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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전생 더 빌런-287화 (287/367)

무한전생-더 빌런 287화

27-권력은 잠들지 않는다

화가 풀린 경완이 말했다.

“능력 좋네요.”

“가,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제부터 좀 건설적인 이야기를 합시다.”

그 말에 정호태의 표정이 밝아졌다. 경완의 말은 그가 정호태가 내다본 미래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기자회견의 내용이 정당하다고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의미였으니까.

“위버멘쉬 한국지부와 저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법적인 구속을 원하신다면,”

“아니요. 그건 필요 없어요.“

법적으로 관계를 공식화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가 한 말은 책임을 져야 하리라.

그런 경완의 속내를 모르는 정호태가 말을 이었다.

“그런 거라면 더 간단합니다. 제게 지시를 내리시면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다예요?”

“그것 말고 한국지부의 인사나 대외비 같은 자료도 내어 드릴 겁니다. 감사조직을 경완 씨 직할로 옮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인사권도 드리겠습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렇게까지 한다는 건 정말 그의 밑으로 들어오는 일이 미리 계획되어 있거나 내부 의사결정권자들 사이에 합의가 있었다는 걸 뒷받침했다.

“그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갑시다. 법조계. 어떻게 할 거예요?”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을 언급하자 정호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전에 제가 일단은 이라며 피해가 적어진다는 이유를 대지 않았습니까?”

“다른 이유가 또 있나 보네요? 지극히 개인적인?”

예리하게 찍어본 말에 정호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프로젝트의 담당자와 주요 핵심 그룹의 구성원들은 한국 사법부에 대해 하나같이 환멸을 느끼고 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니까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은 저들이 주장하는 대의에 사적인 이유가 결부된 일이었다.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사법부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위험한 일을 하면서도 정보 하나 새어 나가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경완은 정호태를 보며 물었다.

“지부장님은 아니고요?”

“저도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중심을 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폭주하면 모두에게 피해를 끼치니까요.”

“왠지 하지 말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말을 안 들을 것 같다는 말 같은데요?”

“저희는 흔한 좆소기업 따위가 아니니까요. 조직원과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추구합니다.”

본질적으로 모든 조직과 그 구성원과의 관계는 계약관계다. 조직은 구성원의 충성을 받는 대신 구성원을 보호할 책임이 있었다.

조직이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구성원은 구성원이 아니라 언제든 소모할 수 있는 노예일 뿐이고, 조직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충성을 바치지 않는 구성원은 구성원이 아니라 도려내야 할 암적인 존재일 뿐이다.

그렇기에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추구한다는 정호태의 말은 매우 정석적이고 원론적이었다.

하지만 경완은 거기에서 실리적인 이유를 읽어낼 수 있었으니, 힘없는 구성원은 혁명조차 꿈꾸지 못하는 노예일 뿐이지만, 힘을 가진 구성원은 부당한 조직의 대우에 언제든 반기를 들 수 있는 잠재적 혁명분자였다.

당연히 상호호혜적 관계가 아니면 힘 있는 조직원을 달랠 수 없었고 유능한 조직원을 이탈하게 한다.

더구나 그냥 회원도 아니고 검찰 내부에 깊숙이 잠자고 있던 자료를 빼내며 대의를 위해 살인마저 불사하는 자들 아닌가? 개과가 아니라 늑대과인 자들을 노예처럼 부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정호태가 갑자기 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었다. 사법계에 원한을 가진 만큼 타당한 이유로도 설득이 힘들 수 있었다. 원한 해소에 찬물을 끼얹다가 의견충돌이 발생하면 딴생각하는 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정 지부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정리하고 싶어요?”

“당장 정리하기엔 얽힌 것들이 많아서 곤란합니다.”

대답하는 걸 들어보니 그 프로젝트팀에 대한 장악력을 우려하기보다는 앞으로의 계획을 더 걱정하는 것 같았다. 얽힌 일이 많다는 건 그만큼 뒤에 계획된 일이 많다는 뜻.

