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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취사병-207화 (207/227)

207화 녹색갈기 부족 (3)

-우리 부족은 본래 대족장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싸운다.

상처 입은 주술사.

보르진은 어눌한 한국어로 설명을 시작했다.

……그나저나.

지금 저 녀석이 뭐라고 한 거야.

‘대족장이라고?’

그 이름을 듣자.

아무리 나라도 조금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대전사니 대주술사니 하는 놈들도 빡셌는데.’

대족장이라니.

‘여기서 더 강한 놈이 있다는 거냐, 설마?’

얘기를 들어 보면.

대족장이라는 녀석은 명백하게 대전사나 대주술사보다도 윗줄.

종족의 수장쯤 되는 녀석이라는 건데.

‘그런 녀석이 아직 남아 있던 건가.’

솔직히 조금 쫄렸다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대족장이 죽고 난 뒤로…… 그 단결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지.

“……휴.”

-……?

아무래도.

그 대족장이라는 양반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 버린 모양.

그나저나.

“딱 봐도 중요한 자리 같은데 바로 채울 생각은 안 했던 건가?”

-하기는 했지. 대전사, 카르가라가 경험을 쌓아 그 자리에 올라가게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카르가라는 너무 어렸어. 초원신은 그에게 전투의 재능을 내렸지만, 지혜를 쌓을 시간은 주지 않았지.

부족을 구성하고 있는 그룹은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은 둘이었다.

-전사와 주술사다.

몸을 쓰는 쪽과 머리를 쓰는 쪽.

당연하게도.

두 그룹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 같다.

그 왜.

평범한 작업 현장에서도 현장 측과 책상 측의 사이는 좋기가 힘든 법이잖냐.

그거랑 비슷한 관계인 모양.

그걸 조율하던 것이 대족장이었으나.

그런 대족장의 자리가 공석으로 바뀐 뒤.

-전사와 주술사들 간의 마찰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찰이라.”

얘기를 들어 보니.

그나마 최근까지는 큰 문제는 없었다는 것 같다.

-우리끼리 싸우기에는 외부의 적들이 넘쳐 나는 상황이었으니.

지난번 묘양사 때에도 그랬지만.

아군을 단결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외부의 적이니까.

전사와 주술사.

두 세력 모두 자신들끼리 싸워서 될 상황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서로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어떻게든 잘 협력해 왔지. 그래…….

하지만.

그 평화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까드득…….

늙은 주술사가 이빨이 부서질 정도로 강하게 턱을 다물었다.

부족에 쌓여 가던 불화.

그 불화에 제대로 된 불씨를 던진 것은.

-대주술사 쿠르단.

“……?”

-그자가 부족을 배신하기 전까지는……!

주술사들의 수장.

대주술사 본인이었다.

-지난번 전투…… 우리는 비록 패배했으나, 시간을 들인다면 충분히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주술사라는 녀석은 대전사의 죽음을 보았음에도 불구.

안전한 후퇴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하나.

-애초에 그자는 우리 부족의 안위 따위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니까!

부족의 안위를 신경 쓰지 않는다니.

그렇다면.

“그 대주술사라는 녀석은 무엇을 위해 전장에 나섰던 거지?”

-악마!

“……!”

내 질문에 바로 돌아온 답은.

내가 지금 가장 신경 쓰고 있었던.

바로 그 존재였다.

-그자는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

악마와 계약한 대주술사.

즉, 그 녀석은.

‘……악마 계약자.’

그제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태준이 녀석이 말했던 ‘정보를 가지고 올 존재.’

당연히 인간이라고 생각했고.

창수가 우리를 찾아왔을 때 그게 바로 창수였구나, 하고 짐작하고 넘겼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그 존재는 창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우리를 공격한 정체불명의 인간들.

그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수 있는 게 바로.

‘이 녀석이었구나.’

눈앞의 이 괴물이라는 것.

* * *

“악마, 라고 했나?”

-그렇다.

녀석의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온 순간.

