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28화 (328/357)

328. <신령 사냥(3)>

화후.

불타는 원숭이라는 뜻이지만, 실제론 영맥의 기운을 머금어 양기를 가득 품은 원숭이를 표하는 말로 쓰인다.

화후의 내단은 무인, 그것도 특히 양기가 가득한 남성 무인에게 끝없는 힘을 공급해 주는 영약 중의 영약으로 손꼽히는데.

과거 모용세가의 소가주 모용상원이 죽음의 위기 앞에서도 마지막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이 바로 화후의 내단임을 생각하면.

‘강호에서 얼마나 귀하게 취급받는지 알 수 있지.’

더구나 화후의 내단은 효용뿐만이 아니라 구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가격이 더욱 높게 쳐진다.

끝없이 불타는 기운을 가진 날렵한 원숭이를 누가 잡을 수 있겠는가. 무인? 엽사?

아무튼 이런 점 때문에 나 또한 강호영약서에 명시되어 있음에도, 화후의 존재에 대해선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영약을 취하기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건만, 혼자서 화후 엉덩이를 뒤쫓는다니.

그건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우어어어어!

분명 그런 생각을 했는데…….

우람한 체구에 엄지손가락만 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사납게 울부짓는 거대한 원숭이.

아니, 이걸 원숭이라고 할 수가 있나? 체급 자체가 어지간한 사람보다 큰데?

화르륵!

더구나 저 털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끈한 열기.

그간 묵림에서 봐왔던 마물들과 다른 존재임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러니까, 양 대협이 말한 태양후가 너인 거냐?”

우어어어어어어!

마치 대답을 하는 듯 울부짖으며 살기를 내뿜는 태양후.

“……사냥이 불가능하다 한 이유가 있었구나.”

이런 걸 사냥하겠다고?

제 정신들인가?

내뿜는 살기가 어지간한 마인 뺨을 때릴 수준.

놈의 몸 안에서 느껴지는 영맥의 기운은 그간 봐왔던 마물들의 열 배는 됨직하고.

텅, 텅, 텅, 텅.

가슴 부근엔 털 대신 검은 피부가 드러나 있는데, 놈이 주먹으로 그곳을 때릴 때마다 쇳덩이를 때린 듯 공간이 떵떵 울렸다.

당최 이걸 어찌 사냥할 수 있을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

“……허, 미치겠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려 하자, 태양후가 송곳니를 더 드러내며 앞으로 성큼 다가온다.

순간 활로가 막혔다.

고도의 수준에 오른 무인들이나 쓴다는 원기.

‘이거 진짜 동물 맞아?’

아무리 영물이라 해도 엄연히 그 시작은 동물이었을 텐데.

어째 무인들처럼 공간을 다 막고 있다.

한 번만 틈을 보인다면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하, 근데 억울하다.

“시발…… 그냥 보내주면 안 되냐? 난 걔들이랑 전혀 다른 사람인데.”

크르르르.

“씨바…… 그럴 줄 알았다.”

역시나 우락부락한 외모답게 말은 통하지 않았다.

이제 선택지는 없는 상황.

부디 태양후의 발이 천하독행신보단 빠르지 않길 바라며 몸을 살짝 틀었다.

“그럼…… 다음에……으응?”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곧장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태양후가 하는 행동들이 어쩐지 마음에 걸린다.

다른 마물들은 사람을 보자마자 곧장 공격을 해왔으니까.

태양후도 마찬가지로 나를 공격하고 싶어 하는 모양이긴 한데 어쩐 일인지 주저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 내가 물러나길 바라며 허세를 부리고 있는 듯한 기분.

우어어어어어!

화르르르륵!

커다란 울음소리와 함께 피부가 익어버릴 듯 화끈한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주변에 확 퍼진 불길 사이로 보이는 무언가.

‘상처…….’

종아리부터 허벅지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 위로 딱딱하게 메마른 핏덩이들이 붙어있고, 가슴을 때리는 주먹엔 잘린 손가락 때문에 빈공간이 보였다.

