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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84화 (84/367)

083-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불이 꺼지고 잘 시간이 되었다. 경완은 독방에 누워 잠이 들었다.

좁은 방이지만 답답하기보다는 아늑하게 느껴졌다. 어디든 등 붙이고 따뜻하면 집이 아니겠는가? 어차피 종국(終局)에 인간이 필요한 땅은 관짝 정도의 넓이뿐이었다.

그가 잠이 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저 멀리서 폭음이 울렸다.

퍼엉!

그 폭음이 점점 커졌다. 폭음을 일으키는 원인이 마치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귀찮은 예감에 경완은 눈을 감은 채로 입술을 열었다.

“씨부럴.”

이 새끼들은 잠이 없나? 잠이 없더라도 남 잘 때 민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상식이 없나?

경완은 눈을 감은 채 저 폭음이 그저 지나가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머피의 법칙처럼 좆같은 건 항상 로또보단 확률이 높은 법이다.

쿠와앙!

웨에엥!

교도관들도 심상치 않은 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비상종을 울리며 비상태세에 들어갔다.

간간히 총성도 들렸지만 도저히 저 폭음의 원천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폭음은 결국 지척에서 울렸고 폭발의 충격은 경완이 있던 벽을 무너뜨리고 주먹만 한 콘크리트 덩어리가 두껍게 접은 이불에 박혔다가 떨어졌다.

혹시나 해서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이불을 두껍게 접어 몸을 가리고 있던 덕분에 터진 벽에서 날아온 콘크리트 덩어리로부터 몸을 보호할 수 있었다.

경완이 이불을 치우고 일어나 부서진 벽 틈으로 나가며 소리를 질렀다.

“야이! Sheep새끼들아! 잠 좀 자자!”

그리고 어느 새끼인지 얼굴이나 좀 보자.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얼굴도 보기 힘들었다.

교도소의 서치라이트가 비추는 곳에 뭉쳐진 커다란 검은 연기. 그리고 흐릿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그 커다란 연기를 뚫어내고 있었다.

흑노야와 초능력자들.

이유는 모르겠지만 초능력자들이 흑노야를 노리고 있었다. 경원은 어렵지 않게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할 수 있었다. 뭐 흑노야에게 자식이 죽은 그 늙탱이가 청부한 거겠지.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왜 조선팔도 다른 곳을 다 놔두고 굳이 여기서 이러고 있냐는 말이었다.

흑노야가 왜 여기에?

이렇게 속으로 질문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방(攻防)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흑노야가 청부업자들을 쫓아온 것이 아니라 청부업자들이 흑노야를 쫓아온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문을 품은 순간 모두가 경완의 존재를 인지했다. 잔상을 남기며 스쳐 지나가는 청부업자 한 명이 경완의 귓가에 말 한마디를 흘렸다.

“Go away(꺼져).”

경완은 대답했다.

“퍽 유.”

지가 뭔데 꺼지라 말라 하는가? 엄연히 이 땅의 주민(?)은 경완이었고 저들은 불청객에 불과했다.

경완의 욕설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모두 검은 연기를 뚫어내는 데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여러 잔상이 검은 연기 속으로 파고들었다가 동시에 튕겨 나갔다. 그리고 안개가 경완에게 다가왔다.

불길하기는 하지만 딱히 적의가 느껴지지 않기에 경완은 검은 연기를 피하진 않았다. 대신 언제든 반응할 수 있도록 제6감을 일으킨 채 안개가 자신을 감싸는 것을 용인했다.

짙어지는 안개 속에서 하나의 인형(人形)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 코, 입에서 피를 흘리는 늙은 노인이었다.

경완은 그 노인이 바로 흑노야라고 불리는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요즘 인터넷에서 핫한 사람이었으니까.

흑노야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폐를 끼치게 되어 미안하구먼.”

“저를 찾아오신 거예요?”

“젊은이 이름이 이경완이라면..”

역시나..

경완은 왠지 그런 것 같았다. 괜히 자신의 주변에 이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누가 알려줬어요?”

“목소리가..”

흑노야의 말에 경완은 비질란스의 텔레파시 능력자를 떠올렸다.

“뭐라고 하던가요?”

“내 남은 소망을 이뤄줄 마지막 가능성이라더군.”

“무슨 소망인데요?”

