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계의 취사병-217화 (217/227)

217화 이게 아닌데.

어두운 그림자의 형태를 한 괴물.

어둠의 정령이 몸을 일으키고 나선다.

“저 녀석이 나선 이상…….”

“그래. 당장의 위기는 해결될 거다.”

하지만.

원준과 간부들은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저 녀석은…… 우리가 부른 존재가 아니니까.’

그들이 계약한 존재.

[악마]

그들의 주인은 원준과 계약할 당시.

딱 한 번만 그들과 대화를 나누어 주었다.

덕분에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게 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후로는.

계약을 위해 부를 때를 제외하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첫 계약 당시.

그들의 주인이 알려 준 바에 의하면…….

‘주인님께선…… 결코 대가 없이 무언가를 내려 주시지 않는다.’

그들을 지켜 주고 있던 하수인들 역시.

원준이 ‘인도자’로서 다른 이들에게 계약을 주선할 것을 조건으로 내려 준 존재들이었다.

특히.

‘……일정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는 우리가 목숨을 바칠 때를 제외하면, 전혀 내려 준 적이 없었지.’

그들의 목표를 위해.

몇 번인가 ‘계약’을 진행했을 때.

나타난 괴물들은 무척이나 강력했다.

저 하수인들 사이에 그 정도로 강력한 괴물은 열 마리도 되지 않겠지.

그리고.

어둠의 정령은 그런 그가 본 괴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축에 드는 존재였다.

계약자들 스무 명.

아니, 서른 명의 목숨을 바쳐도 저만한 존재를 내려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가 소환한 것도 아닌데, 갑자기 나타나 버린 존재.’

그들이 아닌 다른 인간 중에도 계약한 존재가 있는 건지 뭔지.

머리가 아파 오는 원준이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들의 주인이.

저만한 존재를 사용하는데,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지.’

당장 몰려오는 군인들을 처치하지 못한다면.

모두가 죽게 생긴 상황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대가를 치러서라도, 이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게 어디겠는가.

어둠의 정령이 나서서 강적들을 정리해 준다면.

그 후에는, 다른 하수인들이 전차와 같은 저들의 이동식 거점들을 차근차근 정리할 수 있을 터.

지금도 군인들 측에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황은 아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머지 하수인들이 충분히 저 군인들을 점령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는데.

“응?”

그 앞으로 다가가는 사내.

양손에 두 자루의 단검을 쥔 사내가.

불길한 모습을 한 괴물을 향해 당당하게 걸어간다.

‘미친놈인가?’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사내가 정령의 첫 사냥감이 되리라 생각한 원준.

그런데.

[……[email protected]?#!]

정령의 그림자가 요동친다.

마치.

‘공포를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후에 일어난 일은.

보면서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 * *

‘어디로 도망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나.

생각해 보면 그 대주술사나 이 녀석들이나 같은 악마 계약자.

거기서 도망치고 여기로 온 것도 이해는 간다.

칼을 뽑아 들고.

녀석에게 접근하면서 생각했다.

‘저번에는 어떻게 이기긴 했다만, 생각보다 강한 녀석이란 말이지.’

아니.

사실 그때도 이겼다 하기는 애매했다.

대놓고 방심한 채, 나를 가지고 놀려던 적.

그 방심을 틈타, 공격의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간 뒤.

칼빵 한 번 먹인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계속 싸웠다고 한들.

딱히 내가 이겼으리라고 확신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

-어둠의 정령이라…….

그리고.

그건 비단 나만의 생각도 아닌 것 같았다.

보르진의 말에 따르면.

-솔직히, 네가 어떻게 그 존재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로군.

‘……엥? 그 정도라고?’

-모르긴 몰라도 계속 싸웠다면 그대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의 정령은 한 개체의 말살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수준의 하수인이었으니까.

실체가 없기에 특별한 공격 수단이 없으면 피해조차 주지 못한다.

그 그림자를 통한 폭격은 무척이나 강력하기도 했다.

군단의 생산직들이 전력을 다해 만든 내 군복이 순식간에 찢어 발겨진 것은 물론.

[강철 리자드]의 요리 효과가 적용된 내 몸 역시 한순간에 걸레짝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어디 그뿐인가.

-한 번 대상을 말살하면, 말살한 대상의 육체를 조각내 자신의 무기로 삼지. 어둠의 정령은 그런 식으로 전투를 지속한다.

내가 보지 못했을 뿐.