나는 다른 사정 따위는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설마하니 이 이름이 여기서 나올 줄이야.’

얼마 전.

주변 군부대의 괴물들을 해방해 우리를 공격한 세력.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녀석들이 왜 우리를 공격했는지.

놈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너.”

알고 있는 것은 하나.

그 세력의 인간들은 분명 악마 계약자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라. 그 악마라는 녀석에 대해.”

-……크륵. 모습을 보아하니 그 존재가 너희에게도 접근한 건가.

반면.

이 녀석은 그 악마 계약자를 극도로 혐오하는 모습이었다.

“애초에 왜 악마를 그렇게 혐오하는 거지?”

그 이유를 알 수만 있다면.

적에 대한 대처도 가능해질 터.

-혐오하는 이유라……. 그럴 수밖에.

“……?”

-말했다시피 우리는 대지의 정령과 교감함으로써 힘을 얻는다.

다른 존재에게서 힘을 얻는다는 구조.

그 자체는 비슷하지만.

-악마와의 계약은 정령과 교감과는 다르다. 교감이 아닌 계약이라는 이름부터가 그렇지.

“계약, 이라.”

-악마는 계약자에게 힘을 주고, 소원을 이루어준다. 그리고 그 계약의 대가로 악마는 보수를 받아 가지.

계약이라 함은 무언가 주고받는 게 있다는 것.

악마는 힘을 주고.

계약자는…….

-몸과 영혼이다.

“…….”

-악마는 굉장히 탐욕스러운 존재거든.

자신의 몸과 영혼.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

“그게 뭔.”

내가 봤던 녀석들의 스킬창에 적혀 있던 설명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스킬 - 계약]

[대가를 바침으로써 악마와의 계약을 진행합니다.]

[거래의 진행 여부는 전적으로 악마의 판단으로 이루어집니다.]

애초에 계약의 진행 여부조차 악마가 결정한다고 했던가.

그런데 심지어 이쪽에서는 몸과 영혼을 모두 줘야 한다니.

불공정 계약도 이런 불공정 계약이 없다.

‘……이쯤 되면 그 계약을 맺은 놈들의 머리를 의심해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그런 계약을 맺는 쪽의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하고 있겠지.

“……크흠.”

그런 내 생각을 예상한 듯.

보르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인정한다. 본래라면 맺을 이유가 없는 계약이니까.

“그런데도 그 계약을 맺은 녀석들이 있다는 건가.”

-정확히는 그런 계약이라도 맺어야만 하는 순간이 있었던 것이지.

“……?”

저런 계약이라도 맺어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니.

그런 경우가 있을 수가 있나 싶었는데.

-예를 들면, 종족의 명운이 걸린 상황이라든가.

답은, 생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나의 고향은 여러 종족이 부대끼며 패권을 다투던 세계였다.

“흐음.”

-우리 오르크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종족이 각자의 신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었지.

그중에서도.

녹색갈기 부족은 초원신의 비호를 받았다.

그 눈동자 색과 같은 푸른 초원의 지배자로 군림한 이들.

다른 오르크 족의 부족들 역시 많았으나.

그중에서도 수장 역할을 맡던 것은 언제나 녹색갈기 부족이었다.

그들은 그 숫자와 힘을 통해 다른 종족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어떤 높은 성벽이라고 한들, 초원을 내달리는 우리의 힘이라면 충분히 무너트릴 수 있었지.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이계의 존재들이 강림하기 시작했다.

이계의 존재라.

부르는 방법은 각자가 달랐지만.

이제는 뭘 말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침공을 받은 거겠지.’

이제는 확신이 들었다.

이성이 없어 보이는 다른 괴물들 역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성을 가진 괴물들은 모두.

‘우리와 같은 멸망을 거친 뒤…….’

이곳으로 도망쳐 왔다는 것.

-우리 부족은 다른 종족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존재들과의 싸움에서는 가장 먼저 멸망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지.

