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위협 (3)
“쯧,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안 와.”
부대 생활관의 한 호실.
험악한 인상의 사내, 박권창은 도통 열리지 않는 생활관 문을 보며 말했다.
저녁 식사 후, 모든 생존자가 부대에 모여 있는 저녁 시간.
거사를 치르기에 적합한 시기가 되었음에도 동료 중 한 명이 늦장을 부린 탓이다.
“그 자식은, 무슨 아이스크림 같은 걸 먹고 싶다고 해서는…….”
“큭큭. 찬중이 녀석, 원래부터 초등학생 같은 입맛이었으니까요.”
“조금만 있으면 원하는 대로 먹을 수도 있을 텐데. 멍청한 녀석.”
이유가 있는 늦장이면 모를까.
식당 일을 도와주면 먹을 수 있다는 간식 때문이라는 게 더 어이가 없다.
그런 건 나중에 내놓으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하니.
‘나중에는 반발심에 대충 만들어서 내놓을 수도 있다.’라는 이유를 대며 기어코 식당으로 가 버린 녀석.
‘……생각해 보면 거사가 미뤄진 것도, 그 자식이 자기 차례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버틴 탓이잖아?’
세상이 반쯤 멸망하기 전부터 함께하던 이 무리의 가장 큰 형님은 다름 아닌 박권창이었다.
반대로 지금 자리를 비운 찬중은 그의 담뱃불이나 붙이던 막내였고.
원래라면 박권창에게 대들기는커녕, 말도 제대로 걸 수 없는 입장이었던 녀석.
그런 녀석에게 휘둘려서 일정이 늦춰지고 있다는 생각하니, 묘하게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안 되겠다. 일단 우리끼리 진행하자. 찬중이 그 자식은 나중에 합류하라고 하고.”
“예? 찬중이가 없어도 될까요?”
“자식아! 그 녀석이 없이 우리만 해도 각성자가 넷이야. 군인들 중에 각성자가 없다는 건 확인했고.”
“그,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 아닙니까.”
다른 남자들은 물론, 대장인 박권창 역시 찬중의 멋대로인 행동에 휘말리는 이유는 단 하나.
‘별것도 아니었던 녀석이, 각성하고 가장 빠르게 성장할 줄은 몰랐지.’
그가 이 무리에서 가장 강력한 각성자였기 때문이다.
5인 모두가 각성을 겪기는 했으나, 그중에서도 막내였던 찬중의 성장은 독보적.
레벨이 벌써 6에 달하는 것은 물론, 능력의 운용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특히, 온몸에 퍼져 있는 불길을 한 손에 응축시켜 던지는 그만의 기술은…….
‘마치 전차의 대포를 연상케 할 정도였지.’
그 엄청난 위력에, 그들 사이에선 ‘멸살옥’이라는 명칭까지 붙은 기술이었다.
‘멸망 전에서부터 내가 형님이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그 녀석과 붙어서 형님 소리를 듣기는 어려웠을 거다.’
하지만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은 자신이 형님 소리를 듣고 있는 입장.
나중에 어떻게 될진 몰라도 당장 녀석에게 휘둘릴 이유는 없었다.
“아무튼! 작전대로 간다. 찬중이 녀석도 만족하면 합류하겠지.”
그렇게 네 사내는 작전을 위해 몸을 일으켰다.
작전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멸망 전에도 건달의 삶을 살던 사내들이 복잡한 작전을 구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기에 그들의 작전은 단순했는데.
‘무력 진압.’
단순하지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박권창은 다른 생존자들의 생활관 문을 발로 차며 열고 소리 질렀다.
“다 튀어나와!”
* * *
생존자 그룹의 리더이자, 유일한 각성자. 이상아.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앞에 선 상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권창 씨.”
날카로운 말투였지만, 그 말 속에 담긴 의문은 진심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어려운 생활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좀비와 괴물들을 피해 도망치고, 때로는 싸우기도 해야 했던 나날.
하루하루가 지옥 같던 시간이 끝나고, 드디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군부대에 도착.
이제 안심할 수 있다고,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의 생활관에 박권창과 그 일행이, 갑자기 생활관의 문을 박차고 들어오기 전까진.
그들은 생존자들을 강제로 생활관 앞의 공터로 끌고 나온 뒤, 무릎 꿇게 만들었다.
“흐흐, 뭐, 별거는 아니올시다. 내가 지병이 있어서, 무리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난단 말이오.”
상아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박권창이었다.
그의 무리는 생존자들 사이에서도 유독 까칠하고 폭력적인 탓에 겉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각성자인 이상아 앞에선 비교적 고분고분했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무리에서 내쫓기엔 양심에 가책이 느껴져서 계속 함께 활동해 왔는데…….
“권창 씨 일행의 큰형님 자리 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으셨나 보죠?”
“우리 다섯 명? 너무 작지! 이 생존자 그룹도, 좀 작고.”
그러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잇는 사내.
