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스캔들
“선물 있다며?”
“응.”
“어디 있는데?”
아무리 봐도 빈손인데?
경완의 눈초리에 미연은 여우같이 앙큼하게 웃으며 검지를 턱밑에 댔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하는 대답.
“나?”
“헛소리하지 말고 없으면 가라.”
“진짜야. 요리해 주려고 왔거든.”
“요리는 무슨. 재료도 없다.”
“그래? 일단 냉장고부터 확인해 보고 없으면 주문하면 돼.”
그녀는 선언하든 대꾸하고는 당당히 현관으로 향했다.
가운데 경완이 가로막듯 서 있었지만 남자에게 위험해 보이는 흉부를 들이밀며 만질 테면 만져봐, 아니 만지면 더 좋다는 식으로 들어오는 미연의 막무가내에 그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옆으로 피했다.
그렇게 톱여배우는 현관에서 거실로, 거실에서 주방으로 들어가서는 냉장고와 찬장을 확인하더니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건 다 있네. 야채는 좀 시들긴 했지만 충분히 쓸만하고. 그래도 밥은 해먹으려고 했나 봐?”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켜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결국 상업적 음식맛(?)에 질려버린 그는 직접 집밥을 해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끝내 직접 요리하는 것이 귀찮아진 그는 새로운 식단을 확보했다. 일단 과일로 섬유질을 확보하고, 칼로리바나 미숫가루 등으로 탄수화물을, 부족할 것 같은 비타민은 종합 비타민으로 해결한 것이다.
단백질은 어디 갔냐고? 그거야 치맥으로 해결했다.
물론 맛있는 끼니는 아니지만, 경완의 식습관은 귀찮음과 맛, 그 사이 어딘가에서 타협했다.
미연이 요리를 시작했다. 경완이 사다 놓고 몇 번 입지도 않은 앞치마를 두르고 전기밥솥에 밥을 안친 후 도마를 꺼내 재료를 썰고 물을 끓이며 반찬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단아한 새색시 같았지만 경완은 모른 척 게임을 했다. 현실도피랄까?
“밥 다 됐어.”
“흐음…….”
경완은 굉장히 불편한 기색으로 식탁에 앉았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윤기 넘치는 밥알과 구수한 찌개, 계란프라이, 그리고 김치 대신 놓인 파겉절이.
“아.”
한 입 먹은 경완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맛있어서…… 그래서 안타까워서 내뱉은 감탄사였다.
“왜 맛없어?”
미연이 놀라서 묻자 경완은 고개를 저었다.
“맛있어서.”
“그런데 왜 반응이 그래?”
“인간은 편리한 걸 경험하고 나면 그걸 그리워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지.”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끼니 때마다 입맛에 맞는 집밥으로 차려진 식탁이 차려진다? 이런 편리함은 한 번 경험하고 나면 아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 미연은 은근슬쩍 한 마디 던졌다.
“내가 종종 해줄 수 있는데…….”
나 당신에게 호감이 가득하다는 뜻이 충분히 담긴 뉘앙스였지만 경완은 거기에 담긴 의도를 놓치지 않았다.
“종종이 자주가 되고, 자주가 매일이 되는 걸 노리는 게 아니고?”
“흐응~ 잘 아네?”
그렇게 대꾸하는 그녀는 텄다는 낭패감에 쓴 입맛을 다셨다. 그의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 권리를 확보하려는 시도가 무산되었다.
하지만 경완은 거기까지 생각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됐다. 그 편리함에 뭘 지불해야 할지 무섭다.”
미연이 눈을 빛내며 그 말을 물고 늘어졌다.
“안 줘도 되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내가 괜찮다는데 왜 그래?”
“내가 공짜로 부림을 당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지.”
본인이 무료봉사해도 괜찮다고 말하는 새끼들은 소위 까를 만드는 빠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본인의 무료봉사는 본인의 자유다. 하지만 그걸 보고 ‘쟤는 무료로 해주는데 너는 왜 안 그러는데?’라는 X같은 생각을 하는 새끼들이 어딘가에서 반드시 튀어나오는 게 문제였다.