오래전에 생겼다 사라진 상처가 아닌, 얼마 되지 않아 이제 막 곪기 시작한 상처.

단면이 매끈할 걸 보면, 짐승의 이빨로 물어뜯긴 건 아니었다.

애당초 묵림의 마물들이 상대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묵림에 들어와 얻은 수없이 많은 정보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진다.

‘교관들과 학관생들이 쫓던 게 이거였나?’

지난 며칠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학관생들과 싸웠던 신령이 바로 태양후.

그리고 그 태양후가 학관생들에게서 벗어나 우연히 나와 조우한 것이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크어어어!

두 발에 모으던 내공의 움직임을 멈췄다.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다만, 살기는…….”

정확히 말하면, 태을진경을 다른 방식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

두 발에서 몸 전체로.

그중 가장 많은 양의 내공이 집중된 곳은.

스르릉.

바로 오른손에 쥐여진 적광검.

“나도 어디 가서 꿀리진 않거든.”

끄아아아아악!

붉은 적광검에서 끔찍한 살기가 뻗어 나온다.

제 가슴을 두들기던 태양후가 주춤 뒤로 물러서며 송곳니를 보이며 으르렁거린다.

아무리 그래도 막타는 못 참지.

#

내가 공격 태세를 취하자마자 태양후가 먼저 달려들었다.

마치 선공이 얼마나 유리한지 알고 있다는 듯이.

크엉!

갈기에서 내뿜어지던 불꽃들이 팔로 이동하더니 그대로 주먹을 내지른다.

펑!

적광검을 들어서 막았음에도 충격은 해소가 되지 않았다.

몸이 붕 떠올라 나무에 처박혔다.

콰쾅!

대체 뭐지, 이 파괴력은.

한 대 맞았을 뿐인데 내부가 격하게 흔들린다.

“으윽.”

그 단단한 묵림의 나무가 거의 박살이 났다.

나는 얼른 일어나 자리를 떴고, 밑동이 부러진 나무가 그대로 쓰러지며 사방에 먼지를 일으켰다.

쿠쿵.

다행히 충격은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아니, 고통이 조금 덜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내공을 사용한다 해도 고통은 전부 분산할 순 없는데……. 금강청 덕분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태양후를 찾았지만 태양후는 본래 있던 자리를 벗어난 지 오래였다.

“제길 도망친……응?”

콰쾅!

먼지를 뚫고 작열하는 시뻘건 주먹.

퍽! 퍼퍽!

바위에 튕겨 나무에 부딪히며 갈비뼈가 부서지기 직전, 이를 악물고 몸을 뒤틀어 자세를 다잡았다.

촤아아악.

바닥을 긁으며 겨우 몸을 세우고 고개를 들자, 이미 태양후는 눈앞에 발을 들이밀고 있었다.

시발 이런 건 어디서 배운거야!

나는 녀석의 발목을 잡고 유운신공 연화(蓮花)를 펼쳐 놈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우어어어!

놈은 별달리 충격이 없었는지 꼬리로 몸을 받치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후, 간만에 몸이 좀 풀리는 기분인데.

“이번엔 내 차례지?”

촤르르르륵

대천검법으로 시작한 환검이 놈의 앞을 막아서고, 이어 놈의 좌·우를 포위한다.

타다닥.

타다닥.

재빠른 몸놀림으로 검날을 피하던 놈은 이내 자신이 검의 포위망에 갇힌 걸 깨달았는지, 분하다는 듯 이빨을 드러냈다.

나는 틈을 놓치지 않고.

곧장 대천검법에서 쌍천검결로 검위를 바꾸어 놈을 압박했다.

촤아악, 촤아악, 촤아악.

아무리 재빨라도 물량으로 쏟아붓는 공격을 피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

놈의 몸에 하나둘 생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피부도 두껍고.’

분명 살을 베어내고 있건만, 마치 단단한 오동나무를 베는 듯 검날이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나는 방심하던 마음을 완전히 버리고 검강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방금까진 사방에 빛이라곤 놈의 갈기에서 나오던 것이 다였던 반면, 지금은 사방으로 푸른색의 검강이 일렁이며 놈의 급소를 살벌하게 노리고 있었다.