“이 부대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만족할 수 있겠어.”
“하아…….”
자그마하게 한숨을 내쉰 이상아는, 양팔을 교차해 품속에 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
“언젠가 사고를 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어요…….”
그 양손에 잡혀 나온 것은, 날카로운 두 자루의 가위.
“권창 씨, 그거 아시나요?”
“뭘 말이요?”
“제가 처음 좀비를 죽이고 각성했을 때…… 저는 그 사람들이 좀비인 줄, 꿈에도 몰랐답니다.”
세상이 멸망한 날.
이성을 잃은 사람들이 이상아가 일하던 양복점을 습격하고, 점원들을 죽이려 들었을 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가위를 들어, 습격자의 뒤통수에 박아 넣었다.
나중에 가서야 그들이 살아있는 인간이 아닌, 좀비였음을 깨닫게 되긴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이상아는 이미, 살인을 경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는 적이 나타난다면, 두 번째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크흐…… 무섭구만.”
박권창도, 이상아가 얼마나 무서운 여자인지는 알고 있었다.
재봉사라는 얌전해 보이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그녀가 한번 가위질을 하고 나면…….
잘려 나가는 것은 고작 천 조각 따위가 아닌, 좀비나 괴물들의 머리였으니까.
“형님, 저한테 맡겨 주십쇼.”
그런 이상아의 앞에 나선 것은, 박권창의 일행 중에서도 두 번째에 해당하는 남자.
둘째는 자신이 있어 보였지만, 박권창은 신중했다.
“그것도 좋다만, 저 여자는 강해. 셋째야. 너도 같이 합세해라.”
“옙.”
둘째에 이어 셋째까지 이상아의 앞으로 나섰다.
상아의 시점에선 그래 봐야 덩치 좀 큰 일반인이 한 명에서 두 명이 된 꼴.
거기까지 생각한 이상아의 눈이 약간 찡그려졌다.
저들은 그녀의 능력을 잘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저렇게 당당하게 군다는 것은…….
“하. 믿는 구석이 뭔가 했더니, 각성자인 걸 숨기고 계셨군요?”
“개인정보 아닌가? 존중해주셔야지.”
두 남자는 그렇게 낄낄대며 서서히 이상아에게 접근했고.
곧이어, 격돌했다.
“그러면 가장 거슬리던 여자는 대충 해결됐고.”
이상아가 강하긴 해도, 둘째와 셋째는 각각 레벨이 4에 달하는 각성자들이다.
심지어 이상아의 직업은 전투직도 아닌 재봉사.
한 명이라면 모를까, 두 명을 상대로는 약간은 버틸지 몰라도, 결과가 어떻게 날지는 뻔했다.
그때였다.
“이게 뭣들 하시는 겁니까!”
소란을 감지한 군인들이 몰려왔다.
총기로 무장한 수십 명의 군인들.
밤에도 부대 주변을 정찰하느라 주변 건물에 올라가 있던 이들이 내려온 것이다.
“흐흐, 이제야 오셨구만.”
하지만 박권창은 그 총을 보고도 두려움은커녕, 오히려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총을 사용하는 부대원들을 지휘하는 서수혁 상병이 앞으로 나서 박권창에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멈추시지 않는다면…….”
“않는다면, 뭐?”
“……발포하겠습니다.”
“크흐흐…… 웃기는구만.”
심지어 발포한다는 말에도 아무렇지 않게 구는 모습.
사수들을 이끌고 있는 서수혁 상병은, 슬쩍 뒤쪽을 바라봤다.
생존자들을 대표하던 이상아와 두 명의 남자가 싸우고 있는 모습.
‘숨어 있던 각성자가 한두 명이 아니군.’
눈앞의 남자까지 포함하면 최소한 3명.
하지만 그게 저들의 자신감이라면 이유가 되지 않는다.
‘각성자는 확실히 강하지만…….’
각성에 성공한 병사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신들의 힘을 체감하고 있었다.
처음 각성한 시점에서 극한까지 단련한 달인이나 다름없어지고.
레벨이 올라가거나, 장비를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인간의 한계조차 초월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총을 이길 정도는 아니야.’
부대에서 가장 강한 전사직 각성자인 전광일 상병조차, 총에 맞으면 치명상을 입는다.
언젠가는 맨몸으로 총알조차 튕겨 낼 수 있게 될지 모르지만, 벌써부터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가정은 두 가지.
하나는 상대가 그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총조차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각성자라는 것.
또 하나는…….
‘인질을 믿고 저러는 건가?’
군인들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
만약 그렇다면 곤란해진다.
인질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는 함부로 제압을 시도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뭐 하쇼?”
“……무슨?”
하지만 박권창은 인질을 잡기는커녕.
생존자들에게서 떨어져 군인들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안 멈추면 쏜다며. 안 쏘고 뭐 하시냐고?”
“…….”
오히려 쏠 테면 쏴 보라는 듯, 양팔을 넓게 펼치며 말을 잇는 박권창.