만약 내가 거기서 죽었더라면, 내 시체를 이용해서 더 강한 공격을 퍼부을 수도 있었다는 것.

당시에는 재생력을 믿고 어떻게든 덤벼들어, 한 방 먹일 수 있었지만.

제대로 싸우면서 녀석이 내 재생력까지 파악하게 되었다면.

다음에는 그런 요행 따위는 기대할 수 없었을 테지.

‘뭐야. 그럼 왜 도망친 거야?’

-……그륵. 짐작 가는 부분이 없지는 않다.

보르진의 시선이 내 주머니를 향한다.

[전투 식량]들이 들어 있는 바로 그 건빵 주머니.

-그나마 어둠의 정령의 약점은 신성력이지. 하지만, 그대는 신성력이 없어 보이는군.

‘응? 그야 그렇지.’

-성기사도 아니고, 사제도 아닐 테니. 당연한 얘기지. 그런 자가 스스로 신성력을 발휘해 적을 베었잖나. 어둠의 정령은 고등한 존재인 만큼…… 느낄 수 있었겠지.

당시에 내가 녀석을 벨 수 있었던 이유는.

성수와 마늘 등을 듬뿍 넣어 만든 [항마]의 요리 덕분.

-그대가 어디서…… 그 신성력을 얻었는지.

그리고.

그 항마의 요리는…….

-그 신성력을 제공한 매개체가, 자신의 근처에 얼마나 많이 쌓여 있는지도.

모든 부대원들의 건빵 주머니에.

넉넉하게 두세 개씩은 보급된 상태였다.

“영준아.”

“신 병장님!”

한 개체의 말살에 특화된 괴물이라고 했나?

하지만.

‘내 직업은 요리사지.’

그 이름부터가.

대놓고 서포터 직업이다 보니.

“저놈, 상대하면 되겠습니까.”

“그래.”

“다들 이쪽으로!”

애초에 녀석이 도망친 이유는.

딱히 나 때문이 아니었다는 거다.

내 요리를 먹음으로써.

주변에 넘쳐 나는 모든 병사들이…….

녀석의 약점을 쥐게 된다는 것.

“최대한 포위하라! 저번처럼 놓쳐선 안 된다!”

“도망칠 틈도 주지 마!”

회색빛 군복을 입은 병사들.

그들의 몸 사이사이에서는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들이 한자리에 모일수록, 그 빛이 커지는가 싶더니…….

[항마의 빛]

[스킬 - 전쟁노래의 효과로, 항마의 빛의 효과가 강력해집니다.]

[특성 - 군단의 기운의 효과로, 항마의 빛의 효과가 강력해집니다.]

전장에 빛이 내려앉았다.

정령이 몸에 두른 어둠 따위는 가볍게 몰아내고.

도망갈 길조차 내주지 않을 정도로…….

밝고, 찬란한 빛이.

* * *

“저, 저 빛은. 대체…….”

“저 녀석들이 전부 사제 계열인 건가……? 아니. 그건 말이 안 되잖아.”

그토록 강력하던 하수인.

어둠의 정령이 허무하게 사냥당한다.

“이, 인도자님.”

안쪽에서 하수인들의 보호를 받던 계약자들.

정령의 힘을 알고 있던 그들로서는…….

당혹스럽기 그지없는 풍경이었다.

“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뭐라도 말을 좀……!”

그들의 시선이.

계약자들의 수장.

원준을 향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악마와 계약했으며.

악마와 계약해야 하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설명해 계약자를 늘려 온 남자.

“불합리할 정도의 강함이군…….”

인도자 원준은.

다른 계약자들이 보내는 시선에 대답할 여유 따위 없는 듯했다.

어느샌가 그들이 있는 건물 주변의 괴물들이 모두 토벌당하고.

군단의 병사들이 건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군인이다, 이거냐.”

“예?”

그 모습을 보며,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원준.

군단의 힘은 너무나도 강했다.

평범한 방법으로 쌓을 수 있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러니.

저 힘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멸망의 날에 운 좋게 군부대에 있었다는 이유로…….”

“……인도자님?”

“편하게 저런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거냐……!”

엄청난 숫자의 전차들.

각종 자재로 강화된 차량.

군기가 바짝 든 상당한 숫자의 군인들까지.

군부대가 살아남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운 좋게 작은 부대 하나가 살아남은 정도라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아니었다.

‘최소한 수천 명 단위의 군부대가 온전하게 살아남은 거다.’

저 군인들과.

그들, 계약자들은 달랐다.

