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대장장이 (1)
등의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고통에 쓰러지고 난 뒤.
“낯선 천장이다.”
“어? 눈 뜨셨습니까. 신 병장님.”
“……아. 있었냐.”
한 번 해 보고 싶은 말이었는데.
쪽팔리게.
눈을 떴을 때는 병실 같은 곳에 누워 있는 상태였다.
마침 주변에서 일을 보던 의무병.
사의준 일병이 나를 눈치채고 다가왔다.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어, 신기할 정도로 안 아프네.”
눈을 뜬 뒤 내심 신기하게 생각하던 부분이었다.
지난번에 격한 전투 후에 쓰러졌을 때와는 꽤 다른 느낌.
그때는 일어나자마자 엄청난 근육통에 시달렸었지.
‘오히려 상처는 지금이 더 심할 텐데?’
엄청난 격통에 기절했음에도.
살짝 불편한 느낌만 들 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가장 크게 다친 부분은 등이었을 터.
멀쩡하게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는 것도 신기한 일.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하하. 저도 레벨이 꽤 올랐으니 말입니다.”
“아하.”
과연.
그동안 성장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는 얘기다.
다른 부대원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그래도 실제로 상처가 완치된 것은 아니니까. 한동안은 누워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병가 낸 것 같아서 편하네. 그나저나.”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부대가 사용하던 거점은 관사.
이런 병실 같은 곳은 없었을 테니.
“여긴 탄약대대 내에 있던 의무실인가?”
“맞습니다.”
“부대 상황은 괜찮고?”
“예. 안 그래도 신 병장님 깨어나시면 좀 불러 달라고 이민재 병장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보고드릴 일이 많다더군요.”
“아, 그럼 좀 부탁하마.”
“옙.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의준이 녀석이 의무실 밖으로 나간 뒤.
나는 [상태창]을 열어 보기로 했다.
기절한 상태라 확인하지 못했던 문구가 눈앞을 가득 메웠다.
대부분은 경험치나 포인트를 획득했다는 문구들이었으나.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아라크론의 마지막 여왕, 카틀라냐를 처치하였습니다.]
[한 종족의 수장을 처치하였습니다.]
[업적 - 킹 슬레이어의 조건을 일부 달성하였습니다. (1/3)]
[업적의 부분 달성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 특성 강화권x1]
바로 이 보상.
특성 강화권이라?
[특성 강화권]
[가지고 있는 특성 중 한 가지를 ‘강화’합니다.]
[강화로 인한 효과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기회는 한 번뿐이니 신중하게 결정하세요!]
그 이름만큼이나 효과도 간단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
그중 하나를 선택해, 강화 할 수 있다는 것.
“흐음.”
난 내 상태창을 열어 정보를 확인했다.
눈여겨 볼 부분은 특성.
[특성 : 하급 단도 숙련, 하급 요리 숙련, 하급 식재료 감별, 하급 화염 친화]
특성의 강화.
이름부터가 강화시킨다는 내용인 만큼, 뭘 선택한다 해도 나쁜 부분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신중하게 정할 일이었다.
‘전투에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단도 숙련이나 요리 숙련이긴 한데.’
화염 친화야 이번에 목숨을 살려 준 스킬이긴 하다만.
평상시에 덕을 볼 일은 많지 않으니까.
싸움에서 빛을 발하는 건 내 칼질 실력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단도 숙련.
그리고 버프를 담당하는 요리 숙련.
하지만.
이 두 개 중에서 결정하는 게 맞는 걸까.
잠시 고민한 나는 결정을 내리고 말했다.
“강화하는 건. 식재료 감별이다.”
[‘하급 식재료 감별’ 특성을 강화합니다.]
[강화하시겠습니까? Y/N]
내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내 개인의 전투력은 사실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단도 숙련의 강화는 여기서 제외.
요리 숙련의 경우.
솔직히 가장 끌리는 부분이긴 했다만.
‘요리 실력은 내가 직접 끌어올리면 되니까.’
식재료 감별을 고른 이유는 간단하다.
최근 내게 요리 재료의 한계가 사라진 뒤.
식재료 감별은 사실상 제한 없는 감정 특성이나 다름없어졌다.
‘모든 걸 감별할 수 있는 특성.’
앞으로도 미지의 적들을 많이 마주하게 될 터.
그때, 상대의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이 특성은 요리만큼이나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식재료 감별이 강화된다면.
더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특성이 강화되었습니다.]
[하급 식재료 감별]
->
[식재료 감별(강화)]
그렇게 강화된 특성.
그러나.
“뭐가 바뀐 거야?”