“크흐흐, 이제 갓 스무 살쯤 되는 애송이들이, 발포하겠습니다는 무슨.”
명백한 도발이었다.
‘인질이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가 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가능성이 큰 가설이다.
군인이라고 하면 강해 보이지만, 현역 장병들인 그들은 기껏해야 20대 초반의 청년들.
인간에게 총을 쏘기는커녕, 작은 쥐 한 마리 죽이는 것조차 무서워할 사람들이 부지기수.
하지만…….
‘너무 많은 일을 겪었지.’
그 대상이 인간이 되는 것은, 확실히 두렵지만.
생명체에게 총을 쏜다는 행위는 이제 익숙하다 못해 일상이 되어 버린 그들이었다.
“서수혁 상병님?”
“하. 짜증 나게.”
그렇게 중얼거린 서수혁 상병이, 곧바로 총을 견착했다.
그리고 큰 망설임도 없이 방아쇠에 손가락을 넣고, 당겼으나…….
기다리던 총성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
“……큭! 정말 망설임도 없이 쏘려고 하다니? 애송이라고 무시할 양반들은 아니구만.”
어째서인지.
총알은 발사되지 않는다.
의아함을 느낀 서수혁 상병이 직접 견착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역시 마찬가지.
“큭큭! 군인들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 생각 없이 일을 벌였을 리가 있나!”
아무리 각성자들이라고 해도, 총 앞에서 당당할 수는 없다.
신체 능력이 발달하고 기묘한 초능력을 얻는다고 해도, 아직까진 몸에 구멍이 뚫리면 죽는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박권창이 굳이 군부대에서 일을 벌인 이유 중 하나.
그는 자신의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각성자 : 박권창]
[직업 : 방화범 Lv. 5]
[능력치 : 힘 12, 민첩 8, 마력 10, 행운 4]
[특성 : 최하급 물리 저항, 최하급 화염 친화, 최하급 악행 지식, 최하급 마기 친화]
[스킬 : 최하급 화염 지배]
[최하급 화염 지배]
[주변의 화염 밑 화염과 관련된 현상들에 대한 지배권을 가진다.]
바로 이것이다.
“총이란 것은 결국은 화기! 탄약에서 폭발이 일어나야 쏠 수 있지. 하지만 모든 화염과 폭발은 내가 지배한다!”
수류탄과 같은 다른 무기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총이 없는 군인들은 결국은 일반인에 불과하다.
각성자인 그들이라면, 단 다섯 명이서 백 명을 지배하는 것도 쉬운 일.
‘며칠 동안 관찰했다. 이 녀석들은 괴물들을 잡을 때도 총만 썼지!’
각성자라면 귀찮게 그럴 이유가 없다.
박권창이 확신을 가지고 거사를 치르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자, 다들 무릎 꿇도록 해라. 말만 잘 듣는다면 나쁘지 않게 대우해 주지. 오히려 나와 비슷한 힘을 얻도록…….”
“뭐야, 그런 거였어?”
그러나.
그런 확신이 무색하게도.
“휴……. 괜히 쫄았네.”
“……뭐?”
군인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총기가 무력화된 이유를 알게 되자 한시름 놓았다는 느낌.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저쪽은 둘인가? 이쪽도 뭐, 두 명이면 되겠지.”
“굳이 그러지 말고 여럿이서 패죠?”
“저쪽에서 생존자 측 각성자도 싸우고 있어. 몇 명은 그쪽으로 가 줘야겠다.”
심지어 이제는 눈 앞의 권창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자기들끼리 무언가 떠들기 시작하는 모습까지.
“이 자식들이…… 지금 상황을 이해 못 했나 본데…….”
총을 못 쓴다는 걸 알면서도 당당한 모습에 당황했으나.
이내 박권창은 이유를 떠올렸다.
‘이곳엔 각성자가 없으니, 각성자의 힘도 모르는 거겠지.’
그렇다면 보여 주면 될 뿐이다.
단 1레벨만 되더라도 초인이라 불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박권창의 몸에서 불길이 차오르더니, 이내 온몸을 덮었다.
“본보기로 하나쯤은 죽어 줘야겠다!”
불길에 뒤덮인 괴인이 군인들을 향해 쇄도했다.
“그럼 저 녀석은, 한일이랑 대원이가 맡는 걸로.”
“그러지 뭐.”
“오랜만에 재밌겠구만.”
박권창이 한 명은 죽어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주먹을 휘두른 순간.
비교적 덩치가 큰 군인 두 명이, 앞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하하! 자살 지망자인가 보…….’
퍽.
‘어?’
눈앞에 검은 물체가 다가오는 듯 보이더니.
귓가에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뭐야 이 녀석.”
단 일격.
박권창은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다.
“엄청 약하잖아?”
“뭘 믿고 뻗댄 거야?”
쓰러지는 와중.
그런 소리가 들려온 것도 같았다.
“……우리가 너무 강해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