“내가 시작한, 아니 다시 끄집어낸 일을 마무리해줄 사람. 쿨럭!”

흑노야가 입을 가리고 크게 기침을 했다. 부상이 심각한지 입에서 핏방울이 튀었다.

경완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별로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거 노인장에겐 직접적인 원수의 혈육이라지만 저한텐 그냥 남이잖아요.”

흑노야와 전직 쿠데타 사령관 사이의 일은 크게 보면 국가적이며 역사적인 사건이지만 좁게 보면 집안과 집안 사이에 얽힌 원한이었다.

가뜩이나 대한민국에 소속감이 없는 경완의 입장에선 남 일이나 마찬가지인데 과거의 일에 직접적인 잘못이 없는 전직 독재자 후손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건 딱히 그에게 그래야 할 필요성이나 동기를 불러일으키지 못할 정도로 귀찮은 일이었다.

경완의 대답에 노인네는 적잖이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려? 그럼 내 남은 미련도 여기까지겠구먼.”

“그럼 그냥 이대로 저놈들 손에 죽을 건가요?”

“흐흐흐. 남은 목숨이니 발버둥은 쳐봐야지.”

경완은 입맛을 다셨다. 서로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것이라면 딱 눈감고 외면했겠지만, 돈 받고 사람 잡는 사냥꾼들이 한 사람을 물어뜯는 형상이었다.

눈앞의 노인이 사람을 죽인 살인자라고? 살인이 악이라고 하지만 경완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한 사람을 죽여 천 명, 만 명을 살린다면 그것이 과연 악일까? 과거에 단호한 왕들은 부패한 탐관오리의 거죽을 벗겨 의자나 인형으로 만들어 수많은 관인들에게 경고했다. 전장에서 적을 수천수만 명을 베어 넘기는 장수는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경완 본인부터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현재의 인권이나 상식, 법률이 용납하지 못 하는 일이 오히려 세상의 발전과 이익을 위해 긍정적인 결과를 보이는 경우는 분명히 존재했다. 반대로 인권, 상식, 법률, 도덕이 용인하는 일이 부정적인 결과를 보이는 경우 역시 무수히 많았다.

독재를 추종하는 자유, 선동과 날조를 비호하는 자유, 자유를 공격하는 자유.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시스템에서 오히려 자유를 공격하는 일은 구조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자유를 확대하는 일은 곧 타인의 자유를 축소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적 합의를 중요하게 여겼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막으려면 말이다.

그런데 누가 쿠데타 세력에게 정권을 장악할 자유를 주었는가? 빨갱이가? 아니면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이들이?

자유민주주의자에게 쿠데타 세력에 대한 용인은 곧 체제에 대한 반역이자 타락이었다.

그러한 타락에 저항하기 위해 희생하는 자들은 종교를 위해 목숨을 거는 순교자들이나 다름없었다.

‘당신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당신의 생명과 목숨을 다 바칠 수 있습니까?’

경완의 입장에선 노인의 상황은 저러했다.

고작 복수에 불과하지 않냐고? 경완이 노인의 입장이었고 오직 복수만을 꿈꿨다면 전직 쿠데타 사령관 손주들의 기일은 바로 그 잔칫날이 되었을 것이다.

살인은 살인일 뿐이라고? 연좌제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합의에서 흑노야의 행동은 분명 그러한 사회적 합의에 대한 위반이라고?

그게 뭐 어쨌다고?

인간의 목숨은 고귀하지만 반드시 죽어야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인간이 있다는 걸 경완은 경험해 보아서 잘 안다.

죽어도 좋은 인간은 없다는 말은 입에 발린 거짓말이다. 인간의 편협한 도덕률, 얼기설기 구멍 난 법치는 결코 옳은 것을 옳게 만들지 못하고 틀린 것을 제대로 교정하지도 못한다.

어린아이들을 여럿 강간하고, 출소한 후에도 또 그런 짓을 반복하는 자들.

사회와 소위 인권이라는 것이 하사한 회개의 기회를 또 다른 범죄의 기회로 여기는 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래서 경완은 눈앞의 늙은, 하지만 가여울 정도로 생애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노인에게 작은 도움을 내밀기로 했다.

“유지(遺志)를 남기시겠어요?”

“유지라?”

“지금 노인장이 가진 그 힘을 뜻을 이어받을 사람에게 승계할 수도 있어요.”

