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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206화 (206/227)

206화 녹색갈기 부족 (2)

“이 녀석. 오는 길에 밥 같은 건 먹였습니까?”

“아니. 반항이 너무 거세서 뭘 먹일 생각도 못 했지. 그건 왜?”

“그건 잘하셨네요.”

괴물을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명의 인간.

그 인간들을 바라보며.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녹색갈기 부족의 늙은 주술사.

보르진은 생각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이러고 있을 여유 따위 없거늘.’

지금.

그가 속해 있던 부족은 무척이나 큰 위기를 마주한 상태였다.

어쩌면 부족이 멸망할지도 모를 정도로 큰 위기를.

부족에 멸망의 위기가 찾아오자.

그를 해결하기 위해.

보르진은 무척이나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설마하니…… 우리 영역 내부를 돌아다니고 있는 미친 토착종들이 있을 줄이야…….’

그런 그의 발을 붙잡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적.

토착종의 세력이었다.

‘전쟁 중인 세력의 영역에 들어와서 저리 뻔뻔하게 활동하는 이들이 있을 줄이야. 제정신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실이 보르진의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저런 자들이 영역 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것도 모를 정도라니…….’

지금 부족에 찾아온 위기가 얼마나 큰 것인지.

더욱더 뼈저리게 체감이 되었으니까.

한시라도 빨리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하지만.

여기서 발이 묶인 신세가 된 자신이 한탄스러울 뿐.

‘그래도…… 나는 절대로 동족을 배신하진 않으리라.’

이미 모진 고문을 겪었지만.

그는 결코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일을 겪더라도.

그는 결코 부족에 해가 될 만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기에 목숨을 내던지지는 않았으나.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부족에 해가 되는 일을 할 바에야 스스로 목숨을 내던졌을 정도.

‘나는…… 저 대주술사와는 다르다!’

부족을 배신해 멸망의 위기까지 몰아넣은 배신자와는 달리.

보르진은 절대 부족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다짐하고 있었으나…….

“자. 아~ 하세요.”

-끄, 끄르르르륵!!!

그 다짐이 무너지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 *

[전쟁 요리사의 정성이 담긴 솔직한 감정의 혼마르 육포]

[섭취 시, 매우 솔직해집니다.]

짝!

“자. 밥도 맛있게 먹었으니까, 다시 시작해 보자고.”

한바탕 강제 급식이 끝난 뒤.

나는 손뼉을 치며 녀석에게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름.”

-보르진, 이라고. 한다…….

불과 몇 시간 전에는, 내 얼굴에 침을 뱉어 가며 반항적인 태도를 보였던 놈이었으나.

그런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순순히 입을 여는 녀석.

다만.

자신이 입을 열고 있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분한 것인지.

이빨을 까드득 갈면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응~ 안 무서워.’

이미 몇 번이고 사용해 본 요리다.

저렇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서도 뭐든 물어보면 충실하게 대답해 준단 말이지.

그나저나.

‘솔직함’을 잔뜩 먹여 놨더니 한국어로도 술술 대답하는 녀석.

그리고 한국어로 대답한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너. 인간들을 노예로 다루던 녀석인가 보군.”

-……크륵. 그, 렇다.

“하.”

차마 반박은 하지 못한 채.

고개를 돌리는 녀석.

이 녀석들이 학구열이 넘쳐 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종족의 언어를 배울 이유가 뭐가 있겠냐.

‘쓸 만한 인간들을 노예로 쓰기 위해.’

주술사들이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는 건.

이미 저들에게서 구출한 인간들에게서 들은 사실.

‘맘 같아선 바로 요리해 버리고 싶다만.’

여기선 조금 참아야겠지.

일단은 궁금한 점을 먼저 물어야 했다.

당장 내가 가장 궁금한 점은…….

“너. 대체 어쩌다가 잡혀 오게 된 거냐?”

이 녀석이 순순히 잡혀 오게 된 경위.

그 자체.

아무리 전투에서 패배했어도 그렇지.

적대 세력이 자신들의 영역을 돌아다니는데 그걸 방치하는 것은 물론.

이렇게 납치까지 당할 정도라니.

뭔가 이상하잖아.

-……지금 우리 부족은 무척이나 약해진 상태다.

“아니. 그건 알고 있다니까.”

우리와의 전투에서 대판 깨진 건 사실이니까.

대전사니, 대주술사니 하는 녀석들도 그 과정에서 처리됐고.

약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긴 하다.

-아니……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조금 다르다.

