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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85화 (85/367)

084-09-다크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

사실 사라진 것이 아니라 경완이 텔레파시 능력자의 ’채널‘을 매개로 만든 천라지망에 결합한 것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천라지망은 일종의 트리거로 작용해서 조건에 부합하는 이를 찾아 노인의 초능력을 전달해 줄 것이다. ‘씨앗’에 담긴 노인의 원념(怨念)과 가장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 말이다.

검은 연기가 사라짐과 동시에 노인도 몸도 무너져 내렸다. 오늘내일하는 노구(老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서 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염동계열로 분류된 그의 초능력 덕분이었다.

“된 거여?”

“네.”

경완은 노인을 바로 눕혀 주었다. 눈빛이 흐려지는 것이 삼도천을 건너기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따로 하고 싶은 말씀은 없어요?”

경완의 호의에 노인은 흐릿하게 슬픈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여보.. 한수야..”

회한 어린 눈빛이 흐려지면서 눈가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한수라는 이름은 잃어버린 자식의 이름이겠지.

경완은 반쯤 감긴 노인의 눈을 감겨주었다. 눈을 다 감을 수 없을 정도로 한이 남았던 모양이다.

“나무아미타불. 아멘.”

경완은 두 손을 모아 한 많았던 노인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노인장이 무슨 종교인지는 모르지만 부처나 예수가 거둬가지 않겠는가? 설마 노인장이 무슬림이나 힌두교도겠는가?

그렇다고 자식을 잃어 대가 끊어진 사람을 유교식으로 명복을 빌어줄 수도 없고 말이다.

푸욱!

명복을 빌어주고 일어나던 경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청부업자 한 명이 노인의 가슴에 단검을 박아 넣었기 때문이다.

확인사살이었다. 청부업자라는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경완은 청부업자가 아니라는 점이었고 확인사살을 당한 시신은 방금 그가 명복을 빌어주었던 이라는 점이었다.

청부업자가 단검을 뽑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마치 경완은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경완의 손이 덥석 놈의 정수리를 붙잡았다. 놈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나이프로 경완의 손목을 베었지만 경완의 다른 손이 놈의 손목을 잡았다.

타다닥!

손과 손이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순간 경완이 고개를 젖혔다. 그 위로 예리한 칼날이 지나갔다.

하지만 승기(勝機)는 경완에게 넘어가 버렸다. 우악스러운 아귀힘과 당기는 힘에 균형을 잃은 청부업자는 괴력을 발현 시켜 경완의 손아귀를 뿌리치려고 했지만, 오히려 그 힘이 자신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어깨를 비트는 원동력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으리라.

경완의 발끝에 정강이가 차이고 하체가 비틀려 몸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경완의 손놀림은 그 비틀림을 상체로 연계시켰다. 공연히 괴력을 사용한 여력을 회수하지 못한 청부업자는 자신의 몸이 회전하는 것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위기감을 느낀 그가 휘둘렀던 나이프를 당겨 경완의 손목을 노렸다. 하지만 경완의 손이 시기적절하게 나이프를 쥔 손목을 쳤고 기어코 상체가 비틀렸다.

“끄아악!”

경완이 놈의 오금을 밟으며 붙잡을 팔을 비틀었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놈이 비명을 질렀고 경완은 한쪽 무릎을 꿇은 놈의 배후를 완벽히 점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연이어 놈의 정수리를 쥐고 허리를 콱하고 밟아버렸다.

“끄아아아아악!”

발바닥으로 놈의 허리뼈가, 적어도 디스크가 꺾이는 것을 느끼며 경완은 손을 털었다.

“이 씹새끼들이 마지막에 기분 잡치게 하네.”

그는 야밤에 소리를 지르며 민폐를 끼치는 청부업자의 턱을 걷어차고는 혼절한 놈의 나이프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남은 세 명의 청부업자들을 향해 칼을 까딱거렸다.

드루와. 드루와.

하지만 청부업자들은 경완의 기대와는 달리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자존심보다는 돈으로 움직이는 그들이었기에 경완에게 덤벼드는 것은 채산성이 맞지 않다고 여진 모양이었다.

