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밤의 귀족 (4)
내가 수인들의 봉인을 강제로 해제하고.
벌써 4주의 시간이 지났다.
“정말 저들과 함께 갈 생각이시오, 사매?”
“은인께서 우리 사형제들을 깨워 주기로 약속하셨으니, 나는 그 은혜에 대한 도리를 다해야지.”
그동안.
이곳에 있던 부대원들은 서환을 통해 무예를 전수받았다.
“거기에. 은공의 무예는 아직 완벽하지 않으니. 내가 계속해서 지켜봐야 할 것 같구나.”
“끄응.”
조금 복잡해졌던 내 일정도.
일단 대충은 마무리가 되었고.
그러니 이제.
게이트를 나가, 부대에 복귀해야 할 때가 왔다.
“뭐.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곳은 우리에게 맡겨 주쇼.”
“언제든지 돌아오실 수 있도록. 지키고 있겠습니다.’
이 게이트…….
천산 무관은, 저칠과 우진이 지키고 있기로 했다.
이미 우리 길드에 가입한 것으로 처리된 서환과 미호는, 나를 따라 우리 부대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들은 트레이너 NPC.
군단 병사들의 교관 역할을 맡아 주게 되겠지.
“그럼…… 가시지요.”
“음. 조금 서둘러야겠는데.”
“서두르다니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은공.”
미호와 서환의 말에.
나는 허공에 떠 있는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도배되고 있는 메시지.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이가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요리사의 명성이 퍼져 나갑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당신의 식사를 대접받은…….]
[요리사의 명성이…….]
[경험치를…….]
나는 기본적으로 요리사다.
어쩌다 보니 전투도 꽤 자주 치르고는 있다만.
경험치 수급처 역시, 일단은 요리.
내 요리를 먹은 이가 어떤 방면에서 활약을 할 경우.
내게도 경험치가 주어지는 것.
그리고.
지난 3주간, 내 몸 안에는 계속해서 경험치가 쌓이고 있었다.
저기서 말하는 ‘활약’은, 몬스터 한 마리를 죽이는 정도로는 해당하지 않는다.
최소한 다섯 마리 이상은 잡고 나서야 발생하는 문구.
그렇게 해야 얻을 수 있는 경험치가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아무래도. 저쪽은 조금 바쁜 것 같거든.”
한없이 치열한 전투가.
매일같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
* * *
-크뤄어어어어어어억!!!
철원군.
녹색갈기 부족의 전사가 괴성을 내지르며 무기를 휘둘렀다.
-크뤄어억!
그리고 그에 맞서는 것은.
그와 매우 닮은 모습을 한, 또 다른 녹색갈기의 전사.
차이점이 있다면.
이쪽의 눈은, 핏빛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쿠웅!
-크륵, 커, 크허어…….
두 전사의 결투.
승자는, 붉은 눈을 지닌 쪽이었다.
-형제여! 어째서 우리를 공격하는가!
-저자는 이미 우리 형제가 아니다! 죽여라!
결투에서 승리한 붉은 눈의 전사 역시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동료의 죽음을 본 전사들이 우르르 달려든 결과.
뱀파이어의 몇 안 되는 약점인 심장을 쪼개 버렸기 때문.
‘이런 전투가 벌써 며칠째란 말인가.’
가까스로 적 하나를 처치한 녹색갈기의 주술사가 생각했다.
녹색갈기 부족이 뱀파이어의 존재를 눈치챈 뒤.
최근 이 근처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끌 일이 아니었을 텐데……!’
아무리 뱀파이어들이 강하다고 한들.
부족이 가진 숫자의 힘은 엄청난 것이다.
그 전력을 모두 동원한 토벌전.
본래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적이라도 지금쯤이면 토벌이 되었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의외의 변수가 발생했다.
‘갑자기 개입한 그 토착종들만 아니었어도……!’
그들과 영역을 마주하고 있던 토착종의 세력들.
놈들은 마치 부족의 사정을 훤히 알고 있다는 듯.
뱀파이어 토벌을 위해 후방으로 집결한 순간.
부족의 영토를 공격해 들어왔다.
‘마치 시기를 맞춘 것처럼!’
물론.
저런 엄청난 거악과 나약한 토착종이 아군일 리는 없는 일.