“이유가 뭐지? 어지간히 병력을 잃어도 금방 충원 가능하다고 그렇게 자신만만했으면서.”

-간단하다.

드넓은 초원을 자유롭게 누비던 부족.

그 숫자는 폭력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초원신은 우리에게 초원을 내달릴 수 있는 힘을 주셨지만, 그곳에 요새를 세울 지식은 주지 않으셨거든.

“……허.”

-우리는 언제나 약탈자였다. 무언가를 지키는 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았지.

그러고 보면.

지난번 녀석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 뱀파이어…….

아리엘라의 경우도 그렇다.

‘나름대로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효과가 클 줄은 몰랐지.’

이들이 제대로 된 방어 체계를 갖춘 상태였다면.

고작 아리엘라와 뱀파이어들에게 그 정도로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이들은 그저 땅을 넓히는 데에만 능할 뿐.

‘확보한 땅을 지키는 능력은 지독할 정도로 미숙한 거다.’

오죽하면 영토 내의 감시 체계를 저 주술사들의 점성술 하나에만 의존했을까.

그 점성술이 무력화되는 순간.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알 수 없게 될 정도로 터무니없이 허술한 감시 체계.

‘아니. 이건 마냥 남 얘기는 아닌가?’

생각해 보면.

이건 마냥 저들만의 단점도 아니었다.

‘지금은 우리도 저들과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요새의 방어는 튼튼하지만.

그 외에는 조금 하자가 있는 것이 사실.

막말로 춘천 외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태준이 녀석의 점성술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이미 마련된 상태.

‘……군부대들의 통신 장치를 이용한 연계를 서둘러야겠어.’

민재 형이 새롭게 각성한 능력을 활용한다면.

군부대가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연락망을 재건할 수 있다.

태준이 녀석의 점성술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영토 내의 장악력을 끌어올릴 수 있게 되겠지.

-네놈들의 요새는 대단하더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보르진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보다는 못하지만, 다른 종족들 역시 나름대로 높은 성벽을 쌓아 올린 상태였지. 그 안에서 공격을 버텨 내던 이들과 달리…… 수비에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가.”

-초원신의 축복과 대지의 정령과의 교감만으로는 그 적들을 이겨 낼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순간, 우리 주술사들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지.

다른 방법이라.

딱히 좋게 들리지는 않는 단어인데.

-제안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방안은 없었다.

“그야. 새로운 방법이란 게 그렇게 쉽게 발견되지는 않겠지.”

-그 말대로다. 심지어는 대립하던 타 종족과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정도니…….

타 종족과의 동맹이라.

“……?”

그.

뭐라고 할까.

“……그걸 선택하면 됐던 거 아냐?”

뭐야 그게.

되게 괜찮은 선택지 같은데?

얘기만 들었을 때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

왜 그걸 고르지 않은 건가 의아했으나.

-네놈들, 토착종들은 우리 고향의 역사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보르진은.

그 선택지야말로 가장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수백, 수천 년을 대립하면서 살아왔다. 다른 종족과의 투쟁 자체가 그 종족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허어.”

-그런 적들과의 동맹이라니? 얘기만 나왔을 뿐, 가장 현실성이 떨어지는 선택지였다. 그 말을 한 부족원 역시 농담처럼 한 말이었고.

잘은 모르겠지만.

그 긴 역사 탓에 저 괜찮아 보이는 선택지를 고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는 것.

“……그래서, 다른 선택지를 고르셨다?”

-그래.

그게 바로.

-악마와의 계약이다.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대가로 바침으로써 성립하는.

턱없이 불공정한 계약.

“미쳤군. 그딴 계약을 맺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해는 하지만, 마냥 효율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응?”

-말했을 텐데. 악마가 원하는 것은 영혼과 육체라고. 그리고…….

그다음으로 나오는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부족은 한 번에 많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기까지도 얼마 걸리지 않지.

……이런.

미친 새끼들.

-계약의 대가로 바칠 만한 영혼과 육체는 차고 넘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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