받은 돈만큼만 한다.

훌륭한 프로정신이었지만 경완은 짜증이 났다.

“야이! 씹새들아! 동료도 버리고 가냐?!”

그렇게 소리를 쳐봤지만 동료가 아닌 모양이었다. 복면을 쓴 청부업자들은 허리가 꺾여 바들거리는 청부업자를 버리고 몰려오는 경찰들을 피해서 종적을 감춰버렸다.

경완은 다음에 만나면 조져버리겠다고 생각하며 칼을 버렸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교도관을 보며 말했다.

“멀쩡한 방으로 옮겨주세요.”

= = = = =

흑노야는 사망했다. 아무리 염동력 능력자라지만 살인기술의 전문가이자 초능력을 각성한 다수의 청부업자를 상대하기엔 확실히 역부족이었다. 복수는 꿈도 꾸지 못할 장삼이사로 살아온 흑노야가 전투기술 같은 걸 익혔을 리가 있겠는가?

아무튼, 그의 사망으로 사건은 마무리될 기미를 보였지만, 경완은 심문실에 불려가 수사관들을 마주해야 했다.

“이경완 씨. 마지막에 흑노야와 무슨 말을 나누었습니까?”

“그냥 유지와 유언을 들어주고 명복을 빌어줬죠.”

“유지? 유언은 또 뭡니까?”

“유지(遺志)는 죽은 사람이 살아서 이루지 못하고 남긴 뜻이고 유언은 죽기 전에 남기는 말이죠.”

누가 사전적 의미를 물어봤나?

수사관이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유지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일을 마무리해달라는 것이었고, 유언으론 자신의 아내와 자식의 이름을 부르더군요.”

“...”

잠시 침묵이 돌았다. 경완의 앞에 앉아있던 수사관은 옆에 있던 동료 수사관과 시선을 교환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서 경완 씨가 그 유지를 이을 겁니까?”

“아니요. 제가 왜요? 이미 들어줄 사람에게 전해졌을텐데요.”

“.. 네?”

‘아니요. 제가 왜요?’까지 무척이나 안심했던 수사관은 이어진 경완의 말에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껌벅였다.

“누, 누구에게 전했습니까?!”

“그건 저도 몰라요. 운 좋은 사람이 주워가겠죠.”

“저기, 이경완 씨 저희가 잘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경완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비유법을 동원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그 노인장의 초능력은 일종의 씨앗이 되어서 이 대한민국 어딘가에 뿌려졌어요. 그 씨앗은 노인장의 유지를 이어받을 사람을 찾아가 싹을 틔우겠죠.”

물론 자신이 그 일의 핵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은 쏙 빼놨다. 왜냐고? 당연히 자길 보고 지랄지랄 할 테니까.

경완의 설명에 수사관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흐, 흑노야 같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는 겁니까?”

그 말에 경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 거예요. 설마 그 노인장처럼 다짜고짜 죽이고 보겠어요?”

“다짜고짜 죽이고 보면요?”

“에이. 그 노인장의 유지를 이어받을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없는 사람이겠어요?”

“흐, 흑노야의 유지가 뭐라 그랬죠?”

“당연히 군인들을 시켜서 자기 자식 시체도 찾지 못하게 한 사람의 사죄와 반성이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 나라에 한둘이 아닐걸요? 라며 싱긋 웃는 경완의 표정은 수사관에겐 마치 악마같이 느껴졌다.

수사관들이 굳은 눈빛을 교환했다. 경완의 말이 새어 나갈 시에 대한민국 사회에 일어날 거대한 혼란을 그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만큼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잔뜩 싸질러놓고 사람들이 보지 않기를 바라며 한곳에 모아 덮어둔, 마치 핵폐기물 같은 것이었다. 누구라도 그것을 다루려고 하는 이는 방사선 피폭과 같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도록 말이다.

수사관 나으리들이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골머리를 앓든 말든 경완은 입을 털었다.

“설마 그 어린 것들을 죽이겠어요? 죽이면 그 늙은이를 뭐로 협박할 건데요?”

안 죽이고 협박한다? 수사관들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더 최악이었다. 지키고자 하는 자와 협박하고자 하는 자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뻔하다.