“그러면 검찰과 법원은 어떻게 할 거예요? 냄새를 맡은 것 같은데.”

“버티면 됩니다.”

“언제까지요? 사법 개혁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요?”

경완의 말에 정호태 고개를 끄덕였고 경완은 그런 그를 향해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사법 개혁이 통과될 것 같아요?”

“몇 가지 불안 사항이 있지만 제어 가능한 변수입니다.”

힘들지만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라는 뉘앙스에 경완은 다르게 질문해보았다.

“그 법안이 통과되면 사법 카르텔이 모래성 무너지듯 무너질 거라고 보세요?”

“……그렇진 않을 겁니다만 상당한 타격은 될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법 카르텔은 어느 한순간 번쩍하고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오랜 폐단이 쌓여서 생긴 것이다. 기소와 판결을 자기들 꼴리는 대로 주무르는 사법 카르텔이 고작 법안 하나에 무너질 리가 없었다.

어떤 법안을 만들어놔도 저들 특유의 우리가 남이가 정신과 엘리트주의로 똘똘이 뭉쳐 언제나 그랬듯이 답을 찾을 것이다. 법안을 우회하거나 무용지물로 만들어서 그들의 기득권을 지킬 방법을 말이다.

사법계만이라면 그러기 어렵겠지만, 법조인 출신의 정치인은 많았고, 재계와 법률가는 세금 문제 때문에라도 결코 땔 수 없는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그들 모두가 사법 카르텔과 공생하는 이들이었다.

정호태 지부장이 말했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압니다. 그래서 아직 팀을 정리하기가 곤란하다는 거고요.”

개혁의 가장 큰 걸림돌은 개혁의 대상이 되는 자들이었다. 개혁의 목적이 그런 자들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만 어떤 대의를 대든 자기 밥그릇이 줄어드는 일에 자발적으로 동참할 이는 없었다.

이는 아무리 공부 잘하고 똑똑한 이들이라도 해도 마찬가지였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상대는 교육받지 못한 무지렁이가 아니라 대한민국 0.1%에 드는 두뇌들이었으니까.

그렇다고 과연 죽여 없애는 것이 정당하냐고 하면 이 대한민국에선 그 누구도 그렇다고 당당히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 나라의 상식으로서는 용납이 안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완은 그런 상식에 얽매인 인간이 아니었다. 애당초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없었다. 이 나라에 애착이란 걸 가지기엔 몸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거시기한 일들이 좀 많았다.

그는 정호태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이해합니다. 원래 개혁을 하려면 인적청산부터 해야죠.”

그런데 판검사들은 그게 안 된다. 명색이 공무원이라서 그런지 성추행을 해도, 스폰서로부터 향응을 받아도, 기소와 판결을 병신같이 해도 옷을 벗는 일이 없었다.

미국처럼 판사를 투표로 뽑는 것도 아니라서 세간의 시선을 신경 쓰지도 않는다.

거기에 정계에는 판검사 출신의 정치인이 자리를 잘 잡고 있고, 재계하고도 스폰서니 전관예우니 하면서 찰떡궁합으로 붙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시스템 실패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적폐가 쌓여 자정 기능이 망가져 버린 상황.

하다못해 정권이 바뀌면 각 지자체장을 물갈이하는 것도 나름의 자정 작용인데 판검사는 그게 안 된다.

사법권 독립이란 명분은 이미 그들의 적폐를 수호하는 문구로 변질한 지 오래였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호태 지부장은 경완이 자신의 방식을 이해하자 크게 안심이 되어 고개를 숙였고 경완은 손사래를 쳤다.

“뭘요. 당연한 일이죠.”

중국 전국시대 때 서문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강에 처녀를 바치는 인신공양을 어떻게 멈췄는고 하니, 강의 신인 하백에게 신부가 될 처녀가 예쁘지 않다고, 새로 신부를 뽑을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을 전해달라며 미신의 근본인 무당을 강에 처넣고, 그 제자들도 처넣고, 무당과 결탁해 처녀인신공양 건으로 뇌물 처먹던 지역관리들도 몇 처넣고, 그렇게 적폐를 강물에 처넣어 인신공양을 중지시켰다.