당장 바뀐 점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다.
특성의 설명 문구도 그대로고.
……설마.
“이거 꽝인가?”
그때.
“영준아, 들어간다.”
방 밖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의준 일병이 데려온다고 했던 이민재 병장.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에게 인사를 하려던 순간.
특성이 발동했다.
[특성 - 하급 식재료 감별(강화)이 발동합니다.]
특성의 사용이 미숙한 탓일까.
가끔 이렇게 혼자 발동하곤 하는 특성.
그런데.
‘어?’
강화된 특성의 영향일까.
[식재료 감별]로 인해 눈앞에 나타난 문구.
그 내용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그 내용을 모두 읽은 뒤.
확신했다.
이건.
‘대박이잖아?’
* * *
민재 형이 방에 들어왔다.
“영준이, 괜찮냐.”
“뒈질 것 같아. 내가 죽는다면 다음 길드장은-”
“멀쩡한가 보군. 다행이다.”
나는 눈 앞에 나타난 [식재료 감별(강화)]의 문구를 치우고.
민재 형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엄청난 폭발이었다.”
“그야. 꽤 큰 탄약고였으니까.”
“솔직히. 난 너와 전사들이 영락없이 죽었을 거로 생각했어.”
이미 전투차량을 타고 피신했던 후열의 병사들.
그들은 폭발의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한참을 떨어져 있는 장소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폭발.
“나중가서 확인해 보니. 그 거대하던 탄약고 자체가 통째로 터져 버렸더군. 그 파편이 탄약대대 건물 몇 곳을 부숴 버리지 않나. 난리도 보통 난리가 아니었지.”
“…….”
“우리를 사냥하기 위해 몰려 왔던 다른 거미들도. 그 폭발에 말 그대로 녹아내렸더군.”
생각해 보면.
폭발로 인한 열기야, 어느 정도 멀어진 상태에다가 [하급 화염 친화]로 견뎌 냈지만.
그 파편 중 하나라도 내 몸에 닿는 순간.
난 순식간에 사망했을 테지.
‘이번엔 운 좋게 살아서 다행이지만. 진짜 죽을 뻔했다는 건가.’
아무튼.
내 부상이 워낙에 심각하다 보니, 오랫동안 기절해 있는 사이.
부대원들은 꽤 바빴던 모양.
‘폭발로 인한 화재를 진압하고, 소리를 듣고 몰려든 괴물들을 처치하고.’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영화 한 편은 찍어도 될 것 같은 분량의 격렬한 사건들이 있었다고.
“이제 막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참이야. 정말이지, 사망자가 없어서 다행이다만. 앞으로는 이런 위험한 작전은 되도록 자제해라.”
“그래야지. 나라고 딱히 죽고 싶은 건 아니니까.”
“네가 죽으면 우리 부대의 전력은 급감해. 그걸 잊지만 말아다오.”
이번에는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도박을 걸었을 뿐.
이런 미친 짓을 또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말인데.
”응?“
”네가 누워있는 동안. 이 탄약대대를 새로운 거점으로 쓰는 게 어떤가, 하는 얘기가 나왔다.”
“여기를?”
보고가 시작됐다.
“관사는 결국 임시거점이니까. 주변에 너무 오픈되어있기도 하고. 지금 인원수만으로도 반쯤 포화 상태였지.”
“이왕 점령했으니 탄약대대를 새 거점으로 삼자는 건가.”
“그런 셈이다. 이번 폭발로 부서진 건물들도 많기는 하다만. 그 건물만 안 쓰면 그만이니까.”
관사는 어디까지나 임시거점이었으니.
떠나는 건 문제가 없다만.
“면적이 너무 넓은 거 아니야?”
탄약대대는 지나치게 넓었다.
우리 부대원들만으로 이 넓은 부지를 다 방어할 수 있을지.
“일단은 활용할 수 있을 정도의 면적만 거점으로 삼고 공병들이 장벽을 세우는 식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흐음.”
“더 넓은 영역을 방어할 수 있겠다 싶으면 그때 더 넓은 면적에 장벽을 세우면 그만이니까.”
슬쩍 창문 밖을 내다보는 민재 형.
“탄약대대 내부에는 물이 흐르는 냇가도 있더군. 올 때도 봤지만 입구 근처에는 논밭도 있고. 식수 확보도 가능한 데다가, 잘하면 농사도 지을 수 있어. 나는 나쁘지 않다고 보는 편이다.”
“농사라.”
“얼마 전에 눈을 뜬 탈영병 중에 농사에 유독 관심이 많은 녀석이 하나 있더군. 시도는 해 봐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공병들이 강화된 자재들을 얻었을 때, 장벽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느니 하는 얘기를 했었지.