수사관은 경완의 눈치를 살피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흑노야의 후계자가 어떻게 행동할 것 같습니까?”

“저라면 일단 그 손주들을 찾아가서 두들겨 패고 볼 것 같은데요? 네가 잘못해서 처맞는 게 아니라 네 할애비가 잘못해서 처맞는 거라고 알려주면서요.”

“.. 이 나라에 연좌제는 없습니다만..”

경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이 나라 사람들에겐 상식이긴 하죠. 하지만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이들을 죽여서 권력을 잡고 그 공(公)으로 손주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는 작금의 현실에서 한(恨)을 품은 이들이 그걸 쉽게 납득할지는 모르겠네요. 망해서 거지꼴이 되었으면 그래도 하늘 아래 사필귀정은 있다며 한을 삭히겠지만 부자는 부자 되고 거지는 거지꼴을 면치 못하는 게 이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원수의 후손들이 앞으로도 잘 먹고 잘사는 꼴이 뻔한 상황에서 원한을 갚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

지킬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평생 한으로 살아온 이에게 이는 악마의 유혹보다 더한 유혹이었다. 거기에 넘어가면 흑노야처럼 되는 거다.

수사관들의 얼굴에 시름이 깊어지는 가운데 경완의 통찰력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야. 니 할애비가 ○○○가 맞냐?”

“물러서라!”

전직 쿠데타 사령관의 손주 앞에 떡하니 나타난 젊은 청년.

젊은 청년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골격과 목소리 때문이었으나 얼굴은 검은 연기로 가려져서 생김새를 알 수 없었다.

불길하게 주변에 깔린 안개가 마치 흑노야를 연상시켰다.

“도망치십시오, 도련님!”

경호원들이 나섰지만 어디로 어떻게 도망치란 말인가? 검은 연기가 괴물의 혓바닥처럼 주변에 넘실거리고 있었고 차량의 바퀴는 이미 검은 연기에 찢겨 걸레짝이 되어있는데?

경호원들은 총기까지 빼 들었지만 검은 연기는 총탄까지 막아냈다.

퍼억!

“크윽!”

검은 연기가 후려치자 경호원들이 마치 차량에 부딪힌 것처럼 날아가 의식을 잃었다.

검은 연기가 몸 주변에서 스멀스멀 새어 나오는 청년이 젊은 청년에게 다가가자 젊은 청년이 악을 질렀다.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에 검은 연기의 청년이 대답했다.

“넌 네 할애비가 만들어준 부귀를 누리는 주제에 네 할애비한테 손자가 제발 사람들 욕 안 먹고 떳떳하게 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냐?”

“....”

“그럼 그렇지. 고맙다. 동정의 여지를 안 줘서.”

원래 쓰면 뱉고 달면 삼키는 법이다. 조상이 더러운 짓을 해서 내 입에 들어온 부귀영화를 달콤하다고 삼키지 못할망정 더럽다고 뱉어낼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있겠는가?

옳고 그름을 따지면 자신이 불리하니 그냥 외면해버리거나 조상의 더러운 짓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가져와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행태인 것이다.

하지만 조상 덕을 봤으면 조상의 업보 역시 지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재산은 받고 싶고 업보는 안 받고 싶고..

선택적 상속이나 선택적 분노나 이중잣대라는 점에선 다를 바가 없었다. 뭐, 인간이 원래 그런 추잡한 존재이긴 하지만 말이다.

청년이 주먹을 들었다.

검은 연기로 감싸인 주먹이 과거 이 나라를 호령하던 권력자의 손자에게 날아가 안면에 박혔다. 검은 연기로 보호된 주먹은 마치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퍽!

“크억!”

퍽! 퍽! 퍽!

“어억! 허윽!”

주먹질이 연신 이어졌다. 재벌 3세 마냥 스타일 좋게 관리되었던 외모는 어느새 멍이 들고 퉁퉁 불어버렸다. 주먹질은 청년이 이 빌런 같은 놈에게 울면서 빌 때 끝났다.

“허어엉! 흐어어엉! 그마안! 허으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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