마치 ‘너 아니라도 150 받고 일할 사람 널렸어’라며 불만 가지지 말고 일하라는 고용주가 어딘가에선 반드시 생기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공짜가 아니면 되지.”
“그래? 얼마 줄까?”
미연이 그러한 주장을 순순히 납득하자 경완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에 미연이 눈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내밀며 말했다.
“뽀뽀 세 번.”
탄탄한 미모를 바탕으로 한 그녀의 애교는 보통 남자들에겐 설사 그녀가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용서해 줄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완에겐 통하지 않았다.
“돈으로 받아라.”
도저히 유혹이 통하지 않자 그녀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됐거든. 나 돈 잘 벌거든.”
경완은 왼손으로 눈을 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다.”
“흥! 뽀뽀 해줄지 말지는 나중에 생각하고 밥부터 먹어. 국 식어.”
그 말에 경완은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밥과 국은 뜨거울 때 먹어야 했다.
그 뒤로 미연은 나흘 주기로 경완의 집에 침입하듯 방문해서는 밥을 해주고 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점차 그 주기가 사흘, 이틀 주기로 짧아졌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기가 쓸 밥그릇과 수저, 수건 등을 놔두고 가는 거 아닌가? 그뿐인가? 갈아입을 옷에, 가방에, 구두까지.
아예 경완의 집에다가 살림을 차릴 의도가 노골적이었기에 그는 고민을 하다가 결국 손을 썼다.
“오빠 나왔어.”
“응, 그동안 수고했어. 앞으로 안 와도 돼.”
“뭐?”
“파출부 고용했어. 밥하고 반찬까지 해놓고 가더라.”
파출부, 가정부.
자신만의 공간에 누가 들어오는 게 찜찜해서 청소로봇을 샀는데 결국 큰 결심을 하고 파출부를 고용한 경완이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미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 나보다 맛있게 하는지 맛이나 좀 봐야겠다.”
“넌 이제 안 와도 된다니까.”
“그래서 밥 한 끼도 안 줄 거야?”
“……얼른 먹고 가라.”
그동안 그녀가 해줘서 뱃속에 들어간 밥알의 개수를 생각하면 밥 한 끼 먹이고 돌려보는 게 양심에 덜 찔렸다.
주방의 테이블에 앉은 미연은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했지만 속으로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 쌓아올린 빌드업인데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뜨리게 놔둘 순 없었다.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그녀는 경완이 차려준, 파출부가 해놓은 밥을 먹으며 괜한 트집을 잡았다.
“오빠는 이게 맛있어? 내가 한 것보다 맛없지 않아?”
그녀가 애써 애교 섞인 미소로 동의를 구해봤지만 다른 남자라면 몰라도 경완에겐 통하지 않았다.
“뭔 헛소리야?”
솔직히 맛의 수준은 도토리 키재기라 누가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경완의 면박에 그녀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뭐, 오빠 입맛에 맞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오빠 그거 알아?”
“또 뭔데?”
“나 국정원에서 경호 요원 붙여줬다?”
발랄한 대꾸에 경완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녀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오빠가 큰일 했잖아. 자칫 조선족 소요사태가 일어났다면 중국이 다시 개입했을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
“누가?”
“당연히 TV에 나오는 전문가들이.”
“전문가는 무슨 좆문가겠지.”
방송에 나오는 전문가들은 머리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순서가 아니라 PD 전화 잘 받는 순서로 섭외된다며?
경완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혀를 차고는 물었다.
“그래서 그거랑 국정원이 너한테 경호 붙인 거랑 무슨 상관인데?”
“어머? 저번에 오빠가 나한테 들러붙은 재벌 스토커 떼줬잖아? 아마 그래서 국정원에선 내가 오빠한테 중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야. 누가 날 건드려서 오빠를 자극하기 전에 미리 막겠다는 생각이지. 덕분에 한층 더 출세했네?”
“출세?”
“국가에서 관심 두고 보호하는 연예인이 이 대한민국에 나 말고 또 있겠어? 역시 인생은 인맥빨이야. 금수저도 결국 부모 잘 만났다는 인맥빨이잖아? 난 오빠 만난 인맥빨이고. 안 그래?”
