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전생-더 빌런 350화
32-레지스탕스
[정말 인류가 멸망할 거라고 생각해요? 발푸기스가 주장하듯 그 초능력 실험 사고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니까 돕는 거겠지?”
[그 생각이 틀렸다면요?]
“내 생각이 틀릴 가능성은 매~우, 매우매우매우 낮아.”
요하네스가 진실의 스무고개를 완벽히 무력화했다거나, 본인의 입으로 말했던 사실들이 사실은 모두 조직적인 날조에 불과했다거나 할 확률은 너무나 낮았다.
[정말 말이 안 통하네요.]
“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 장소의 목적은 아마 나를 설득하려는 거겠지?”
아니면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든가.
[네.]
“그런데 실패했네. 그럼 이제 미연에게 해코지를 할 건가?”
[그런 거라면 제가 용납하지 않을 건데요. 전 사실 미연 가수님의 노래를 자주 듣는단 말이에요.]
“그럼, 미연이가 지금 어디 있는지 알려줄 수 있겠네?”
[알려줄 수는 있죠. 하지만 그 전에 맹세를 해주셔야 하는데요.]
“내가 맹세를 한다고 믿을 수는 있겠니?”
[저야 뭐 맹세를 받는 걸로 할 일은 끝이니까요.]
“빨리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경완은 짜증을 내면서 곧장 맹세했다. 요하네스와 거리를 두겠다고 말이다.
물론 빈말이었다.
[아. 이제 됐다. 방금 들은 말을 녹음 파일로 보내줘야 계약이 완수되거든요.]
“의외로 계약을 준수하는 모양인데?”
[그건 아니고, 저쪽에 계약에 집착하는 또라이가 있어서요. 골치 아픈 일을 피하려면 약속한 대로 하는 편이 속 편해요.]
그렇게 대답한 사망기자는 곧 미연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경완은 바로 그곳으로 날아갔다.
미연이 잡혀 있는 곳은 여전히 강원도였다. 납치된 촬영장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찾으려면 찾을 수 있는 곳에 그녀가 있었다.
경완은 곧장 그녀가 잡혀 있다는 폐가로 향했다. 여기도 역시 인구가 소멸한 시골 마을이었다. 아무리 남북이 통일되어도 지방 소멸의 기조는 나아지지 않았고, 서울 참사는 오히려 이러한 기조를 가속했다.
냉정한 말이기는 하지만 서울에 터진 핵이 만들어낸 빈자리가 채워지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지방 인구가 빨려들어 갔으니까.
위수지역이라는 명분이 날아가 국가의 지원도 없어진 강원도는 안 그래도 수도권에 가까워서 더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강원도에는 버려진 마을이 많았다.
경완은 폐가로 들어가기 전에 초감각 레이더를 돌렸다. 혹시나 있을 함정이나 위험 요소를 모조리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함정 따위는 없었고 납치범조차 없었다. 오직 미연만이 있을 뿐.
경완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묶여 있는 채로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다행히 건강엔 이상이 없었다. 납치범에게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맞은 부위도 없었다.
다만 그녀의 발밑에 쪽지 하나가 있었다. 쪽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프린트되어 있었다.
[위버멘쉬 총수를 돕는 건 세상을 망치고 나아가 너 자신을 망치는 일이다.]
경완은 그 글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그러자 종이는 순식간에 타올라 재가 되어버렸다.
그는 미연의 이름을 부르며 안아들었다.
“미연아.”
“으응? 오빠?”
“괜찮아?”
“어…… 괜찮은 거 같아.”
“놈은?”
“납치범?”
“응.”
“글쎄? 갑자기 사라졌는데?”
“왜 기절해 있었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녀는 납치범이 뭔가를 보여주고 나서 의식을 잃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게 뭔지 기억이 나진 않는다고.
경완은 찜찜함을 뒤로하고 그녀를 데리고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바쁘게 소집되어 구출 작전을 준비하던 김봉남과 위버멘쉬 소속 초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비록 그들이 활약하진 못했지만 돕겠다고 나선 건 분명 고마웠다.
이렇게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지만, 기레기들이 이미연 납치 사건을 자극적으로 다루려고 했다.