물샐틈없이 검강에 포위당한 놈의 목과 팔을 자르려는 순간.

놈의 갈기 전체가 붉게 달아오르더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스걱, 스걱, 스걱.

이제 곧 핏물을 쏟아내며 쓰러질 놈을 예상했건만.

놈은 작은 상처를 무시한 채 큰 상처들만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마치 환검과 변검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무인처럼.

“……시발 먼데!”

어이가 가출을 하는 그 순간에도 놈의 팔로 다시금 열기가 모여들어 정신을 놓을 수 없었다.

“그렇게 티를 내면 모를래야 모를 수 없지 요놈아!”

설화를 펼쳐 놈을 바닥에 처박겠다는 일념으로 손을 뻗었는데.

퍽!

복부에 강한 충격이 전해지는 동시에 쓴물이 목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허, 허초를 쓴다고?’

공중으로 몸이 붕 떠오른 탓에, 한낱 원숭이 새끼가 어떻게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정신을 쓸 겨를도 없었다.

이윽고, 놈이 힘을 모은 주먹을 내질렀으니까.

쾅!

커다란 충격과 함께 몸이 화살처럼 뒤로 쏘아진다.

“커흑!”

한바탕 핏물을 내뱉고 나자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나는 나무에 부딪치기 전에 빠르게 비룡조를 뽑아내어 몸에 제동을 걸었다.

“그래…… 이래서 신령, 신령 그러는구나.”

다시금 짐승처럼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나를 노려보는 태양후.

나는 놈을 바라보며 피가래를 내뱉었다.

“근데…… 나도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아갈 생각이 없거든.”

두 다리에 가득 힘을 주고.

펑!

땅거죽을 뒤집으며 앞으로 튀어 나간다.

놈이 힘에 자신이 있다면 나는 속도로 승부를 보면 그만.

서걱.

아니나 다를까, 처음으로 놈에게 유의미한 피해를 입혔다.

끄아아악!

태양후가 잘린 제 손가락을 내려다보며 비명을 내지른다.

나는 적광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내고 다시금 놈에게 달려들었다.

극성에 이른 소천검법이 검강을 머금고 놈의 요혈을 파고든다.

“어디 이것도 한번 막아 보시지!”

온몸의 갈기에서 불길이 피어오르자 검강의 날카로움이 또다시 무뎌진다.

‘대체 뭔 놈의 조화야.’

검강이라면 아무리 단단한 강철도 두부처럼 썰어버릴 수 있건만.

불길이 오른 놈의 피부는 마치 금강석 피부라도 된 양 도저히 틈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베어내지 못할쏘냐!”

서걱, 서걱, 서걱.

놈의 갈기는 어느 정도 방호력을 갖춘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론 검강 전체를 막을 수는 없고, 검강까지 막아내기 위해선 주먹을 내지를 때처럼 화기를 모아야 한다.

놈이 집요하게 찔러드는 요혈들에 더 많은 기운을 모을 때마다, 나는 끈질기게 놈의 살점을 베어내고 또 베어냈다.

드디어 놈의 온몸에 난 크고 작은 상처들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놈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는지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어딜!”

나무를 타고 숲을 가로지르는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민첩했지만, 천하독행신을 벗어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괜히 쫄았네.’

그렇게 놈이 남기는 불꽃의 꼬리를 쫓으며 달려가는데, 태양후의 몸이 갑자기 터질 듯 끓어오르더니 순간.

화악!

시선을 가려버릴 정도로 커다란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두 눈을 찌르는 강력한 빛 공격에 순식간에 시야를 빼앗겨 버리고, 빛이 사라진 뒤 다시금 고개를 들었을 땐 놈의 흔적은 감쪽같이 사라진 뒤였다.

“대체 뭐냐…….”

이게 말이 되나? 갑자기 몸을 숨긴다는 게?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것도 아닐 텐데.

