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취사병-165화 (165/227)

165화 밤의 귀족 (3)

신영준이 자신의 권속에게 건 제한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죄 없는 인간을 권속으로 만들어선 안 된다.

두 번째는, 권속의 숫자는 100으로 제한한다.

후자의 제약을 건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많은 권속들을 휘하에 둘 경우.

그 병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피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즉.

반대로 말하면.

“유지할 생각이 없는 병력이라면 상관없는 것 아니겠느냐?”

-정말이지 현명하신 말씀……! 저희 따위는 얼마든지 쓰고 버려주시길!

어두운 밤.

한때는 인간들의 것이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녹색갈기 부족의 부락이었던 건물들.

그 중심의 빌딩 옥상.

아리엘라는 그림자로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부족의 주술사였던 하카진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빌딩 아래의 지상.

그곳에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구의 전사들이 있었다.

그 숫자는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백.

전투를 숭상하며, 누구보다 자존심 높은 전사들.

그들이 아리엘라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인간조차 아닌 괴물들이라면 권속으로 만드는 데에 제한도 없지.”

권속들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피?

다른 녹색갈기의 것으로 충당하면 그만이다.

그렇게 권속을 늘릴 때마다.

아리엘라의 힘은 더해져만 간다.

승작을 거친 지금.

권속을 늘릴 수 있는 양도 과거에 비해 배는 늘어난 상황.

감당하기 힘들어질 정도로 늘어난 권속들은 전투를 통해 빠르게 소모.

그녀의 힘은 점점 더해져 가고.

녹색갈기 부족의 힘은 점점 깎여나가는 작전이었다.

“후후……. 처음 제안할 때만 해도 이렇게까지 잘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늘.”

솔직히.

지금의 성공은 그녀 스스로도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큰 세력을 이룬 이들은 그 세력을 관리하기 위한 체계도 마련되어 있기 마련.

이들도 뱀파이어의 준동을 빠르게 눈치채고 대응에 나섰어야 마땅했으나.

“정말 짐승 같은 종족이로구나. 내부를 이렇게까지 방치하고 있을 줄이야?”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 일원이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따름!

이들은 그 체계라고 할 만한 것이 너무나도 미흡했다.

엄청난 숫자를 바탕으로 한 정복 전쟁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나.

그렇게 확보한 넓은 영토.

그 관리까지 잘되고 있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는 것.

‘주인님의 동료라는 자가 시야를 가려 준 덕이 크겠지.’

본래라면 내부의 우환을 알아내는 것은 주술사들의 역할이나.

신영준 병장의 부탁을 받은 박태준 병장이 활약.

주술사들의 예언은 안개 속에 갇혀 버렸다.

‘주인님이 나를 토벌하는 데 성공한 것도 우연은 아니란 거지.’

그리고.

그런 신영준이 그녀의 활동을 보조한 결과.

그녀의 침공은, 상상 이상의 성과를 이루고 있었다.

* * *

-12, 18, 20번 군락 역시 연락이 두절되었다.

-18번 군락이라면 식량 창고로도 쓰이던 중요 거점 아닌가!

-상당한 전사들이 자리 잡고 있었을 텐데?

-그런 걸로 따지면 이미 함락된 곳들도 마찬가지지.

녹색갈기 부족의 점령지 중심부.

한때는 군청이라 불렸던 장소에서, 거구의 괴물들이 언성을 높인다.

그러던 중.

-크륵……!

거구의 전사 하나가, 분을 참지 못하고 짐승 울음소리를 냈다.

쿵!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단 말이다!

아리엘라가 녹색갈기 부족의 영역에서 활동을 시작하고 10일이 지난 지금 와서야.

그들은 그녀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부족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자리.

고위 전사들과 주술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후방에 나타난 괴물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피해가 상당하다. 우리 점령지의 10%는 이미 통제를 잃었다고 봐야겠지.

-으음. 고작 열흘 만에 이렇게 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적은 아무래도 정신 지배에 특화된 존재인 것 같더군.

-뭐라?

-진상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전사들은 그곳에서 동족의 공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 말에.

주술사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정신 지배라니.

-대주술사님조차 쉽게 시전하지 못하는 최고위 주술이 아닌가.

-으음……. 이곳은 우리가 있던 곳과는 다른 세계이니, 그런 이능을 아무렇지 않게 다루는 존재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만한 존재가 이렇게 빠르게 등장한다는 것은, 명백한 이변.