물론 미연의 소속사에서 ‘사건 약 한 시간 만에 이경완이 직접 그녀를 구출했다’는 공식 발표가 나가자 바로 일제히 합죽이가 되어 찌그러졌다.
IAMSR 아시아 태평양 지역 관리청 부청장이라는 감투를 쓴 이경완은 한낱 한국 기레기들이 감히 손을 댈 수 없는 거물이 되어 있었다.
IAMSR이 작정하면 한국 기업들의 초능력 R&D는 지대한 지장을 받을 수 있었고, 이경완은 그럴 권한이 있는 위치에 있었으니, 기업들의 눈치를 봐서라도 기레기들은 이미연 사건을 다루는데 있어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굳이 이미연 납치 사건이 아니더라고 정청완 중장이 싸질러 놓은 대한민국의 전반적인 국민분열 덕분에 기삿거리가 넘친다는 것이다.
“고마워요, 요하네스 씨.”
[황색 언론들이 하는 짓거리가 다 거기서 거기죠.]
당연하게도 기레기들이 아무런 경고도 없는데 알아서 입을 닥쳤을 리가 없었다. 그들의 물주인 기업들로부터 경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요하네스가 직접적으로 그 언론 물주들에게 기레기를 단속하라고 요구한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인맥과 위버멘쉬 코리아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을 뿐이다.
[미연 씨는 좀 어때요?]
“괜찮은 것 같아요. 스케줄도 제대로 소화하고 있고요. 건강에도 이상 없고요.”
분명 납치범과 전화를 할 때 미연을 때렸던 것 같은데, 그때 상황을 그녀가 설명해 주길 납치범은 그녀를 때리지 않았단다.
그저 얼굴을 앞에 손바닥을 가져다대고 희극 배우들이 때리는 연기하듯이 자기 손바닥을 때리며 소리를 냈을 뿐. 설사 정말 때렸다고 해도 어차피 그녀의 입이 테이프로 막혀 있어 비명을 지르긴 힘들었을 거란다.
[그렇군요.]
“정말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긴 하네요.”
[불길합니다.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이면 오히려 손해일 텐데 말이죠.]
“그건 그래요.”
경완은 요하네스의 말에 동의했다. 요하네스는 저들의 의도가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단서를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군요. 납치범 새끼 찾게 되면 연락 부탁해요.”
직접 조질 거니까.
[물론이죠.]
요하네스는 흔쾌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오늘 스케줄을 마친 미연이 귀가했다.
“오빠 나왔어.”
“잘 다녀왔어?”
“응.”
납치 사건 이후 그녀에 대한 경호는 한층 더 철저해졌다. 미연의 소속사는 따로 위버멘쉬 코리아와 계약을 맺어 필요한 경호인력을 제공받았다.
경완은 자기가 미연 옆에서 경호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그건 또 원하지 않았다. 자기 때문에 IAMSR 부청장으로서의 업무를 방해하고 싶진 않다나?
“오빠 방금 전화하고 있었어?”
미연은 경완의 손에 들린 폰을 보고 물었다.
“응.”
“누구랑?”
“아, 총수님.”
“아, 그래?”
그리고 미연은 잠시 말이 없었다가 입을 열었다.
“그…… 위버멘쉬 총수라는 사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지 않아?”
“좀 이상하기는 하지.”
객관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에서 요하네스는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그 나이에 위버멘쉬 같은 거대 조직을 꾸리는 것도 대단한 일이고, 무엇보다 엄청난 횟수로 회귀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이상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살아가는 목적이 세계평화를 통한 완전한 죽음이 아닌가? 이상하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뭐랄까, 항상 뭔가 세상에 분란을 일으키고 그 수습을 오빠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
“그런 면도 있지.”
경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하네스가 그를 비장의 카드로 여기고 있으니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미연처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오빠는 왜 그런 사람하고 자꾸 어울려?”
“어…… 상부상조?”
“그런 사람하고 꼭 상부상조해야 해?”
경완은 요하네스와 결탁해서 얻는 이점들에 관해 쭈욱 나열하려고 했지만, 미연의 낌새가 이상해서 일단 입을 다물었다.