“그렇게만 된다면. 흠. 괜찮겠는데?”
“길드장 허가만 떨어진다면. 관사의 물자들을 천천히 옮기려고 하는데.”
민재 형의 얘기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해 보았다.
‘요새를 소환할 수만 있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을텐데.’
각성 초기에 얻은 특전, [기동요새 비마나]
이 녀석을 소환할 수 만 있다면, 거점으로 고민할 필요는 없겠지만.
‘안 되는 일에 미련을 가지는 것도 좋지 않지.’
아쉽게도.
[기동요새 비마나]는 아직까지도 소환할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
요새를 뒤로 밀어두고 생각해 본다면.
확실히, 이 곳은 괜찮은 거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자고.”
“좋은 선택이야. 애들한테도 전달해 두마.”
보고는 그 외에도 계속되었다.
“일단은 탄약대대를 정리하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포탄, 탄약들은 따로 모아서 정리 중이야. 가장 큰 탄약고가 폭발해 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이지.”
“당분간 탄약 걱정은 없겠네. 사수 녀석들은 좋아 죽겠어.”
“군용 차량이나 박격포 같은 것도 몇 개씩 노획했다. 공병 녀석들이 가져갔으니 조만간 쓸 만한 물건들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장갑차 같은 건 없어서 아쉽지만.”
“오.”
그건 좀 기대가 되는걸.
전투차량만 해도 꽤 활약했으니.
그리고 내게 중요한 보고는 다음 녀석.
“다른 탄약고들을 열어 보니 아직 부화하지 않은 알들도 꽤 있더군. 혹시 모르니까 남은 알들도 처리하는 쪽으로 진행하려고 하고 있다.”
“어? 남은 알이 있다고?”
“음. 괴물들이 튀어나오진 않는 것 같지만 일단은. 그건 왜?”
알이라니.
그건 못 넘어가겠는데.
“그 알들, 굳이 깨트리진 말고 잘 보관해 달라고 전해 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내가 생각하는 그 이유냐?”
“아마도.”
“…….”
한숨을 내쉬는 민재 형.
아직까지 부화하지 않은 걸 보면.
알을 깨고 나온 괴물들보다도 수정이 덜 됐다는 뜻.
즉.
“그냥 계란같은 느낌일 거 아냐?”
새로운 식재료다.
한 번, 요리는 해 봐야 하지 않겠어.
“하아. 먹을 때는 맛있게 먹겠는데, 재료의 정체를 들을 때마다 머리가 어지럽군. 거기에 이제 거미 알까지 추가된다고?”
“맛만 좋으면 된 거지 뭐.”
기겁하는 민재 형.
나는 그 얼굴을 보며 가볍게 웃어 주었다.
* * *
그 외에도 몇 가지 보고가 이어졌다.
내가 누워 있는 동안 식량은 어떻게 해결했다던가.
뭐 그런 것.
“당장은 마트에 구한 라면 같은걸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만. 병사들의 불만이 많아.”
취사병이 빨리 복귀해 달라는 말이 많다고.
솔직히 조금은 뿌듯한 소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번에 우리가 싸운 거미 괴물들, 상처 입은 상태였다는 건 너도 눈치챘겠지?”
“그렇지.”
거미 괴물들.
강하긴 했지만, 상대할 만했다.
이유는 간단.
‘성체는 얼마 없고, 그나마 있는 성체들도 크게 다친 상태였으니.’
심지어 여왕마저 그러했을 정도.
“그 이유를 알아냈다.”
“어? 어떻게? 아니, 이유가 뭔데?”
“그건 네가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민재 형.
그가 내게 건넨 것은.
“공책?”
“보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 거다. 내 입장에선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너라면 이런 걸 중시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마치는 민재 형.
“그럼, 보고는 일단 이 정도고. 혹시 필요한 거 있냐? 일단 개인 물품은 다 옮겨 놨다만.”
“음. 당장 떠오르는 건 없네.”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말하고. 지금은 푹 쉬어라.”
보고를 끝낸 민재 형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을 까먹었네.”
문을 닫고 나가기 전.
갑자기 발을 멈추는 민재 형.
“고생 많았다. 대장. 다른 녀석들도 네게 고마워하고 있어.”
“고생은 무슨. 군 생활이란 게 원래 다 같이 뺑이 치는 거지.”
“그런가?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다만. 다들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둬라.”
“예입.”
피식 웃으며 병실을 떠나는 민재 형.
사람이 떠나자.
병실이 급격하게 조용해졌다.
