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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5화 (5/78)

5. 해룡방은 적당한 상대였다.

5. 해룡방은 적당한 상대였다.

부선장은 해룡방에서 잔뼈가 굵은 자였다.

밑바닥 선원으로 시작해서 해룡방에서 다섯 척 밖에 없는 용두대선의 부선장까지 올라갔으니 말단 수적들에게는 닮고 싶은 사람, 그 자체였다.

그러나 해룡방주의 여섯 의형제들 중 하나인 독두룡 섭중악의 행동에 제동을 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늙은 퇴물 때문에 웃긴 꼴을 보이고 말았군. 여기는 다 태워버려. 나는 손맛이나 좀 더 볼 테니까.”

“일꾼 숫자를 맞춰야 하는데 몇 놈 잡아가도 될까요?”

부선장이 할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자비를 베푸는 것뿐이었다.

마침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을 구하는 상인들도 있으니 핑계는 좋았다.

혹시 남는다고 해도 복주의 노예 시장에 내다 팔면 그만이었다.

“부선장이 알아서 해.”

섭중악은 퉁명스럽게 대꾸를 하고 먼저 마을로 향했다.

그래서 부선장은 알아서 자신의 할 일을 했다.

그것은 해룡방의 다른 수적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에 불길이 솟고, 비명은 더 높게 솟았다.

*

이한이 마을로 다시 돌아온 것은 그가 마을을 떠난 지 두 달을 살짝 넘긴 후였다.

예정보다 시간이 더 걸린 이유는 나노의 장담대로 단전을 갖게 된 이한이 무공에 푹 빠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호흡으로 단전에 기를 쌓고 내공으로 정제하는 과정이 너무도 중독적이었다.

기경팔맥을 따라 내공을 일주천 할 때마다 몸이 변하고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다.

초식에 따라 몸을 움직여볼 때마다 아! 하는 감탄사가 나오곤 했다.

뜬구름 잡는 것만 같았던 무공서의 설명이 그제서야 와닿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공이 발휘하는 힘이 이한의 상상, 그 이상이었다.

춤이나 다름없었던 무공의 초식이 내공을 바탕으로 본연의 위력을 드러내자 단순한 손날치기조차 일격에 바위를 깨버릴 정도가 되었다.

여기서 수련을 더 쌓고 요령을 익히면 일촌의 거리에서 가격을 해도 뼈를 부수고 내장을 찢을 수 있게 된다.

면장이니, 타공장이니 하는 것이 다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내공이 가져온 힘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내공과 초식의 운용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면 일촌의 거리조차 필요없게 된다.

주먹이나 손바닥을 댄 상태로 상대를 부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산을 때려서 소를 친다는 격산타우의 수법도 더 이상 상상이 아니다.

이 정도가 되면 무기도 갑옷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침투경이 가능해진다.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이한은 이제 막 내공을 쌓기 시작했을 뿐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10년 넘게 초식과 내공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을 쌓아왔다고 해도 실제로 무공을 익히는 것은 이제 시작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내공의 수발에 취해서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

“아니, 이게 무슨.”

시간이 가는 것을 잊을 정도였다고는 하지만, 바둑 두던 신선을 구경하다가 세월을 건너뛴 나무꾼이 된 것까지는 아니었다.

두 달 안에 돌아오려던 계획이 두 달을 살짝 넘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마을이 이 꼴이 되어 있다니!

마을로 돌아온 이한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멀쩡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돌아와서 보니 마을에 남은 것은 숯과 재뿐이었다.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집이 하나도 없었다.

불길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것이다.

본래 이곳은 10여 채 정도 되는 오두막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그래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40명은 넘었고, 제법 활기가 돌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아 있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한쪽에 새로 만들어진 커다란 무덤만이 이곳에 살던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증언하고 있었다.

이한은 주변을 뒤진 끝에야 본래의 마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새로 만들어진 움집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얼굴이 기억나는 사람도 있었다.

이한을 해변에서 운반해 왔다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이한을 발견하자마자 두려움에 질려서 이마를 바닥에 대고 살려달라는 말만 반복했다.

이한이 그와 정상적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뺨을 몇 대 치고 난 다음이었다.

“해룡방에서 촌장님을 죽였습니다요. 마을 사람들도 닥치는 대로 죽였어요!”

엉엉 울어대며 횡설수설하는 사람을 계속 다그친 후에야 이한은 사건의 전말을 짜맞출 수 있었다.

간단하게 말하면 수적이 섬마을 하나를 약탈한 것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외진 곳에서는 어쩌다 있는 일이다.

이렇게까지 사람을 많이 죽이고 마을을 완전히 불태워버린 경우가 드물어서 그렇지.

그것조차도 살아남은 사람들로부터 토막토막 끊어진 이야기를 모아보니 이유를 대충 알 것 같았다.