경완은 머리가 아파서 관자놀이를 눌렀다. 나라에서, 국정원에서 그런다는 말은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거 아닌가? 그에게 원한을 가진 놈들도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빨리 나랑 연 끊어라. 위험하다.”
“내가 연 끊었어요~하고 선언해도 그걸 사람들이 믿겠어?”
“……쩝.”
맞는 말이라 반박은 못 하고 입맛만 다시는 경완에게 미연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나라에서 중요하게 보호하는 사람이 됐지 뭐야?”
“안 무섭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그 말에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지켜주지는 못해도 복수는 오지게 해줄 거 아냐? 난 그거면 충분해.”
“신기하네?”
“뭐가?”
“밑바닥에서부터 아등바등 기어 올라와서 손에 쥔 게 많아지면 두려운 것도 많아지는 법이거든.”
경완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꾸했다.
“오빠가 비싼 년 되라며? 어디서든 항상 당당해야 더 비싼 년이 되지 않겠어?‘
그런 그녀의 말에는 경완조차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 그래. 니똥 굵다.”
“밥 먹는데 똥 얘기하지 마.”
그녀가 미간을 좁히며 타박하자 경완이 두꺼운 낯가죽으로 대꾸했다.
“아직 다 안 먹었냐? 빨리 먹고 가라.”
* * *
파출부를 고용함으로써 미연이 그의 집에 올 명분(?)을 제거한 경완은 아침을 먹고 게임을 하다가 문득 느껴진 시장기에 시계를 보았다.
슬슬 점심 먹을 때였다. 이럴 때 보면 참 신체는 신기하지 않은가?
띵동!
파출부가 왔다.
경완은 남자 파출부를 고용했는데, 그가 게이여서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체력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체력적 우월성을 바탕으로 집안일을 더 신속하고 빠르게 끝낸 후 얼른 나가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경완은 습관적으로 인터폰의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고 다시 패드를 잡았다.
현관이 열리고 비닐봉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주방으로 향하자 경완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오늘 점심은 뭐예요?”
“파스타예요.”
돌아오는 대답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이 얼음처럼 멈췄고 경완의 고개가 돌아갔다.
파스타가 너무 싫거나 너무 좋아서가 아니었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신이 고용한 파출부의 목소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야! 미역! 네가 왜 있냐?!”
“왜 있긴? 본인이 문 열어주고서도 몰라?”
아니, 지금 그걸 대답이라고.
경완은 생뚱맞은 헛소리를 하는 그녀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확신이 들었다. 저년이 내가 고용한 파출부를 어찌했다고 말이다.
“파출부는 어쨌어?”
그 말에 미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더 좋은 데 소개해 줬어. 내가 아는 언니 팬이라는데 마침 그 언니가 파출부가 필요하다네?”
그래서 희희낙락하며 갔다고?
어이없어하는 경완에게 미연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그만둬서 미안하대. 선금은 이번 달 안으로 돌려준대.”
“지금 그게 문제냐?”
“너무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마. 돈 굳었잖아.”
그녀를 보는 경완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내가 다른 파출부 구해도 이번과 같은 짓 또 할 거지?”
그러자 그녀는 나라를 뒤흔들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당연하지. 내가 어떻게 쟁취한 자리인데 남한테 이 자리를 넘겨줘?”
그건 마치 선전포고와도 같았다.
“그 식모 자리가 그리 좋냐?”
“이 식모 자리에 들어오고 싶은 사람이 엄청 많을걸? 한낱 연예인인 나도 아는데 오빠는 그걸 몰라?”
“…….”
경완의 입이 다물어졌다.
하긴 ‘세상에서 가장 능력 있으면서도 위험한 초능력자’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를 근접 거리에 관찰할 수 있으며, 친분도 쌓을 수 있으며, 나아가 뭔가를 몰래 먹일 수도 있는 파출부라는 자리는 분명 전 세계 정보기관에서 탐을 낼 자리였다.
무한전생-더 빌런 17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