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모든 걸 기억하는 천재무사-345화 (345/357)

345. <복수>

전신을 피로 적신 철순직은 떨려오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정말로 뚫어내다니.’

묵림의 사지라는 마경에 들어선 상황이었지만, 되려 몸의 긴장이 풀리고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소운이 말한 대로 마경에 들어서자 적들의 공격이 딱 멈췄으니까.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이들이 쓰러졌고 다시 합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원망의 소리를 내뱉거나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

자신들을 이끈 자가 가장 앞서서 가장 큰 위험을 짊어진 채 이곳까지 왔으니까.

이런 상황에서까지 대장 놀이가 하고 싶은 건가, 라며 볼멘소리를 내뱉던 이들은 그가 흘리는 핏물에 입을 다물었고.

자신들의 처지를 생각해 주지 않는다며 불만을 토로하던 이들은 그의 처절한 모습에 고개를 숙였다.

그는 그가 말한 대로 발버둥 치기 위해 뭐든 했고, 최선을 다했다.

‘정말로 내뱉은 말을 이뤄내다니.’

분명 최악의 상황이었다.

누구 하나 쉽사리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절망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그저 지난 생을 반추하고 미련스럽게 후회 속에서 허우적대야 하는…….

그조차도 하지 못한 이들은 헛된 희망만 바라봐야 하는 최악의 상황.

그런 상황에서, 진소운은 황당무계한 일을 벌이고 사람들을 이끌었다.

어떠한 대가도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가 바란 것은 오직 하나.

권한.

그가 본래 가졌어야 할 그것.

그는 결국 받아낸 권한보다 더 과한 책임을 졌다.

자신의 생을 담보로 약속을 지켰다.

철순직은 처음 보았다.

이토록 거대한 무게감을 짊어진 인간을.

죽현방에서도, 종남에서도,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다.

저렇게 휘청이며 걷고 있음에도 뒷모습이 무척이나 커다랗게 보였다.

자신과 그리 차이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의 눈높이가 무척이나 높아 보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보다 머리 두 개 만큼 더 큰 남화성을 보고 있을 때도 그가 크다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진소운을 보고 있으면 그 아득한 높이에 고개가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다니.

정말 이 사내는 대체…….

“어, 어어?!”

그때, 삼(三) 대 대원 일휘가 쓰러지려는 진소운을 보며 재빨리 몸을 날렸다.

툭.

끈이 잘려나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지려던 진소운을 일휘가 아슬하게 받아냈다.

그리고…….

“응?”

일휘의 주변엔 정도회와 백도회, 12봉성을 가리지 않고 기꺼이 진소운에게로 달려오던 이들로 가득했다.

“…….”

“…….”

그들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여기 있는 이들 중에 진소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거나 교류가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되려 그를 질시하고 견제하던 이들만 잔뜩했을 뿐.

“……그, 거시기. 괜찮나? 다친건 아니지?”

“응? 뭐 괜찮은 거 같은데? 일휘 스님, 괜찮습니까?”

“아…… 흐흠, 맥박이 조금 느리지만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친 것 같군요.”

그러나 이젠 진심 어린 걱정들을 쏟아낸다.

“그래요? 거참, 단주님이 쓰러져 버리면 우린 어쩐다…….”

“단주님 체력이 영 부족한가 보네…… 우리 사문의 영단이 있는데 먹여도 괜찮을까?”

그러더니 다들 저마다 품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한다.

철순직이 보기에도 생경한 모습이었다.

같은 모임의 소속, 더 나아가 같은 사문의 소속이라도 자신이 가진 영단이나 비상약은 쉬이 꺼내지 않는 것이 무인일진대.

“…….”

철순직은 일찌감치 무림의 생리를 파악했다.

중원을 지배하는 무림맹이란 거대한 권력기구가 사라지기 전엔 문파와 문파 간의 싸움은 끝이 없을 거라고.

아마 무림맹이 사라진 후에도 정도회와 백도회 12봉성은 서로를 견제하며 진짜 적보다 서로를 더 죽이고 싶어 할 거라고.

‘이 상황은 대체…….’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스스로 주머니를 뒤져 물건을 꺼내고 있었다.

진소운을 위해서뿐만이 아니었다.

정도회 인원들은 백도회 인원을 치료하고, 백도회 인원은 12봉성의 인원을 챙긴다.

각자의 문파와 지위를 초월하여 사람들은 진짜 한 소속인 양 행동하고 있었다.

철순직은 이 모든 상황을 이끌어 낸 장본인을 바라봤다.

‘진정 용(龍)인가…….’

삼류문파의 제자에게 용(龍)이란 글자가 붙는 경우는 없다.

용(龍)과 봉(鳳)은 아주 특별한 상징성을 가지니까.

한번 나타나면 세상을 바꾼다는 뜻을 지닌 이 글자를, 그 누가 쉽게 짊어질 수 있겠는가.

하여.

진소운의 별호를 그저 놀림거리와 비아냥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더구나 별호를 선물한 사람도 사황봉의 차석두.

‘우리가 바보였군…….’