멸망의 날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들.

그들에게는 그 괴물을 상대하기 위한 어떤 힘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비를 잡고 운 좋게 각성하거나.

아니면…….

‘다른 위대한 존재의 손을 빌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지.

그렇기에.

원준은 더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저 녀석들은 편하게 힘을 키웠으니 모르는 거다……!”

“모르다니, 뭘 말입니까.”

“자신들이 취해 있는 그 힘이 오히려 인류를 멸종으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사실!”

이곳에 있는 계약자들은 알고 있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제길. 맞는 말이야.”

“저만큼 강한 놈들이니, 앞으로도 쉽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거지.”

원준이 소리치자.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던 계약자들의 눈빛에 각오가 깃든다.

“저항해 봅시다!”

심지어는.

그들 중 한 명이 그렇게 용기 있게 소리치고.

“제기랄, 더럽게 강한 놈들이긴 하지만……!”

“찔러 보면 피 한 방울은 나겠지, 뭐!”

인도자의 말에 영향을 받은 것일까.

용맹하게 소리치는 계약자들.

“다들…… 고맙다.”

그들을 바라보며.

인도자, 원준은 잠시 감동받은 듯 멍하니 서 있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계약을 하자.”

“……!”

계약이라 함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스킬이다.

위대한 존재에게 육신과 혼을 바쳐.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

즉.

다 같이, 목숨을 바치자는 얘기였다.

“저들의 강함은 비정상적이다. 군부대의 무기를 활용해서 빠르게 힘을 키운 거겠지. 우리의 전투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거다. 하지만!”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며.

웅장하게 소리치는 원준.

“저런 ‘강한 인간’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주인님의 대업은 늦춰지게 된다!”

“…….”

“다들 알잖나. 인류를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주인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건…… 잘 알고 있지.”

“비록 그렇게 구원받는 인류에 우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겠지만, 우리 목숨을 바쳐서라도 저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지키기 위해 내려 준 하수인들은 분명 강했다.

하지만.

결국, 저 군인들을 이겨 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 영혼을 바쳐서 소환하는 하수인들은 그보다 더 강하다.’

이곳에 있는 악마 계약자들.

그들 모두가 계약을 맺어 하수인을 소환한다면.

저 군인들도 토벌할 수 있는 강대한 존재들이 나타나게 될 터.

“……하긴 뭐. 저희가 칼 들고 싸우는 것보단 그게 효율적이긴 하겠네요.”

“제길. 언젠가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뜬금없이 그 순간이 올 줄이야.”

원준의 말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긴장한 채, 희생을 각오했다.

“흐, 흐윽…… 우리 개죽음은 아니겠죠?”

“설마. 모든 게 다 인류를 위해서요.”

“아, 아들들…… 어딨는지 모르겠지만, 엄마 먼저 갈게…….”

희생을 각오한 이들이.

눈물을 흘리며, 한곳에 모여 앉는다.

모두가 하나가 된 숭고한 분위기 속에서.

대표자로서.

인도자가 소리쳤다.

“우리 영혼의 주인이시여!”

그 순간.

쿠우우웅…….

하고.

주변의 공기가 뒤바뀐다.

“계, 계약을. 바랍니다.”

그들의 주인이.

이곳에 나타나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인도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계약. 원하는 것은?]

“……주인님의 대업을 방해하는 저 악의 군세를 제거할 힘을 내려 주십시오.”

[군세의 토벌…… 확인. 대가는?]

계약이 진행되기 시작하고.

이제 남은 단계는 하나.

그 대가를 입에 담기만 한다면.

계약은 이행된다.

“대가로는……!”

인도자.

원준은 이것이 자신이 뱉을 마지막 말이 될 것이라 생각하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저희들의……!”

좌중의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닫고.

모두가 눈을 질끈 감으며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저. 저희.”

“저희들의…… 목…….”

“저……. 저…….”

비장하게 소리치던 인도자.

그의 말끝이.

묘하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

긴장한 채 기다리던 최후의 순간.

그 순간이 다가오지 않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힐끔 눈을 뜨며 고개를 든다.

“대, 대가로는. 저희의, 그러니까. 저희의…….”

“이, 인도자님?”

“모, 목수우우…….”

“갑자기 무슨.”

한자리에 모인 계약자들.

그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이 인도자를 향하고.

모두의 시선이 몰린 가운데.

“……이, 이게. 아닌데.”

원준의 눈동자는.

당황스럽게 흔들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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