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08-비질란스
원래 동물들은 수상한 물건에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가도 호된 꼴을 당하면 교훈을 얻고 접근 불가라고 학습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양반은 그런 동물적 본능에 휘둘리지 않고 잘도 이렇게 또 채널이란 걸 연결했다. 간도 큰 모양이었다.
경완이 무심히 대꾸했다.
[뭐가?]
[당신의 안에 그..]
뭐라고 말을 하려던 목소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막상 말하려고 보니 언어도 어떻게 형용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원시인이 갑자기 우주복을 입은 우주비행사가 되어 저 공허한 먼 우주에서 저 아래에 보이는 창백한 한 점이 자신이 발 디디고 살고 있던 곳이라는 걸 깨달아도 그걸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하루살이가 백여 년을 넘게 살 수 있는 거북이에게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점은 삶의 치열함뿐이듯 목소리가 경완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점은 그가 인간이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모든 것은.. 이해가 불가능했다.
연민이 넘쳤고, 경멸이 넘쳤고, 기쁨이 넘쳤고, 분노가 넘쳤고, 슬픔이 넘쳤고, 사랑이 넘쳤고, 증오가 넘치고, 공허가 넘쳤다.
무한전생자의 무한한 기억의 편린은 그렇게 응축되어 텔레파시 능력자에게 투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이 투사되는 대상에겐 그저 광기라고밖에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목소리는 모순적이게도 경완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이해가 되었다. 여태 그가 저질러온 모든 일들과 그가 교도소에서 지내기로 선택한 것까지 말이다. 이런 정신을 가진 사람이 멀쩡히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순 없지 않겠는가?
[내 안에 뭐가 있는데?]
경완은 심술 맞게 시치미를 뚝 뗐다. 상대가 받은 충격의 크기를 가늠하긴 힘들었지만 갑자기 채널을 닫아야 할 만큼 크다는 것은 분명했다.
목소리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진실로 진지했다.
[당신은 도대체 뭡니까?]
[뭐였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오히려 반문을 받은 목소리가 말꼬리를 흐렸고 경완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댁이 결정해. 날 사람으로 대하면 사람으로서 댁을 대할 것이고, 날 괴물로 대하면 괴물로서 댁을 대할 거야. 간단하잖아?]
악의에는 악의로, 선의에는 선의로.
그것이 지금의 경완이 세상과 어울리는 최소한의 기본규칙이었다.
잠시 멈췄던 목소리가 대답했다.
[.. 사람으로 대할 겁니다.]
적어도 괴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러한 대답에 경완은 피식 웃으면서 대꾸했다.
[뭐 그거야 때 되면 알겠지.]
세상에는 자신이 내뱉은 말을 목숨처럼 지키려는 이도 있고, 선택적 치매라도 걸렸는지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아직 경완은 이 텔레파시 능력자가 어느 쪽에 속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럼 이제 자도 될까?]
[.. 네. 그럼.. 앞으로 잘 지내봅시다.]
[뭘 잘 지내봐? 확정된 건 없다니까.]
경완이 꼬투리를 잡자 목소리는 '그건 그래요'라는 말과 인사말을 남기며 텔레파시 채널을 닫아버렸다.
그런데 그는 경완이 끝까지 그의 이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는 걸 언제 깨닫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을까?
경완은 오늘의 일을 굳이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 = = = =
[정부와 국회는 나날이 늘어나는 초능력자와 그 범죄를 막기 위해 초능력 관리 특별법을 제정···]
[지지부진했던 여야 합의 드디어 성사! 초능력 수사대 발족!]
경완이 이관영의 제안을 거부하고 교도소로 돌아왔지만 그의 능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 높으신 분들이 이관영 대신 여러 인재들을 보내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한 건 해서 입지를 다지거나 줄을 잡고 올라가겠다는 야망으로 넘치고 있었다.
그런 이들 중엔 요런 놈도 있었다.
'너 우리 아빠가 누군지 알아?!'
'파파보이 자식 때문에 골치 썩고 있다는 건 충분히 알겠다. 이 찌질아.‘
‘뭐 이 새끼야?!’