“엉?”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과 녀석이 한 말의 의미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우리 부족은 전쟁에 그 누구보다 특화되어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수없이 많은 전쟁을 겪었지……. 그리고 그 모든 전투가 승리로 끝나지만은 않았다.

종족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한 듯.

강제로 입을 열게 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말하는 태도에는 자신감이 묻어 나왔다.

-확실히 우리는 지난번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부족의 역사상 이 정도의 패배는 한두 번이 아니었어.

“자랑스러워할 일인가, 그게?”

-그 패배로 멸망했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겠지. 하지만 수없이 많은 패배를 겪었음에도 우리 부족은 언제나 재기에 성공했다!

“……흠.”

그렇다면야.

자부심을 느낄 만도 한가.

-네놈들에게 입은 피해 역시 예외가 되지는 못해. 그때 잃은 병력 따위 3개월이면 수복할 수 있을 정도였지.

그때 죽은 병력이 얼만데.

그걸 3개월 만에 복구할 수 있을 정도라니.

“대전사니, 대주술사니 하는 녀석들도 죽었는데?”

-그 부분이 뼈 아프긴 하나, 그들보다 조금 모자랄 뿐.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나만 해도 얼마든지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겠지.

“……네가 대주술사급이라고?”

-물론이다. 그보다 마력이 조금 낮을 뿐, 지혜로는 전혀 뒤처지지 않아.

“어어. 그래. 그러시겠지.”

마지막 말이야 허세일 수 있다고 치더라도.

이 녀석의 종족이 엄청난 물량 생산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는.

나 역시 [식재료 감별]을 통해 확인한 사실.

그렇다면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생긴다.

‘……태준이 녀석한테 물었을 때는, 그런 말은 없었는데?’

이 녀석들과의 전투가 끝난 직후.

겨울이 찾아왔다.

우리는 외부 활동을 줄이고, 내부 정비에 들어가기로 결정했지.

하지만, 아무리 겨울이 왔다고 한들.

맘만 먹으면, 저들의 잔당 토벌에 나서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아리엘라를 통해 놈들의 내부 정보는 어느 정도 파악된 상태.

피해가 조금 있을지언정.

그대로 몰아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겠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서두르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태준이 녀석의 점성술이 있었으니까.’

실제로.

녹색갈기 부족과의 전선에서 병력을 많이 뺐음에도 불구.

지금까지 큰 문제는 없었다.

녀석들이 입은 피해를 그렇게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진작에 뭔가 문제가 생겼을 터.

그 이유가 뭔가 했는데…….

-내가 말한 부족이 약해진 이유는…… 그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다.

“……?”

-절대 일어나선 안 될 끔찍한 일이 부족에 일어났기 때문이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종족에 대한 자긍심을 드러내던 늙은 주술사.

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빨을 꽉 깨물며 말했다.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

내전이라니.

그렇게 똘똘 뭉쳐서 우리를 공격하던 저 괴물들이.

내전?

“갑자기 내전이 벌어지다니. 이유가 뭐지?”

-이유라…….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대답은 하지 않고,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녀석.

“뭐야.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냐?”

-……아니. 그걸 네 놈이 묻는 것이 조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다.

“응?”

-내전이 일어난 이유를 물었는가.

질문에 답하면서도.

내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녀석.

-반쯤은 네놈 때문이기도 하다.

“……엥?”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갑갑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는 괴물.

-너를 죽이고자 대주술사가 소환했던…… 어둠의 정령 때문이지.

……뭐야.

그게 왜 여기서 나와?

* * *

[녹색갈기 부족]

오르크 족의 한 계파인 이 부족은 다른 대부분의 오르크들과 마찬가지로 초원의 신을 섬긴다.

그들은 초원신의 전령인 대지의 정령과 교감하여 힘을 얻었다.

그들이 전쟁을 위한 부족이 된 것에는.

바로 그 대지의 정령의 영향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더 많은 땅을 가지게 될수록.

그들의 정령과의 교감은 더욱더 깊어진다.

모든 부족원들이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

‘더 많은 땅을!’

‘더 많은 힘을!’

부족은 끊임없는 정복 전쟁의 나날을 보냈다.

그 행보는 지구에 도착한 뒤에도 비슷했다.

최대한 빠르게 영역을 넓히려고 한 것 역시.

대지의 정령과의 교감을 늘리기 위해서였으니.

하지만…….

오르크 족들 사이에는, 아주 드물게.

대지의 정령이 아닌 다른 존재와 교감…….

아니.

[계약]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 존재는, 굉장히 음흉하고, 강력하며…….

그 욕심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던가.

마귀, 사령, 악령, 악귀…….

