“흐음…… 역시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놀라다니요?”

“보통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부담스러워하거나, 당황하기 마련인데 말이죠.”

난 짐짓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잘못한 게 없는데 부담스러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순간, 정소을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나 재미난 분이시군요. 그래도…….”

잠깐 말을 멈춘 그녀가 바짝 다가와 속삭인다.

“소녀, 공자님이 너무 끝까지 가시지 않길 바랍니다. 망가진 장난감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니까요.”

그러더니 슬쩍 고개를 숙인 뒤 아무렇지 않게 다른 탁자로 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뭐래요?”

“나보고 자꾸 까불지 말래. 망가지고 싶지 않으면.”

“……네?”

다시금 표독스런 눈빛으로 돌아온 왕소소가 뭔가 말을 이으려던 찰나.

“상단주께서 입장하십니다!”

무사의 우렁찬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입구를 바라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앉은 자리가 연회장의 가장 앞줄에 위치해 있었다.

그럼 상단주는 대체 어디에 앉는다는 거지?

그런데 내가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과는 달리 사람들은 여전히 앞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입구보다 두 배는 더 큰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하…… 하하.”

나는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며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문이 열리고 왕소소의 말대로 연회장보다 더 화려한 내부 공간이 드러났다.

팔(八) 자 모양의 탁자 배열에 앉아 있는 스물 남짓한 사람들.

그리고 가장 상석에 오연하게 앉은 은하상단의 상단주까지.

‘와…… 씨바 저것들 봐라?’

저들은 연회장 전체를 구경거리 삼아 자신들끼리 연회를 펼치고 있었다.

그때 무사가 재차 외쳤다.

“지금부터 호명하겠소. 순서대로 나와 상단주께 인사를 올리시오!”

너무나 당연한 수순인 듯 말하는 무사.

이 새끼들 판을 진짜 제대로 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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