‘……심심하네.’
앞으로 부대의 일이 어떻게 될까, 걱정되는 것도 있기야 하지만.
휴식을 취해야 하는 상황에 걱정해 봐야 의미 없는 일.
어쨌든 휴식을 취하고 치료하는 게 중요하니까.
눈이라도 한번 감으려고 침대에 몸을 누이려던 찰나.
“아.”
민재 형이 두고 간 공책이 보였다.
괴물들의 상처.
그 원인을 알아냈다고 하며 건넨 책.
어차피 할 일도 없겠다.
나는 그 공책을 펼쳤다.
대충 아무 페이지나 펼친 뒤 내용을 보았다.
-X월 2일 (목)
-신병 다섯이 전입.
-이길우 상병과 파견 경비중대 병사 간에 마찰이 있었으나 원만하게 해결됨.
‘?’
슬쩍 노트의 표지를 봤다.
병영 일기는 아닌 거 같은데.
부대의 일이 적혀있는 노트.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있나? 싶어졌으나.
누가 쓴 것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신병 다섯과 대대장 면담을 거침. 다들 문제는 없다고 말했으나 둘은 ‘괴롭히는 선임이 있느냐.’는 질문에 석연치 않은 눈치를 보임.
‘대대장이었구나.’
아무래도 부대에서 있던 일들을 까먹지 않기 위해 기록해 놓았던 듯.
다음 페이지를 넘겨도 부대의 대소사가 적혀 있었다.
‘잠깐, 그러면.’
나는 노트의 페이지를 빠르게 넘겼다.
찾는 일자는 당연히도 하나.
‘괴물이 나타난 날. 주말이었지 분명?’
그 날짜의 기록을 펼치자.
X월 4일 (토)
-강아지 산책을 위해 부대를 돌아다니던 중 괴생명체의 습격을 받음.
-거대하고 새하얀 거미 같은 형태, 칼날 같은 거대한 앞발을 지니고 있으며, 크기는 중형차 정도.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됨. 모든 연락 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
-대다수의 장병이 전사.
역시.
이들도 우리와 같은 일을 겪었나 보다.
“이 대대장님은 부대에 있었던 건가.”
주말이었지만.
부대에서 기르는 개의 산책을 위해 부대에 출근했던 모양.
그 와중에 사달이 난 것이다.
-전사자 목록
.
.
.
-행방불명자 목록
.
.
.
밑에는 무수히 많은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들의 목록.
“…….”
그 순간부터.
나는 몰입해서 페이지를 넘기기 시작했다.
괴물들에 의해 습격당한 뒤.
탄약대대 역시 저항을 시작했다.
파견 나온 경비중대 병사들과 합류하고.
탄약고를 개방하고…….
건물 몇 곳을 거점 삼아 방어에 들어가는 등.
우리와 비슷한 양상의 방어였으나.
-금일 전사자는 2인. 중상자 3인. 경상자 매우 많음.
각성법을 금방 깨닫고 병력의 질을 높였던 우리와 달리.
이들은 전원이 평범한 군인들.
매일같이 사망자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사망자 숫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X월 12일 (일)
-동쪽 초소를 방어하던 병력들이 무단으로 탈주.
-탈주 과정에서 탈주병들 역시 대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보임. 살아서 탈출한 생존자가 있을지는 알 수 없음.
-방어망에 구멍이 생기며 동쪽 건물의 지배권을 빼앗김.
-식당이 있던 건물. 빠른 대처로 사망자는 없었으나, 식량을 잃은 피해는 뼈아프다.
‘그 탈영병들이다.’
우리가 만났던 그 탈영병들.
녀석들의 탈주가 큰 분기점이었다.
간신히 버텨 오던 방어선이.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방어는 힘들다.
대대장 역시 그런 생각을 한 듯.
공책에 적힌 내용은 대부분 덤덤한 어투로 적혀졌으나.
거기선 짙은 절망감이 느껴졌다.
“……쯧.”
가슴이 답답해졌다.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그 많은 사람이 죽어 버렸단 건가.
‘그 새끼들. 너무 편하게 죽게 만들어 줬나?’
그런 생각에 우울해지려던 찰나.
“아직. 페이지가 남았네.”
절망에 빠진 것과는 별개로.
대대장은 기록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던 중.
지금까지와 달리 급한 글씨체로 적혀진 페이지가 나왔다.
묘하게 흥분한 듯한 필체로 적혀진 내용은.
X월 15일 (수)
-상병 이길우의 보고.
-괴생명체들의 갑각이 열에 약한 것 같다는 추측.