혹은.

악마라고 불리는 존재.

얼마 전 이루어졌던 군단과 녹색갈기 부족 간의 전쟁.

그 마지막 전장에는.

-크륵.

노쇠한 주술사…….

보르진 역시 자리 잡고 있었다.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전장의 흐름을 살펴보며.

보르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패색이 짙구나.’

자신감 있게 시작했던 전쟁이었으나.

그들의 적이었던 토착종들은 무척이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점성을 일그러트릴 정도의 강력한 주술사.

그들의 숫자를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의 드높은 요새.

그 요새를 지키는 정체불명의 수호자들.

거기에 토착종들이 가지고 있던, 불꽃을 내뿜는 강철의 병기들까지.

그 자체로도 상당한 난적.

그나마 거기서 그쳤다면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치명적인 악재가 겹치고 말았다.

‘부족의 후방에 나타난…… 강력한 마.’

얼마나 운이 나쁜 것인지.

우연히도 부족의 후방에 나타나 부족의 전사들을 지배해 나간 마물.

그 마물을 토벌하기 위해 전력이 사방으로 분산된 결과.

전황은.

부족에게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악재가 겹친 끝에 펼쳐진 대규모 회전.

거기서 보르진은 믿지 못할 광경을 보고야 말했다.

쿠우우우우웅!

-커어어억!

부족 최강의 전사인, 대전사 카르가라.

그런 그가.

토착종 전사와의 싸움에서 밀리고 있는 모습.

-대전사조차 패퇴시킬 정도의 전사라니……!

아무리 대전사가 이 땅의 봉인을 받아 약해진 상태라고 한들.

그들이 정복한 땅이 좁아 정령의 축복이 부족한 상태라고 한들.

‘전설에나 나타나던 광전사가 현현하다니……!’

대전사의 패배는.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후퇴해야 한다!’

결코, 있어선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전투를 계속해서 끌고 가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

-크륵…… 보르진!

-알고 있다. 형제들이여. 최대한 빨리 후퇴를……!

다른 주술사들의 눈치를 보니.

그들 역시 자신과 같은 생각인 듯.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주술사들이 보였다.

‘이번 싸움은 패배했지만, 급할 필요는 없다.’

녹색갈기 부족은 전쟁을 위해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없이 많이 겪은 전쟁.

그리고 그 모든 전쟁에서 승리만을 취할 수는 없는 법,

패전은 녹색갈기 부족에게 있어서 낯선 일이 아니었다.

‘우선은 최대한 병력을 온존하며 후퇴하는 게 최우선이다. 전력은 언제든지 보충할 수 있어.’

오늘은 비록 패배했을지언정.

다시금 세력을 되살려 전쟁을 일으킨다면.

‘다음 기회를 노린다면, 그때는 얼마든지…….’

지금의 패전 따위.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했던 주술사들이었으나…….

[계약이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 주술사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그 목소리가 아주 익숙한 자의 것이었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단어…….

계약.

-대, 대주술사?

-방금, 무슨 말을……!

전쟁을 위해 태어난 종족.

그리고 전쟁에 있어서 구성원들 간의 단결은 필수적인 것이다.

부족의 시작부터 몰락까지.

부족원들 간의 단결이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밖에 없었다.’

그 단 한 번의 분열.

결국은 그들의 대족장마저 목숨을 잃게 한 것은 물론.

그들을 이차원의 난민 신세로 만든 계기가 바로…….

-쿠, 쿠르단!?

-대주술사! 그대가 어째서……?

악마와의 계약.

그 끔찍했던 계약이.

부족원들의 눈앞에서 다시금 재현되었다.

[어둠의 정령이 강림합니다.]

보기만 해도 끔찍한 기운을 내뿜는 악마의 권속이 전장에 강림하였고.

한 토착종을 살해하기 위해 덤벼들었다.

-아, 아아…….

그 모습을 본 보르진은.

저 악마의 권속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목표를 달성했는지 아닌지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흔들리는 그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주술사가 악마와 계약했다!

주술사들의 수장.

대주술사가 악마와 계약했다.

심지어는.

자신뿐만이 아니라 대전사의 육체를 희생해 가면서 악마의 권속을 소환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

-배신, 배신이다……!

-주술사들이, 부족을 배신했다!!!

그 모습을…….

전장에 있는 모든 부족원들이 목격했다는 것.

늙고 경험 많은 주술사.

보르진은 직감했다.

‘부족에 큰 위기가 닥쳐오겠구나.’

그 위기의 계기는 외적인 저 토착종들이 아닌…….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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