경완이 명상을 통해 그 가능성을 엿본 S입자의 능력 중 하나였다.

초능력자란 결국 S입자의 농도와 활성도가 결정한다. 경완의 감각에 놓인 흑노야의 S입자 농도는 매우 진해서 충분히 그것을 응축해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노인이 기침과 함께 피를 토했다.

“쿨럭! 그런데 누구에게 승계하지?”

“아직 텔레파시 능력자랑 연결되어 있죠?”

아니라면 청부업자와 치열하게 싸우는 중에 여기까지 정확하게 찾아올 순 없었을 테니까.

경완의 예상대로 노인네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완이 입을 열었다.

“듣고 있어? 나한테도 채널 열어.”

[오랜만입니다.]

“나를 이용하려고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만 오해일 수 있으니까 넘어가지.”

[오해 맞습니다. 어르신의 사정이 너무 딱해서 도와줄 사람을 찾다 보니 당신밖에 떠오르지 않더군요. 온 나라가 적이 되어도 코웃음을 칠 유일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경완은 목소리의 판단력에 고개를 끄덕였다. 흑노야는 현재 법치주의를 일그러뜨린 죄인이었다. 설사 흑노야의 생각에 공감하더라도 그를 도와주겠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사회적 자살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게다가 그저 단순 공권력이라면 모르지만 힘 있는 자들이 흑노야를 없애버리겠다고 이렇게 초능력 청부업자까지 고용하지 않았는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어쩌면 경완만이 유일한 해법이라 판단하는 것은 그를 아는 이에겐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잡설은 그만하고 채널 활짝 열어.”

[저기..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널 레이다로 삼아서 이 노인장의 마지막 미련을 이뤄줄 사람에게 이 노인네의 힘을 전달할 거야.”

[.. 그게 가능한가요?]

“해봐야지.”

[.. 일단 따르죠.]

“노인장 손 줘봐요.”

경완의 말에 흑노야라 불리는 노인은 가늘게 떨리는 팔을 들었다. 죽을 때가 다되었다는 본인의 말이 맞는지 앙상하고 힘없는 팔목이 경완의 손아귀에 쥐어졌다.

“힘들 테니까 다들 각오하시고...”

경완이 자신의 감각을 열어젖혔다. 짙다 못해 마치 액체처럼 농밀한 S입자가 스멀스멀 퍼져 노인을 감쌌다.

노인의 S입자에 스며든 경완의 S입자는 이내 주인의 인도를 받아 텔레파시 능력자의 채널에 촉수를 들이밀었다.

[으윽!]

[지금 채널 단단히 유지하고 견뎌. 일 망치고 싶지 않으면.]

경완의 말에 목소리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채널을 통해 들어간 경완의 S입자가 텔레파시 능력을 매개로 대한한국 전역에 뿌려졌다. 과거 채널을 확장했던 감각이 도움이 되었다.

대한민국 전역에 뿌려진 S입자들은 경완의 염을 투사 받아 서로 그물처럼 얽혔다. 입자가 얽힌다는 것이 좀 이해가 안 된다면, 양자얽힘 정도라고 이해하면 된다.

아무튼, 그렇게 완성된 거대한 그물, 천라지망.

성기지만 덮지 않은 곳이 없는 넓은 S입자의 그물은 조건에 부합하는 자를 찾는 탐지기이자 하나의 매개물이었다. 남은 건 그 조건을 설정하고 노인네의 힘을 일종의 씨앗으로 응축해 대한민국을 덮은 이 망에 결합하는 것뿐.

“노인장. 정말 원하는 게 그자의 사과와 반성이에요?”

“쿨럭! 그 외에 내가 더 무엇을 얻어낼 수 있겠나?”

설령 반인반신의 독재자라도 죽은 자식을 되살려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 간절히 그걸 바라세요. 그럼 제가 그 유지를 노인장의 초능력에 새겨둘 겁니다. 그렇게 되면 노인장의 초능력은 그 유지를 이뤄줄 사람에게 승계될 거예요.”

경완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주위를 감싼 검은 연기가 요동쳤다. 경완의 S입자를 매개로 노인의 몸을 감싸고 있던 S입자들이 한 점으로 응축했다. 검은 연기도 S입자를 따라 공중의 한 점으로 응축하다가 그대로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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