-지난번 전쟁의 패배도 그렇고.

-지나친 악재로군…….

자리에 모인 모두가, 정체불명의 적에 대해 경계심을 품었다.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그 중심에 앉아있던 거인.

부족의 대전사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 저런 존재와도 싸우게 되리란 건 이미 알고 있던 것 아닌가.

-흐음. 예정보다 조금 빨라진 것은 사실이나…… 틀린 말은 아니구려. 대전사.

대전사의 옆에는 늙은 오르크 하나가 앉아 있었다.

안 그래도 메마른 몸이 대전사의 옆에 있으니 더욱 왜소해 보였지만.

그 직위마저 왜소하지는 않았다.

부족의 대주술사.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한 적들이 나타난다.

이미 고향을 버리고 도망쳐 온 우리는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렇기에,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빠르게 영토를 넓히려고 한 것이었다만.

오르크 족은 대지의 정령과 교감함으로써 힘을 쌓는다.

영토가 넓어질수록 부족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

그렇기에, 다소 급하게 정복 전쟁을 수행해 왔던 것이었으나.

-설마하니 내실을 다지지 않은 것이 문제를 일으킬 줄은.

대주술사는 턱을 쓰다듬으며 침음성을 흘렸다.

-방법은 하나밖에 없겠소. 대전사.

-쯧.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대전사.

그 모습을 본 주술사가 다른 이들을 보며 물었다.

-다음 침공 준비는 얼마나 돼 가고 있느냐?

-전사들의 소집은 거의 완료된 상태입니다. 토착종들의 요새와 그 요새를 지키고 있다는 수호자들에 대한 대비만 끝난다면, 곧바로 침공을 나서게 될 것으로-

-그렇군. 그렇다면 그 전사들에게 전하라.

-예.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후방으로 복귀하라.

-……!

지난번 그들을 패배시킨 토착종의 요새.

그 요새를 확실히 함락시키기 위해 모여있던 병력들을.

모조리 복귀시키라는 것이었다.

-허면. 그 토착종들의 요새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 대전사님이 직접 나서서 놈들을 징벌하실 계획이었던 게……!

-예상보다 빠르게 강적이 나타났다. 아쉽지만 놈들에 대한 정벌은 뒤로 미뤄야만 하겠지.

대주술사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말했다.

-토착종들을 함락시키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일이다.

-……!

-반면 저런 존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나타날 테지. 연습 상대로는 제격 아닌가.

그렇게 말을 하긴 했으나.

대전사 역시 지금의 상황에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흥. 내 힘만 완벽했다면 굳이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을.

대전사와 대주술사 역시, 본래라면 아직은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인 강자들.

하지만.

평균 수명이 짧은 녹색갈기 부족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남아 높은 지위에 오른 그들의 경험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

-……허허. 대전사께서는 말을 조심히 할 필요가 있겠소. 자칫하면 우리의 주술을 탓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으니.

그렇기에.

주술사들은 그들의 몸에 쇠약의 저주를 걸었다.

해주가 불가능한 저주를.

덕분에 전성기보다 약해졌을지언정.

그들은 봉인에서 벗어나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 된 것.

-아주 틀린 말은 아닐 텐데? 해주가 불가능한 저주라니.

-……크륵.

-주술사들의 능력이 충분했다면, 해주 또한 가능했어야 정상 아닌가.

-……핏덩이같이 어린놈이, 감히-!

대주술사가 어금니를 보이며 분노했으나.

-……허허. 불가능한 일을 가지고 난리 치는 것만큼 추한 일은 없소. 젊은 대전사여.

-흥. 싱겁기는.

그는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줄 아는 연륜을 지닌 존재였다.

-병력이 준비되는 대로 내가 직접 토벌에 나서겠다. 적은 하루가 다르게 우리 전사들을 감염시키며 군세를 늘리고 있지. 최대한 빠르게 토벌한다.

-흐음. 나는 저 군세의 강함이 조금 납득가지 않는구려. 균형을 벗어난 강함……. 어쩌면 뭔가 약점을 지니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대전사는 토벌을 준비하는 데 집중하시오. 나와 주술사들은 놈의 약점을 파헤쳐 볼 테니.

영토 확장에 치중되어 있던 부족의 힘.

