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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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쿠데타 사령관이자 권력을 위해 수많은 이들을 죽인 독재자가 그의 팔순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습격을 받았다.
누군가에겐 그것은 법치를 어지르는 사적 제재 행위였으며, 또 누군가에겐 국가를 적화통일에서 구해낸 영웅에 대한 빨갱이의 테러였으며, 누군가에겐 사필귀정의 정의였으며, 다시 누군가에겐 억지로 잊었던 해묵은 고통과 원한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계기이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이 일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예민한 부분을 찌른 사건이기에 거대한 이슈 블랙홀이 되어버렸다. 세간에 충격을 준 샌드맨이나 사망기자 사건은 순식간에 밀려날 정도로 말이다.
당국의 입장은 단호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사적제재는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물론 그러한 입장에 대한 비난이 있었으나 그러한 비난은 법률적인 논리를 구성하지도 못했고 또한 감정적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솔직히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었다.
노인이 독재자로 지낼 때 적지 않은 기업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 2천억이 넘는 추징금을 선고받았음에도 돈이 없다는 개소리와 함께 아방궁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는 걸 누가 납득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어떻게 그 자식들은 물론 그 손주까지 막대한 재산을 가진 자산가일 수 있는가?
그들이 대단한 기업인이었던가? 아니면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투자의 귀재였던가?
그들의 부친이자 조부가 독재자였던 시절에 빼앗거나 기업들로부터 상납받은 막대한 재산이 그들이 누리는 부귀영화의 원천임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다른 걸 다 제쳐놓고도, 전직 쿠데타 사령관의 뇌물죄에 대한 추징금조차 제대로 추징하지 못한 국가의 무능함은 이번 습격 사건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법이 법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정의(正義)라는 가치를 지키지 못할 때 개인이 나서는 것이 과연 그렇게 잘못된 일일까?
사실 그러한 일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정의봉의 집행자가 오죽하면 다 늙은 노인네를 때려죽였을까?
“하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야!”
화려하고 넓은 정원을 갖춘, 화려한 저택의, 화려하게 치장된 거실에서 두 노인네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그럼 아드님들을 죽인 그 살인자의 말을 따르겠다는 겁니까?!”
“그러면! 어떻게 내 손주들을 지키겠다는 건데!”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그가 고성을 지른 이는 과거 자신이 이 나라를 지배할 때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안기부장 허동세였다.
노인은 아직도 손이 덜덜 떨려왔다. 철통같은 경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검은 안개로 홀을 완전히 제압한, 현재 세간에서 흑노야라고 불리는 자의 능력은 아직도 두려웠다.
허동세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세상에 초능력자가 그 늙은이 하나뿐이랍니까?”
“그럼..”
“세계적으로 각성한 청부업자들이 많습니다. 그들 중엔 그 흑노야라는 늙은이도 죽일 수 있다고 장담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자도 있죠.”
“불렀나?”
“이미 불렀습니다.”
“그럼 어서 내 자식새끼들 죽인 그 개자식을 잡아 와!”
노인이 소리를 질러대자 그제야 허동세는 얼른 그러겠다며 허리를 숙이며 나왔다.
저택을 나온 그는 성곽처럼 높은 담벼락과 커다란 대문을 돌아보며 혀를 찼다.
“쯧쯧쯧. 천하를 호령하던 장군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壯士) 없군.”
늙어서 몸이 약해지니 정신도 약해지던가? 쿠데타를 주도하고 끝내 이 나라를 지배했던 카리스마를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허동세가 나서서 그를 돕는 이유는?
전 독재자가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흑노야로부터 손주들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고 말이다.
하지만 허동세의 입장에선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 역시 독재자를 도와 지금의 부귀를 쌓은 인물 중 하나였다. 그 덕분에 자식들이 지금의 경제적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독재자, 전직 쿠데타 사령관의 사과라고? 허동세는 자식들과 혈육의 부귀를 빼앗길 수 있는 명분을 결코 세상에 던져줄 순 없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게 허동세 혼자만은 아니었다.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도운 이가 허동세 혼자만이 아닌 것처럼, 그 시절 한자리 꿰차고 있던 이들 대다수는 여전히 현재에도 부귀를 누리고 잘 먹고 잘살고 있었다.