그저 운이 나쁘게 그들의 후방에 거악이 나타났으며.
거기에 악운이 겹쳐진 결과, 우연히 토착종들이 반격을 시작한 것이겠지만…….
‘버겁다.’
그 결과.
부족이 싸워야 하는 적은.
뱀파이어뿐만이 아닌 상황이 되어버렸다.
“옴마니반메홈 옴마니반메홈…….”
“옴 아모가 바이로차나…….”
“뒈져라, 마두야!”
콰직!
불경을 읊으면서 적의 머리통을 거침없이 으깨 버리는 중들.
얼마 전, 군단과의 동맹을 맺은 뒤.
녹색갈기 부족과의 싸움을 지원하겠다 약속한 이들.
“아미타불!”
묘양사의 무승들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장비들이로군요.”
“승주 스님의 말이 맞습니다. 동맹을 맺으면 장비를 지원해준다 했을 때는, 무슨 의미인가 했습니다만…….”
과거에는 상점산 장비로 무장하고 있던 그들이었으나.
지금.
그들은 평범한 승려처럼 잿빛 가사를 입고 있었다.
물론.
평범한 가사는 아니었다.
[중급 재봉사의 잿빛늑대 가죽 가사]
마수의 가죽으로 만들어져, 어지간한 철판보다도 단단한 것은 물론.
활동성 면에서는 비교조차 안 되는 물건.
특히 이 장비를 만든 이상아는 활동성에 집중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후웅.
녹색갈기의 전사가 휘두르는 무기를 가볍게 피하고.
콰직!
“이토록 움직이기 편할 줄이야!”
“허허! 갑옷을 입고 활동할 때와는 비교조차 안 됩니다그려!”
흉흉하게 생긴 철봉과 철곤으로 머리통을 으깨는 승병들.
그 움직임에는, [항마승병무예]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잿빛의 가사는, 승병들이 무예를 펼치는데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설계된 물건이었다.
“뭐, 뭐야, 저 스님들은.”
“스님들이 저렇게 강하다니. 무슨 소림사도 아니고. ”
그 모습을 멀리서 당황스럽게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군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중인 춘천의 각성자들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그거 들으셨습니까.”
“?”
“저 괴물들 머리 하나당 전투식량 5개 준다는 거.”
“……스님들한테 질 수는 없지. 우리도 갑시다!”
한 명 한 명은 아직 그렇게까지 강해지지 못했으나.
그 숫자만큼은 상당했다.
그리고.
그들이 힘을 합쳐 하나의 부락을 공략할 때.
“아……. 좌로 30도.”
끼이익…….”
“풍향 좋고. 각도 좋고…… 발포!”
콰아아아아앙!!!
군단의 전차가 포화를 발하자.
녹색갈기 부족이 세워둔 방어벽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방어시설 무너졌다! 돌입!”
“군단의 승리를 위하여-!!!”
무너진 틈을 향해 전진하는 군단의 병사들.
안 그래도 일대의 세력 중에서도 최강을 자랑하는 이들이다.
거기에…….
[군단의 기운]
[같은 기운을 지닌 이들이 일정 이상 모여 있을 시 시너지 효과가 발휘됩니다.]
[전쟁 노래]
[같은 세력에 속한 이들이 동시에 군가를 부름으로써, 광역 피어를 형성합니다.]
모이면 모일수록 높은 효과를 발휘하는 길드 스킬들.
엄청난 양의 버프가 그들의 몸을 뒤덮었다.
* * *
본래라면.
각성자들의 세력 하나하나는 녹색갈기 부족의 상대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힘을 합친 것은 물론.
-이렇게 사방에서 몰려오다니……!
북방, 철원군에서 몰려오는 뱀파이어들.
서방, 묘양사의 무승들.
남방, 춘천시의 각성자들.
동방, 군단의 병사들.
한 곳도 아닌.
전방위로 몰려오다 보니.
아무리 엄청난 숫자를 자랑하는 녹색갈기 부족이라고 한들.
어느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포위된 상황.
제대로 된 싸움을 벌이기는 힘들 수밖에 없었다.
-크륵……!
-이 토착종들, 생각보다 강하다!
힘겨운 전투를 벌이게 된 전사들.
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우리 땅 안에 있던 놈들과 같은 종족 맞는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영토.