어쩌면 흑도의 영웅이, 먼저 알아본 것인지도 몰랐다.

백도의 그림자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어야 했던 진정한 용(龍)을.

철순직은 오늘따라 자신이 매우 작은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

내가 기절했었다는 걸 깨달은 건 정신을 차렸을 때였다.

나는 오(五) 대 대원 금표에게 업혀 있었다.

근데 얘 등이 이렇게나 넓었나.

애들은 부쩍부쩍 크는구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냐?”

금표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답했다.

“얼마 안 지났습니다. 조금 더 쉬고 계세요.”

어쩐지 낮게 깔린 목소리.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냥 계세요.”

“내려야겠…….”

그때, 옆에서 누군가 어설픈 솜씨로 마혈을 찔렀다.

눈알만을 돌려 바라보니 은호였다.

“그냥 계셔도 됩니다. 대사형.”

얘는 내가 이 마혈을 못 풀 거라 생각하는 건가.

“……사활단은 계속 움직이고 있고, 마물을 제외하면 그 빌어먹을 놈들은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은호의 목소리도 심상치가 않다.

근데 얘들은 대체 왜 얼굴을 안 보여주는 거지?

진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누구냐? 누가 죽은 거냐?”

“……아무도 안 죽었습니다.”

“그럼 왜 얼굴을 안 보이는 거냐.”

그제야 은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사나운 얼굴과 달리 그렁그렁한 눈동자.

분노를 토해내려는 건지, 울음을 쏟아내려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녀석이 나를 응시했다.

“대사형이…… 죽을 뻔하지 않았습니까!”

녀석의 말에 나는 내뱉으려던 말을 쑥 삼켜버렸다.

“지금 일(一) 대주랑 이(二) 대주가 길을 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좀 더 쉬세요. 대사형!”

은호가 짚은 마혈을 억지로 풀어내고 금표의 등에서 내려가려 몸을 꿈틀거리자 다시금 마혈이 찔려 들어온다.

이번 건 좀 강하다.

“또 누가…….”

“가만히 있지 않으면…….”

서릿발보다 스산한 목소리가 귓가를 찌른다.

“다음번엔 밧줄로 꽁꽁 묶어 놓을 거예요.”

사련의 목소리에 냉기가 가득하다.

녀석들, 언제 이렇게 컸담.

은호보다 나은 혈도술을 선보였지만, 그럼에도 아직 태을진경에 관한 공부가 부족하다.

나는 얼마 걸리지 않아 마혈을 풀고 결국 금표의 등에서 내려섰다.

휘청.

“대사형……!”

바닥에 닿는 기분이 묘하다.

살짝 어지럼이 왔지만, 숨을 두어 번 쉬니 금세 괜찮아졌다.

“괜찮다.”

“몸도 성치 않으면서…….”

다시 걸음을 옮기려는데 사련이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데요.”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라…….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는 건 지겹다.

그 광경은 결국 내 머릿속에 남아버릴 테니까.

이윽고 고개를 돌려 사제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나쁜 기억은 그만 늘리고 싶다.”

아마 학관생 중에 나보다 많은 내공을 가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태을문과 친한 이들을 제외하면 행공을 익힌 이들도 없을 것이고.

찰나의 운기를 할 시간도 없는 이때에 내가 앞에 서는 건 누군가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양자평에게 물었다.

“양 대협,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됐습니까?”

“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양 대협.”

양자평은 제 머리를 짚더니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세 시진 정도 지났습니다.”

그 정도나 지났다고?

“적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없었습니다. 더구나 학관생들도 마물 사냥에 조금씩 숙달되어 가면서 희생도 줄고 있고요. ……그러니 조금 더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이상하다. 세 시진 동안 적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니.

아무리 마물이 마인들을 먼저 공격한다 해도, 그로 인해 우리를 놓치는 것보단 희생을 감수하고 습격을 하는 게 더 마인 놈들다운 거 아닌가.

애당초 희생이라 생각 자체를 안 하는 미친 새끼들이니까.

“양 대협, 마경을 횡단하지 않고 돌아서 서쪽 출구로 가면 거리가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글쎄요. 정확하게 재본 적이 없기도 하고…… 또 누구냐에 따라서도 다르겠고요.”

“일급 무사 정도라고 가정을 한다면 어떻습니까? 무리하지 않는 한도에서 달린다고 하면.”

“……하루 정도 차이가 날 것 같습니다.”

“포위당할 위험이 있군요.”

“…….”

우린 놈들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움직였다.

분명 놈들도 준비가 미비했을 터.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적들을 피해 사지로 달려가겠는가.

그렇게 놈들의 예상을 벗어나 행동했음에도 놈들을 떨쳐내는 데 수많은 희생이 따랐다.

그렇기에 방심할 수가 없다.

놈들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묵림에 배치했는지 예상이 되지 않으니까.

잠깐이라도 멈췄다간 언제 포위당할지 모르니까.

마경에서 포위를 당하면 묵림에서 당하는 것보다 더 처참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가장 최선은 놈들이 당도하기 전에 마경을 횡단해 묵림을 나가는 것.