차라리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래도 내 자식과 후손들의 부귀영화를 뺐을 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조용히 살던 이들이 노구를 이끌고 나선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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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한국 지부에선 비상이 걸렸다. 그도 그럴 것이 CIA에서 위험인물로 분류된 청부업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입국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북한에서 한국에 대한 주요 요인 암살과 테러를 사주라도 했단 말인가?
정보라인을 가동해본 결과 다행히 그건 아니었고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한국에 입국한 청부업자들의 목표가 바로 세간에 유명한 흑노야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흑노야는 최초의 염동력자로 알려졌다. 검은색 안개를 이용해 손도 대지 않고 물리력을 발휘하는 흑노야는 이미 여러 국가에게 요주의 대상이었다.
아쉬운 것은 본인이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할 정도로 늙었다는 것, 그리고 그 남은 시간 동안 하고자 하는 일이 명확하다는 점이었다.
그 노인에게 남은 시간과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의 성격상 그를 활용할 방법이 딱히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염동력은 분명 강력하고 활용도가 높은 능력이었으니까.
CIA에서는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조용히 주시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정보는 FBI를 거쳐 김준에게까지 전달되었다.
CIA가 FBI에 정보는 넘겨준 이유는 한국이라는 지형에서 수사기관 사이에 공조하기로 합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 경완이라는 수사자원을 두고 국가기관 사이에 알력다툼을 하지 않기 위한 사전 합의의 발로였다.
“그래서 지금 다 죽어가는 노친네를 두고 젊은것들이 다구리를 치려고 한국에 들어왔다 이겁니까?”
“.. 흑노야를 두고 다 죽어가는 노친네라고 하기엔...”
김준은 말꼬리를 흐리며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후회했다.
굳이 경완에게 미리 말한 이유는 이번에 청부업자들이 흑노야를 공격하는 와중에 분명 격퇴되고 무력화되는 이가 있을 테니 기회를 잡아 그중의 몇 명을 체포한 후에 경완을 통해 정보를 빼내려는 계획을 짜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다크넷의 청부시장에 대한 정보를 얻을 귀중한 기회였으니까.
이를 위해선 경완의 도움과 협조가 필요했다. 한국의 수사기관이 끼어들어 귀찮게 하기 전에 정보를 캐내야 했으니까.
그래서 미리 경완에게 이야기한 것뿐인데 경완이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거 억울하게 죽은 자식새끼의 복수 좀 하고자 하는 노인네에게 너무 한 거 아니오?”
“어.. 그래도,”
‘우리가 청부한 게 아닌데요’라는 반박이 채 나오기 전에 경완의 말이 이어졌다.
“아아. 명색이 공권력을 휘두르는 조직에 속한 김준 씨의 입장이야 알아요. 하지만 제가 보기엔 참 국가기관이라는 곳이 계획한 일치고는 참 치졸하지 않아요?”
죽을 날 받아놓은 노인네를 이용한 어부지리라니 말이다.
“그게,”
“아아. 이해해요, 이해해. 어차피 다른 나라 일이잖아요. 미국인인 김준 씨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 국익부터 챙기는 게 우선이죠.”
경완이 또 말을 잘라먹자 김준은 기분이 나빠졌다. 자신이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상부의 결정인데 경완이 기분 나빠하며 꼬장을 부리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경완 씨는 저희의 방침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물론이죠. ㅈ같은 새끼들이 모여 있다면서요? 그럼 다 잡아들이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그럼 흑노야라는 노인도 잡아들여야 하는데요.”
“공권력의 입장에선 그러는 게 당연하죠. 하지만 제 입장에서는 ㅈ같거든요.”