‘너 같은 것도 자식이라고 널 낳고 미역국을 드셨을 네 애미를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낳고 보니 듬직한 아들이라고 애지중지 기르셨을 텐데 사실은 이렇게 애비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파파보이라니.. 네 어머니께서 돌아가실 때 눈 편히 감으실 수나 있겠냐?’
경완의 지독한 독설 몇 마디에 씩씩거리고 넘어가면 양호한 편이었다. 참지 못해서 온갖 욕설을 동원해 협박하다가 경완에게 모가지가 붙잡혀서 목 관절이나 허리 관절 등에 습관성 탈골 증상을 얻을래 말래라는 협박을 역으로 받는 경우도 있었다.
뭐, 그런 모지리 같은 놈도 있는가 하면 비단 출세욕만이 아니라 나름 법치주의에 대한 신념으로 경완을 찾아온 사람도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일단 그 언론사주 3세와 법조계 출신 정치인이 얽힌 윤간 사건부터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하는 거 아니냐는 경완의 물음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몇 마디 못하고 돌아갔다.
만인에게 공평하지 않은 법치주의 따위가 똥 닦는 휴지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아! 그만큼의 가치는 있었다. 누가 싼 똥이 사방에 냄새를 피우면 일단 치우기는 해야 하니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높으신 분이 아무 데나 똥을 싸면 대승적 차원의 정치적 행위 또는 정무적 판단, 불가피한 타협이나 희생, 하다못해 이해 못 할 예술적 행위로 포장되어 닦여나가지만, 서민들이 그랬다간 당장 경범죄로 잡혀간다.
결국 경완의 협조를 받아내기 힘들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대안으로 나온 것이 이미 있던 계획을 속도감 있게 밀어붙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초능력 범죄 수사부.
어차피 미국을 비롯하여 많은 선진국들이 초능력 범죄 수사를 위해 초능력자들로 이루어진 수사대를 꾸리는 추세였기에 한국도 언젠가는 갖춰야 하는 조직이기도 했다.
다만 여태까지 질질 끌고 있었던 것은 초능력자라는 자원에 얽힌 여러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초능력이 반도체, 바이오, 인공지능 등 비롯해 다음 세대에 어마어마한 먹거리가 될 산업이라는 것을 간파한 기업들에서는 나라에서 초능력 인재를 선점하기 전에 우선 쓸만한 초능력자들을 확보할 시간이 필요했고 정치인 중에는 기업의 후원이 절실한 이들이 많았다.
명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된다니까.
물론 반대로 나라가 나서야 초능력 인재들의 발굴과 육성이 빠르게 진행된다는 입장도 있긴 했지만 대기업 공화국이나 마찬가지인 대한민국에선 언론의 목줄을 쥔 기업의 입김이 더 강한 경우도 있었다.
각자 명분이 있긴 했지만, 뭐가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협의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했다. 전도유망한 산업이 얽힌 일이지 않은가?
뭐? 그러다가 시기를 놓치면 어떻게 되냐고?
아랫사람 밤낮으로 갈아 넣어서 속도를 높이는 건 한강의 기적 때부터 시작된 이 나라의 자랑스러운 전통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납기일 준수’라고 하던가?
그런데 합의를 시작하기도 전에 법조계 출신 정치인 및 언론사주 자제분이 얽힌 소위 상류층 거세 사건이 일어나버린 것이다.
높으신 분들의 눈엔 피해자들이 벌인 마약 섹스 파티 및 특수 강간은 보이지 않았고, 대신 위기감이 일어났다. 갑자기 초능력을 각성해서 건방져진 서민들의 목에 목줄을 채워야 한다는 것에 소위 높으신 분들의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통과된 것이 초능력 관리 특별법이다. 소위 초능력이 있으면 최대한 빨리 등록을 해야 하고, 초능력을 등록하지 않고 초능력을 사용하면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다.
물론 융통성은 발휘했다. 자신의 초능력과 발동 조건이 뭔지 전혀 모르다가 어쩌다 사용하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 처음 한 번은 봐준다는 식이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단서 조항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였다.