“길은 누가 잡고 있습니까?”

“저희 사문에서 사람들이 번갈아 가면서 안내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

“몇이나 죽었습니까?”

양자평의 눈빛이 흔들리며 입을 꾸욱 다문다.

“쉬고 있을 상황이 아니군요.”

“이건 저희 사문의 결정이기도 합니다.”

“죽는 게 결정이라고요?”

잠시 침묵하던 양자평이 올곧은 눈으로 내 시선을 마주쳐 온다.

“단주님이 죽으면…… 아무도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까요.”

단주님이라니…… 이 사람은 애당초 명령권을 요구받지도 않은 사람인데.

“그리고, 앞에 서겠다 하셔도 아무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허락하지 않는다니.

의미를 알 수 없는 양자평의 말과 사제들의 걱정을 뒤로하고 전위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응? 벌써 일어났다고?”

“내가 이야기했지, 우리 곤륜파의 영단이 요상에는 최고라고.”

자식 입에 밥을 먹인 아비의 눈빛을 하는 이상한 놈들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여전히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들이 나를 두고 오간다.

그런데 대열이 이전과 달랐다.

분명 앞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인원들의 얼굴이 보였다.

“넌 팔(八) 대 대원 아닌가? 왜 여기 와 있는 거지?”

“이해해 주시오. 단주님의 명령이 절대적이긴 한데, 앞쪽에 사람이 워낙 비었어야지.”

일(一) 대와 이(二) 대의 희생자가 많았고, 인력 손실이 나면서 삼(三) 대와 사(四) 대의 인력들이 그 공백을 메웠단다.

그리고 그렇게 공백이 생긴 좌익과 우익의 자리를 뒤에 있던 이들이 채운 것이고.

내가 기절한 사이, 이 모든 일이 자의적으로 이뤄졌다.

스스로 희생을 감수하겠다는,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

“그런가. 잘했다.”

“쑥스럽게 칭찬은…….”

“계속 수고해라.”

말을 마치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가려 하니, 앞에선 이들이 다들 나를 돌아봤다.

“아니, 언제 일어난 거야.”

“깨어나면 마혈 짚으라고 했잖아! 누구야? 혈도법도 제대로 못 배운 놈이…….”

“혈도법 때문이겠나, 내공 때문이겠지. 교관을 내공으로 찍어 누른 인간을 무슨 수로 기절시켜.”

이 새끼들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차라리 내 독으로 기절을 시켜놓을까?”

이어진 칠(七) 대주 당기한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게 뭔 개소리들이야.

“단주님. 좀 더 쉬셔. 여기까지 오면서 너무 무리했으니까.”

“그래, 단주님 네가 용뼈도 아니고 상처라도 좀 치료해야 할 거 아냐.”

“지휘관의 덕목도 모르나? 대장은 원래 뒤로 빠져 있는 거야.”

소속을 가리지 않고 마치 일심동체라도 된 듯 말하는 놈들을 보며 내가 꿈이라도 꾸고 있나 싶었다.

뭐 이렇게 지들끼리 쿵짝이 잘 맞아.

근데 이 새끼들. 꼬박꼬박 단주님이라 부르긴 하는데…… 말이 짧네?

뭐, 지금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줄까.

전생에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단합이 되었으니 좋아해야 할지, 항명죄에 대한 화를 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행렬의 속도가 급격히 줄었다.

“뭐, 뭐야?”

“잠깐! 멈춰!”

앞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여태껏 한 번도 멈추지 않았던 걸음을 멈춘다니?

“비켜.”

나는 학관생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들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막아서는 이들은 없었다.

전위에 다다르자 일각과 남화성이 맨 앞에서 전면을 응시한 채 가만히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마교인가?’

이 상황에서 나오는 마인들이라면 멈춰 서는 게 아니라 밀고 가야 한다.

최대한 마물들이 많은 곳에서 놈들과 마주하는 게 최선인 상황.

“무슨 일이야.”

남화성의 어깨를 짚었지만 남화성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뻣뻣하게 멈춰 선 것은 일각도 마찬가지.

덜덜덜.

더구나 마인들 앞에서 단 한 번도 부동심이 깨지지 않았던 일각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지, 진 단주…….”

“뭐, 뭐야?”

“진 단주가 말한 ‘그’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뭐?”

일각이 입술을 달달 떨며 덧붙였다.

“그…… ‘견공’ 같은 상황 말입니다.”

뭐라는 거야? 이 대머리가 왜 안 쓰던 말을…….

“저거.”

일각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크르릉…….”

숲 한쪽에 집채만 한 크기의 털 뭉치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비린내 나는 눈동자에서 적개심을 발산하며.

“시발…….”

굳이 영맥을 느끼기 위해 감각을 끌어올릴 필요도 없었다.

아무리 마물이라 해도 이 정도의 크기는 선 넘은 거니까.

태양후를 잡은 이후로 절대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 존재.

“그 개새끼들이 코빼기도 안 보인 이유가 있었구나.”

묵림의 사대(四大) 신령(神靈) 중 하나로 보이는 존재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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