그 힘이, 내부의 적을 향해 집중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 움직임을, 박태준 병장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당 : 아무래도 영준이가 말한 방법이 통한 것 같은데.]

[마법청년 : ……! 정말이냐?]

얼마 전.

신영준 병장은 길드 메시지를 통해 한 작전을 전달해 왔다.

자신이 모종의 방법으로 녹색갈기 부족의 후방을 교란해 보겠다던가.

그런 얘기.

그리고 지금.

그 ‘모종의 방법’이 통한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

그 메시지를 접한 부대원들의 반응은 간단했다.

“……이게 왜 되지?”

그도 그럴 것이.

처음 신영준 병장의 얘기를 들었을 때.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시지?’ 정도의 반응이었다.

“신 병장님은 지금 양구군 쪽으로 진출해 계신 거 아닙니까?”

“그렇지.”

“그리고 적들의 후방이면. 아마 철원군 쪽일 텐데.”

“……그러니까 말이다.”

적의 후방은커녕.

군단의 본진보다도 녹색갈기 부족과 떨어진 장소에 위치해 있을 신영준 병장.

그가 무슨 수로 적들의 후방을 교란했다는 말인가.

“그렇다고 박태준 병장님이 거짓말을 하셨을 리도 없고.”

“이번엔 또 무슨 방법을 쓰신 거야?”

길드 메시지를 본 모든 부대원들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괴물들이 먹는 음식에 독을 탔나?”

“그러려고 해도 말이지. 일단 물리적으로 거리가 안 되잖아.”

“혹시 모르지. 신 병장님쯤 되면 축지법 같은 것도 쓸 수 있을지도.”

“축지법이라니. 여기가 북쪽 나라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말이 안 될 것까지 있나. 마법사들이라면 나중에 텔레포트 같은 건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신 병장님은 이미 무슨 아공간 같은 것도 사용하시잖아. 그걸 감안하면, 흠.”

“……진짜 축지법인가?”

온갖 허무맹랑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짐작이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설마…….’

이민재 병장이 슬쩍 서수혁 상병을 바라보자.

그 역시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

‘역시. 그 뱀파이어를 보낸 건가.’

자신들의 전우를 죽이기까지 했던 적.

아직도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쓸모가 있다는 점 하나만큼은 확실하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었다.

그 녀석이 권속으로 삼고자 제거한 약탈자들의 숫자만 해도 상당하다.

그것만으로도 근처의 치안 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런 짓까지 가능할 줄이야.’

벙커에 있을 적의 뱀파이어는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게 절실히 체감됐다.

‘아니. 그 상태의 뱀파이어도 영준이가 아니었으면 토벌할 수 없었겠지.’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서자마자.

저 거대한 세력을 움직이게 할 정도라니.

새삼 신영준이 저 뱀파이어를 굴복시킨 것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유용한 건 유용한 거고.’

여전히 그 뱀파이어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뱀파이어가 활약하고 있는 지금.

인간들이 밀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뭐가 됐든 간에, 영준이의 작전이 성공했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예?”

“다음은 우리가 일할 차례다.”

아무리 많은 숫자를 자랑하는 적이라고 한들.

그 병력이 후방에 집중 중이라면.

전방에는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다.

“신 병장님이랑 전광일 상병이 없는 게 조금 걸리긴 합니다만.”

“나도 그렇긴 하다만…… 슬슬 한 번은 보여줄 때도 됐거든.”

“?”

“영준이 녀석이 키운 우리 군단이, 얼마나 쓸모 있게 변했는지.”

이 찬스를 놓칠 이유 따위.

어디에도 없다.

“요새의 방어는 용아병과 소수의 병사들에게 맡긴다.”

“그 말씀은.”

“나머지는, 지역 탈환 작전을 준비하라고 전하도록.”

“……!”

부족이 병력을 후방으로 돌리고 있을 때.

“다들 장비 챙겨!”

“군장에 장난질 치다 걸리면 나중에 식사 대신 통조림 하나 주고 끝낸단다! 다들 주의하도록!”

“전차에 넣을 기름 좀 가져다 주십쇼!”

“저번에 양구군 다녀온 상인한테 받은 기름이 꽤 많으니, 그걸로 어떻게든-”

“저 절이랑, 근처 각성자들한테도 협력 요청 돌린다!”

군단은 진군 준비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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