그 안에도 분명 인간들은 있었으나.
그들을 처리하는 것은 지나칠 정도로 쉬운 일이었다.
그때도 각성자들의 저항은 어느 정도 있었으나.
그들은 부족의 전사 하나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다수였으니까.
하지만.
저들은 달랐다.
-평균적인 전력부터가 평범한 토착종들과는 다르군.
-한두 마리 정도라면 또 모를까, 저만한 숫자가 모두 상당한 힘을 발휘다니.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여기에는.
녹색갈기 부족으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을 이유가 하나 있었다.
“3일 치 전투식량. 배급 왔습니다!”
“오오!”
춘천의 각성자들에게 전투식량을 만들어 준 뒤.
그 수수료 격으로 받은 것이 창고에 쌓여있다시피 하던 전투식량.
그것을 매일같이 각성자들에게 보급하고 있었기 때문.
전투식량을 먹은 각성자들은, 비록 혼자서는 그렇게 활약할 수 없을지언정.
본래 약하던 이들이라도 셋 이상이 모이면 녹색갈기의 전사 한 마리를 감당할 수 있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철원군과 화천군.
두 지역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던 녹색갈기 부족이었으나.
지금 와서는.
각각의 50% 정도를 겨우겨우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그륵…….
이런 상황에서.
누구보다 불편한 것은 다름 아닌.
부족의 대전사였다.
-이 허접한 저주만 아니었어도!
그 근처에 모여있던 이들은 대전사의 눈치를 보며 몸을 움츠렸다.
의기양양하게 뱀파이어들을 토벌하겠다고 나섰던 그였으나.
갑자기 사방에서의 공격이 시작된 상황.
어느 세력 하나도 토벌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으니까.
그 순간.
-주술을 탓하는 건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나.
대주술사가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말장난을 칠 생각이라면…….
-후방에 나타난 놈들의 약점을 알아냈네.
-……!
-태양에 약한 것 같더군.
-……뭐야. 그 얘기였나.
대주술사의 말에 조금 기대했던 대전사였으나.
이어진 말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놈들은 언제나 밤에만 나타나서 싸운다. 낮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으리란 것쯤, 바보라도 짐작할 수 있지.
문제는, 저들은 낮에는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인지.
그 위치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약점을 알아도 토벌에 나설 수 없다는 게 문제였으나.
히죽-
-그게 전부일 리가 있나. 놈들의 은신처 역시 알아냈지.
-……!
-하늘이 막혀서 예언은 쓰지 못하지만, 대지의 정령들은 여전히 눈을 뜨고 있거든.
그렇다고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크하하하! 병력을 집결시켜라!
-집결시키라니. 사방에서 적이 쳐들어오고 있는데 말입니까!?
-다른 지역은 조금 내줘도 상관없다. 일단 한쪽을 먼저 정리한 뒤, 나머지는 천천히 되찾으면 그만!
서로 도와줄 수 있는 위치의 토착종들과 달리.
뱀파이어는 다른 이들과 단절된 위치에 있었다.
뱀파이어들만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면, 적어도 후방은 안전해진다.
그들의 병력 분산도 확연히 줄어들게 되겠지.
-전투는…… 새벽에 치른다.
* * *
철원군 구석에서 영역을 넓히던 아리엘라.
그녀를 향해.
부족의 토벌대가 접근해 오고 있었다.
-걱정마십시오, 주인님!
그녀를 옆에서 보좌하던 녹색갈기의 주술사.
하카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저놈들의 지능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
“일단은 네 동족이었다만?”
-저놈들은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일 뿐! 주인님의 군세라면 능히 적을 꺾을 수-
“……있을 리가 없잖니.”
-있을 터…… 예에?
하아.
한숨을 내쉰 아리엘라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그녀가 숨어 있는 동굴 바깥.
저 멀리서 떠오르기 시작하는 태양이 보였다.
“증오스러운 천적 같으니라고.”
태양의 아래에서, 그녀의 군세는 대부분의 힘을 잃는다.
은신처 안에서는 그나마 전투력이 유지되긴 하겠으나.
‘좀 더 빨리 발을 뺐어야 했나.’
저들의 숫자를 보아하니.
아주 제대로 이를 갈고 온 것 같아 보였다.
‘어쩌면…… 본녀도 위험해질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