언제 어떻게 초능력을 처음으로 사용했는지 누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수사관이나 검사가 꼬투리 잡기 시작하면 법률적 지식이 없는 서민은 변호사에게 돈을 가져다 바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이 초능력 관리 특별법에는 재소자 신분의 초능력자도 끼어있었기에 당연히 홍 소장이 관리하는 교도소에도 초능력 재소자들을 등록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홍 소장은 펄쩍 뛰었다.
'아니! 그런 걸 왜 교정직 공무원한테 시켜?!'
펄쩍 뛸만했다. 왜냐면 교정직 공무원이 그렇게 뭔가를 조사하는 것에 전문가는 아니지 않은가? 아니 경찰, 검찰, 국정원, 기무사 같은 곳은 뭐하고 자기들에게 시킨단 말인가?
하지만 공무원이란 뭐냐? 조선 시대로 따지면 일종의 공노비라 할 수 있었다. 까라면 까는 것이 바로 공무원.
물론, 일과시간 중에 골프나 치러가는 놈들이 있지만 그럴 수 있는 건 그럴 만한 깜냥이 되는 소위 능력자들뿐이었으니, 혈연, 학연, 지연이 빵빵하고 공무원 사회에서도 튼튼한 줄을 잡은 이들이 바로 능력자였다.
개인의 업무능력은 어떠냐고?
업무 능력이 좋다고 반드시 출세하는 건 아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공부가 줄어드는 일이 없듯이 일도 일을 잘한다고 줄어드는 경우는 없었다. 아니 일을 잘하면 오히려 일이 는다. 일을 잘한다고 일을 계속 가져다주는 것이다.
업무 능력이 좋다고 출세하는 원리는 이런 것이다.
사장 : 자네 일 잘하는군. 내가 지켜보지.
사원 : 사장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윗사람이 흡족하도록 일을 해서 눈에 들어야 비로소 출셋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전에는 일 잘하는 노예 A일 뿐.
하지만 이렇게 업무능력으로 윗사람의 눈에 드는 과정을 뛰어넘는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학연, 지연, 혈연 등 소위 인맥을 사용하시는 부류되시겠다. 업무능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이미 눈에 드니 이자들이 능력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솔직히 조빠지게 일하는 것보단 라인 타는 게 출셋길 열기엔 훨씬 빠르고 쉬운 방법임은 확실했다. 어차피 출세의 본질이란 소위 윗사람이 끌어주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런 거 필요 없이 성공할 수 있다고 개고생해서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는 능력자가 없는 아니지만 그렇게 기어 올라가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잘 올라왔다고 반길까?
아니다. 반기기는커녕 텃세만 부릴 뿐이었다.
왜?
감히 자기들 허락도 없이 자기들이랑 같은 위치에 섰으니까.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내 밥그릇 나눠줄 사람을 고르는 것도 고심해야 하는 일인데 자기 능력 있다고 내 밥그릇 강제로 반쪽 내려고 올라온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열심히 올라온 사람을 반기는 건 정상에 있던 등산객뿐이다.
홍 소장이 괜히 법무부 장관의 전화를 이등병의 자세로 받는 것이 아니었다. 나 능력 있다고 나대다가 한직만 전전하다 은퇴하던 선배들을 수두룩하게 목격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소장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그였다.
그런 그였기에 상부의 지시에 펄쩍 뛰고 궁시렁대면서도 어떻게든 해낼 방법을 모색했다.
다행이랄까 불행이랄까? 그가 관리하는 교도소엔 치트키가 있었다.
“또 저예요?”
“딱히 너보고 뭐 하라고 안 해. 그냥 앉아만 있으라니까.”
딱히 초능력이랄 것이 없는 경완이 괴력 능력자를 제압했다는 걸 모르는 초능력 재소자들은 없었다. 교도관들이 자신들의 직장이 졸지에 초능력 재소자 전용 교도소가 되어버리자 여기저기서 이감되어 오는 각성한 재소자들이 말썽부리지 않기를 바라며 경완의 존재를 언질해주며 미리 경고했기 때문이다.
표현이야 이렇게 잘 협조하면 여러 편의를 봐준다는 것이지만 내용은 너희가 좆같이 굴면 우린 이런 미친개를 풀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은근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