이렇듯 인신공양이란 적폐를 깔끔히 없애 버리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수단은 그에 이권이 얽힌 기득권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건 이미 수천 년 전 사람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세 치 혓바닥으로? 서문표의 논리가 너무나 아름답고 감동적이라서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들의 지성을 붙잡고 있던 무당을 강물에 집어넣고, 그들의 목숨줄을 쥐고 있던 관리를 물에 던져넣었을까?

아니다. 서문표가 당시 태수라는 높은 관리가 아니었다면, 당대 왕과 같은 스승을 둔 사형제 관계가 아니었다면, 인신공양하는 자리에 본인을 지킬 군사들을 대동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하백에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을 전하러 본인이 강에 들어가야 했을 것이다.

이때 사기(史記)에 기록된 서문표가 한 말이 ‘백성들이란 일이 이루어지고 나면 즐거워할 수 있을 뿐이지 함께 일을 시작할 생각은 하지 못한다’라 하였다.

경완은 이러한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역사를 보아도 대중은 혁명은 할 수 있을지언정 개혁은 하지 못했다.

개혁이란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종양을 절제해 내듯, 사회의 문제를 진단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지성과 통찰, 윤리의식이 필요했다.

본인이 그것을 가지고 있든, 아니면 적어도 대중에게서 그것을 끌어낼 수 있는 리더가 필요했다. 계몽운동을 봐도 백성 스스로가 아니라 좀 배웠다는 식자층, 엘리트, 계몽군주가 시작했다.

그런데 과연 사법카르텔이 그런 개혁과 계몽을 추구하는 리더를 가만히 두겠는가?

그들이 휘두르는 칼은 한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생명을 너무나 손쉽게 끊어낼 수 있었다.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될 만한 자들을 온갖 명목과 수단을 동원해 싹을 밟아버릴 수 있었다.

따라서 개혁에 불씨를 당길 리더는 탄생하지 않고, 대중에게 남은 선택지는 혁명뿐이다.

그렇기에 경완은 살인을 서슴지 않는 위버멘쉬의 방식을 이해했다. 법치라는 칼을 휘두르는 적폐를 똑같이 법치로 징치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설사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혁명을 기다리는 것도, 또 혁명을 하는 것도 너무나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었다.

그 비용은 누가 지출하는가? 권력 있고 돈 많으신 분들이? 천만에.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피해를 보는 것은 항상 비빌 구석이 없는 가난한 서민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호태와 위버멘쉬 한국지부의 조직적인 살인행각은 경완에게 크게 거부감이 오지 않았다. 약한 놈 때리는 것보다 강한 놈 때리는 것이 경완의 구미에 더 맞았던 탓이다.

하지만 당면한 문제는 경완이 판검사 연쇄 살해 사건에 휘말리게 생겼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 귀찮아진다.

경완이 정호태에게 물었다.

“제가 귀찮은 일에 얽히기 싫은 건 알죠?”

“네.”

정호태 지부장은 대답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만사 귀찮아하는 그를 엮은 건 아무리 필연이라고 해도 분명 폐를 끼친 일이었다.

“일단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기로 합시다.”

“네. 그럼…….”

“언론에 일단은 긴밀히 협의 중이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혹여나 나중에 말을 바꾸려는 것은 아닌지 정호태 지부장은 잠깐 걱정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털어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경완이 말을 바꾸려고 한다고 해도 그건 정호태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의 의사를 물어보지 않고 급하게 진행한 일임은 분명하니까.

“그러니까 굳이 이 타이밍에 기자회견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거네요. 맞죠?”

그때 경완이 지나가는 듯한 말로 물었다.

급한 일이었다면 일단 위버멘쉬 사이의 합의를 언론에 알리지 말자는 의견에 뭔가 반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완의 의견대로 급하게 언론에 알리지 않아도 된다면 굳이 이렇게 급히 기자회견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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