나는 얼른 영맥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리 몸을 숨긴다 한들 몸안에 자리한 영맥의 기운은 숨기지 못할 터.

“허……. 천연진까지 이용할 줄 안다고?”

태양후는 멀지 않은 곳에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천연진 속에 제 모습을 꽁꽁 숨기고 있다.

나는 일부러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 어디 갔지? 도저히 못 찾겠네. 그만 돌아가야겠다…….”

라고 하면서 검기 날리기!

퍼퍼퍼펑!

우끼이익!

처음으로 원숭이다운 비명을 내지르며 수풀에서 튀어나온 태양후.

다시금 놈의 뒤를 쫓아가는데, 놈이 벌이는 짓거리를 보면서 기가 찼다.

놈이 나뭇가지를 집어 툭툭 던질 때마다 놈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경로가 틀어져 버리는 게 아닌가.

아니, 무슨 손오공이냐고.

이러다 분신술까지 쓰는 거 아니야?

‘묵림의 길을 훤히 다 알고, 천연진을 직접 이용해서 천적의 공격으로부터 도망친다?’

아마도 내가 영맥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진즉 태양후를 놓쳤을 것이다.

세상에 숫자로 밀어붙여 안 되는 일이 거의 없다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묵림 내에서 영맥을 읽지 않고 태양후를 잡을 방법 따윈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읽을 수 있다 해도 이 압도적인 기운까지 받아낼 수 있어야 했고.

“고로 넌 재수가 없구나.”

퍼퍼퍼펑!

검기가 놈의 갈기를 찢으며 작열하자 놈이 괴로운 듯 비명을 내질렀다.

우끼이이익!

“내가 영맥도 읽을 줄 아는 놈이라.”

발에 길게 상처가 나며 바닥을 나뒹구는 태양후.

녀석을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 검강을 그대로 내려쳤다.

꽝!

처음으로 태양후가 날아갔다.

아까 내가 날아간 속도만큼은 안 되었지만.

나무에 부딪히자마자 벌떡 일어나 바닥에 바짝 엎드린 놈이 지그시 나를 노려본다.

크르르르.

기가 찰 노릇이다.

놈이 내 활로를 막았듯 나 또한 놈의 활로를 막았다.

한 걸음만 까딱 잘못 움직여도 바로 목을 베어버릴 수 있는 준비를 모두 마친 것.

근데 이 원숭이 놈이 꼼짝을 안한다.

마치 내가 막아선 곳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하하…….”

당최 내가 동물을 상대하는 건지 인간을 상대하는 건지 영 감이 잡히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말이야.”

나는 태을팔만신보를 밟아 세 개의 환영을 만들어 놈의 시선을 빼앗고.

우끼이!

놈의 불주먹이 환영에 작렬하며 헛방을 날릴 때, 놈의 머리를 내리쳤다.

녀석이 급하게 들어 올린 손의 갈기가 밝게 빛났지만.

“흐압!”

이번엔 늦었다.

콰콰쾅!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태양후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크르르르.

부러진 팔과 상처 입은 발로 애써 일어나 보려 하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지 계속 쓰러진다.

끝까지 투지를 버리지 않는 모습을 보니 확실히 영물은 영물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지워지지 않았다.

“사람 말만 했으면 굳이 내단을 빼먹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놈의 모습을 감상하면서 이거 사업적으로 아주 대박이 날 수도 있겠다 싶었달까?

성 하나만 차근차근 돌아도 대천상단 일 년치 수입 정도는 금방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단 말이지.

그런데 그런 내 말마저도 이해했을까? 태양후는 마치 말을 할 것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 모습이 왠지 소름이 끼쳐 얼른 검을 쥐었다.

“내단은 잘 먹으마.”

적광검을 역수로 쥐고 놈의 심장을 내려찍자.

퍽.

돌덩이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태양후가 두 눈을 부릅떴다.

슥.

적광검을 뽑아내자 작은 상흔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오른다.

그리고.

뻐끔거리던 태양후의 입에선…….

“처, 천마…….”

사람 말이 튀어나왔고 난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

어, 어케 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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