-우연히 발견한 사실이나, 정황상 신빙성은 높다.
“……!”
열기.
‘아라크론의 흰거미’들의 약점이다.
그걸 파악하는 데 성공한 건가.
-더 이상 방어선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
-그러니.
-역습에 나선다.
괴물들에게 포위된 부대.
탈영으로 인해 돌파된 방어선.
매일같이 죽어 나가는 병사들.
식량까지 고갈되어 가는 상황.
모든 것이 절망적인 이때에도.
탄약대대의 군인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병사들을 총동원한 대규모 작전을 수립.
-성공 시, 포위 중인 괴생명체들을 돌파하고 부대를 탈출할 수 있을 가능성이 큼.
-실패하더라도 괴생명체들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결행은 내일.
이제 남은 것은 한 페이지.
거기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X월 16일 (목)
-필사즉생 행생즉사.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죽어 주지는 않겠다. 개같은 거미 새끼들.
“…….”
상처를 입은 여왕과 성체들.
미묘하게 적은 성체 괴물의 숫자.
그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던 거야.”
어떤 식의 작전을 펼쳤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저항이 아주 유효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괴물의 숫자를 크게 줄이고, 적들의 여왕에게까지 치명상을 입힐 정도로.
거기까지 읽은 나는 슬쩍 공책을 닫았다.
탄약대대를 찾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탄약의 확보.
또 하나는.
‘군인으로서. 다른 부대가 어떻게 전멸했는지 확인하고. 탈환하기 위해.’
목표는 달성했다.
그들이 어떻게 전멸했는지.
그 과정은 모두 확인했으니까.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고 저항한 군인들.
결국에는 전멸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죽음은 결코 개죽음 따위가 아니었다.
“괴물의 숫자가 조금이라도 더 많았다면…… 아니, 그 괴물들이 상처 없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우리의 탈환 작전은 실패할 가능성이 컸겠지.”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그건 이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해 준 덕분일 테니.
‘……일이 안정되는 대로, 장례를 치러 주자.’
이들은 그럴 만한 용맹을 지닌 이들이었으니까.
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많아지는 날이었다.
* * *
그 후로도.
난 며칠은 병실 신세를 져야만 했다.
영 할 게 없는 침대 생활.
근처에 뭔가 없나 하고 시선을 돌리던 중.
침대 옆쪽에 쌓여 있는 물건들이 보였다.
“아, 내 개인 물건들.”
그러고 보니.
민재 형이 가져다 놨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옷가지.
책.
잘 쓰지는 않지만 일단 가지고는 있는 권총까지.
망가져서 수리를 위해 가져갔다는 군복을 제외하면 내 물건들은 얼추 다 있는 것 같은데.
한 가지.
유독 걱정되는 물건이 있었다.
“설마.”
내 군장 가방 안에 들어 있던 물건을 하나 꺼냈다.
조악하게 만들어진 칼집.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사시미칼 한 자루.
‘후임 녀석에게 빌려서, 지금까지 애용했던 칼.’
빌린 물건임에도 불구.
묘하게 손에 착착 감기는 탓에 참 유용하게 써왔다만.
이번 전투.
상당히 무리하게 다뤄 버렸던 게 마음에 걸렸다.
불안감이 앞서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며 칼집의 칼을 뽑아 보았으나.
“……뭐. 이럴 것 같기는 했지.”
칼날은 원래의 날카로운 형태를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찌그러져 있었다.
손잡이 부분은 다 타 버린 듯하고.
“이거 뭐. 어디 마교 같은 곳에서 제사용으로 쓴다고 해도 믿겠네.”
요즘 칼들이 어지간한 고열에 버틸 수 있게 만들어진다고는 하지만.
고열에 약하다는 여왕을 베기 위해 끌어 올린 온도는,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었다.
베고 찌를 때까지야 어떻게든 형태와 예기를 유지했다지만.
그 후에 형태가 완전히 일그러지는 것까지 버티지는 못한 모양.
“빌린 물건치고 오래 쓰긴 했지.”
이제는 바꿔야 할 때가 온 걸지도 모르겠다.
상점에서 식칼이라도 구매해야겠다 생각하며 넘어가려 했는데.
그로부터 며칠 뒤.
상처가 전부 아물고.
슬슬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쯤.
“그 칼, 내놔라.”
“예?”
누군가가 그런 말을 해 왔다.
산맥에 있을 적, 우리 부대를 찾아왔던 생존자 중 한 명이자.
얼마 전에 각성함으로써, 우리 부대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인물.
“그 칼, 참고용으로 쓰게. 내놓으라고.”
박씨 할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