얘가 이렇게 자신의 바깥일에 관해서 간섭했었던가? 그리고 요하네스가 미연에게 스위트 호텔도 예약해주고 여러모로 배려를 많이 해준 적도 있어서 미연은 요하네스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자기 이런 적대감 어린 태도를 보이니 이상했다. 혹시 납치 사건이 그녀에게 충격을 주어서 그런 건 아닐까?
경완은 그녀는 품에 안고 토닥이며 말했다.
“혹시 그 사건 때문에 그래?”
“아, 그건 벌써 다 잊었다니까.”
미연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경완은 전혀 괜찮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당겨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며 말했다.
“요하네스 씨가 우리를 위해서 해준 일이 많아. 이번에 언론 입단속한 것도 그가 손을 써준 거야. 고맙지 않아?”
“다 자기한테 떨어지는 게 있으니까 그렇잖아.”
“도대체 뭐가 떨어지는데?”
“오빠.”
미연은 그녀가 연기한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한 표독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오빠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잖아.”
“다 주고 받는 거지. 내가 공짜로 호구 잡힌 것도 아니잖아?”
“내가 보기엔 호구 잡힌 것 같아. 오빠는 지금보다 더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경완은 미연의 낯선 얼굴을 보다가 갑자기 감각이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위기감에 발동된 초감각이 미연의 신체를 투시하며 샅샅이 이상한 점이 있나 확인했다.
원래 그녀를 구출했을 때 신체에 다친 부분이 있는지만 확인했지만, 이번엔 조금이라도 수상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다. S입자가 옅은 농도를 띈 채 아주 작게 뭉쳐져 있는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경완은 그녀에게도 광역 치유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과 관련된 건 줄 알고 넘어갔지만, 지금 그의 마음에 의심이 싹텄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요소였다.
그는 화제를 슬쩍 돌렸다.
“요즘 병원 봉사 활동은 자주 해?”
“아니.”
미연의 광역 치유 능력은 사람의 목숨을 붙여놓는 일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위험한 수술이나, 응급실에 가서 자신의 능력을 사회 공헌에 하고 있었지만, 항상 그 이상을 바라는 염치없는 인간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예를 들어 환자 가족들, 거액의 상속세를 내기 싫다고 억지로 부모의 숨을 붙여놓으려는 자식들과 기삿거리를 원하는 기자 등 미연이 선의로 일을 벌였지만 정작 본인을 괴롭히는 일이 되어버리자 그런 류의 봉사 활동을 줄인 상태였다.
사람 생명이 걸린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더 민감하다는 걸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럼 최근에 치유 능력을 써본 적은 없다는 말이네?”
“응.”
“너 그거 알아? 치유 능력을 발달시키면 노화 방지나 회춘도 가능하데.”
“정말?”
미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래도 여자 연예인이다 보니 관리는 필수이지 않은가? 그런데 노화를 막거나 되돌릴 수 있다고 하니 귀가 솔깃할 수밖에 없었다.
“관심 있으면 마리아 소장님 같이 만나러 갈까?”
“나야 좋지.”
미연의 얼굴은 언제 표독스러웠냐는 듯 환한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이내 샐쭉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 있었으면 일찍 말해주지 그랬어.”
“아, 그게 최근에 나온 연구라.”
“아, 그렇구나. 고마워, 오빠.”
미연은 웃으며 경완의 볼에 키스를 하고는 씻으러 들어간다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미소에 마주 미소를 짓고 있던 경완의 얼굴은 그녀의 시선을 벗어나자마자 굳어버렸다.
그로부터 삼 일 후 미연은 경완을 따라 마리아 소장의 연구소에 방문했다.
“자~아. 긴장 풀고 박사님 말씀에 따라 눈을 반쯤 감으세요.”
마리아 소장의 말에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은 미연이 눈을 반쯤 감았다. 그녀의 옆에는 마리아 소장 말고 머리를 틀어 올린 젊은 여성이 하얀 실험용 가운을 입고 서 있었다.
마리아 소장은 미연이 박사라고 불린 젊은 여성과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경완에게 돌아왔다.
경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