김준은 저번에 경완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경완의 판단기준은 완전히 주관적이었다.
이기적이라고 보기엔 힘들었지만 공공질서를 수호하는 입장에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무리 ㅈ같은 놈이라지만 감정적으로 대처하면 선의의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김준은 더는 흑노야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며 화제를 전환했다.
“요새 교도소 생활은 어때요?”
“뭐, 얌전히 돌아가고 있죠. 의외로 당근이 잘 먹히는 모양이에요.”
“그래요?”
“뭐, 삼오삼오가 잘해주고 있기도 하죠.”
경완의 감언이설에 홀라당 넘어간 괴력 능력자 남동건. 그가 경완을 대신해서 초능력 재소자들의 군기를 제대로 잡고 있었다.
경완의 조언을 받아 쿨타임식인 자신의 능력을 시기적절하게 순간적으로 발현하는 요령을 익힌 그는 정부의 초능력 연구와 초능력 재소자들 사이에 일어나는 사고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이미 모범수 후보에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경완은 홍 소장의 아쉬운 말에 귀찮아하지 않고 미국의 의뢰를 수행할 수 있었다.
초능력 연구라는 이름의 레이스에 올라탄 국가들의 행정은 빠르게 돌아갔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고 초능력 관리 특별법에 힘입어 초능력 범죄 수사대를 신속하게 꾸렸다. 그뿐만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도 초능력자들의 권익을 도모하자는 대한 초능력자 협회가 꾸려졌다.
당연하게도 모두 미국을 벤치마킹한 것인데 과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답게 실무자들을 갈아 넣어서 그에 관한 운영을 빠르게 궤도에 올려놨다.
김준이 시간을 확인했다.
“그럼 오늘 접견은 여기까지 하죠.”
“이렇게 저 만나러 오는 거 귀찮지 않아요?”
경완의 농담에 김준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요주의 인물이잖습니까?”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고 김준은 돌아갔다.
FBI 측에선 이렇게 주기적으로 경완과 만나 대화를 나누며 인간적인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경완의 행동에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이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우정같이 인간적이고 감정적인 관계가 장기적으로 적절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원래 이경완이라는 존재가 돈이나 명예 같은 유인책의 효과가 극히 미약하기도 했고 말이다.
접견이 끝난 후 경완은 다시 독방으로 돌아갔다. 요가 비스무리한 스트레칭과 체력 유지를 위한 맨손 운동을 좀 하고 씻은 후에 대출해 놓은 책을 좀 읽다가, 명상도 좀 하다가, 그렇게 이부자리에 드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한국에서 비질란스가 언급되는 바람에 미국으로 가는 일은 당분간 올스톱이었다.
물론 그거 하나만이 올스톱의 이유가 될 순 없었다. 기존 수사기관들이 주시하던 테러단체도, 마약조직도, 그 밖의 다양한 범죄조직들도 초능력의 등장으로 인한 혼란에 빠져있었고 이는 수사의 불확실성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이런 혼란기엔 어떤 계획도 무용인 상황이라 소강상태나 질서가 잡히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거기서 다시 경완의 능력이 필요하게 될 때까지 또 시간이 걸릴 테니 당장은 관망하는 것이 낫다는 게 미국 수사기관의 판단이었다.
경완은 이러한 흐름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미국이 그를 부르지 않는 이유도 대충 그럴 거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완이 수사에서 지분을 차지하면 할수록, 그리고 그 편의성에 익숙해질수록 경완의 발언력 역시 강해질 테니, 미국의 입장에선 정말 중요한 부분이 아니면 경완을 남용하고 싶지 않아 했다.
편의를 제공하는 노예가 어느 순간 주인의 자리를 꿰찬다는 노예의 역설.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스마트폰에 중독된 인간들만 봐도 그 역설은 사실이었다.
그러니 경완에게 끌려가지 않으려면 그의 능력에 의존하기만 해선 안 된다는 걸 그 똑똑한 엘리트들이 모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