촌장과 해룡방 사이에 얽혀있는 과거의 악연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 볼 때부터 촌장이 평범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역시 한때는 꽤 거칠게 살았던 모양이었다.

과거의 원한이 늙어서도 따라올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그렇지.

관련도 없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함부로 죽이다니!

이 세상에서는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깝다는 것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한이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칠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그전에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다.

이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른 것은 모두 부수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단지,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불편한 감정.

그것이 걸릴 뿐이었다.

“해룡방에서 마을 사람들을 여럿 끌고 갔습니다. 촌장님의 손자도 같이 끌려갔구요.”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 중 하나의 말이었다.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이한이 정보를 얻기 위해 계속 으르다 보니 이것저것 말하다가 그냥 튀어나온 증언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이한의 마음 한구석이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촌장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기억났다.

자신이 해변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손주라고 했다.

자신은 잊지 않고 보은하겠다고 말했던가?

그 당시에는 분명 빈말이었다.

하지만 이한은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자를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마을까지 왔답니다.”

이것은 의도를 가진 말이었다.

이한의 으름장에 그냥 나온 단편적인 증언이 아니었다.

이 말을 한 자의 눈빛도 심상치 않았다.

“무슨 뜻이지?”

“나는 들었습니다. 촌장을 죽인 대머리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마을에 온 것이라고.”

“그런가?”

거기서 이한의 망설임이 끝났다.

한쪽으로 기울던 저울의 추가 확 기울어졌다.

자신을 찾으러 온 사람이 있었다니, 헛수고는 하지 않도록 해줘야지.

이한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지금까지도 무서웠지만 이제는 정말 누군가를 죽일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목소리를 높였던 마을 사람도 제정신을 차렸다.

섬에서 물고기나 잡아먹고 사는 자신들과는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이라는 것을 상기한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수그리고 다시 하층민답게 굴기 시작했다.

“해룡방의 본거지가 복주에 있던가?”

“예. 대협 어른. 그렇습니다요.”

“복주가 저쪽이였지?”

“예. 그렇습니다만.”

이한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방향을 보며 고개를 꾸벅거리던 마을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한이 그대로 바다로 뛰어들더니 복주가 있는 북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헤엄쳐 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이한은 마을 사람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바다에서 온 사람은 바다로 떠났다.

다시 볼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

원래 바닷가에서 활동하는 수적은 말이 수적이지 대부분 바닷가 마을의 자경단에서 비롯된 자들이다.

구성원들은 바닷가 마을의 평범한 어부고, 그들의 무기라고 해봐야 물고기 머리를 딸 때 쓰는 짧은 도와 작살 정도가 전부다.

물론 물고기 머리 딸 때 쓰는 짧은 도라고 해서 사람 머리를 못 따는 것도 아니고, 작살 역시 물고기나 사람이나 공평하게 찔러줄 수 있다.

어부가 수적질을 하고 싶다면 따로 준비할 것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서 홀로 지나가는 상선이 있으면 평범한 어선이 갑자기 수적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왕왕 있어 왔다.

물론 증거인멸을 위해 사람과 배를 함께 용궁으로 배달하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본적으로는 자경단이다.

그들에게 약탈은 일종의 일탈이었고 생존을 위한 사냥 비스므레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룡방은 달랐다.

해룡방은 진짜 전문적인 수적이었다.

복주에 근거지를 두고, 다섯 척의 용두대선을 중심으로 벌써 20년 넘게 활동해 온 자들이었다.

멀리 이주섬까지 돌아다니며 상선을 약탈하고, 곳곳에 흩어져 있는 해변 마을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는 것이 그들의 본업이었다.

그러나 복주의 누구도 해룡방을 건드리려고 하지 않았다.

적어도 먼저 나서서 해룡방을 징치하자고 하는 곳은 없었다.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말이다.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복주의 무림 문파와 상인들 모두가 해룡방의 패악질을 눈감아주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해룡방이 너무 강해서?

설마 그럴 리가.

생각해 보면 복주는 정말 큰 도시다.

민강의 하구와 바다가 잇닿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전형적인 상업항이기에 흐르는 돈과 물자는 일반인이 상상하는 그 이상이다.

그리고 돈이 흐르는 곳이 으레 그렇듯이 폭력을 권력으로 삼은 자들도 난립하고 있었다.

정파는 물론이고 정사지간에 흑도까지.

그 성격도 다양했다.

그들 중에는 하려고 한다면 해룡방을 멸문시키는 것이 가능한 곳도 여럿이었다.

게다가 무림 세가가 곧 상인은 아니지만, 상인치고 무림 세가와 연관이 없는 자가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해룡방이 상선을 약탈하면서도 멀쩡하게 지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래서 간혹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 중에는 해룡방을 복주의 지배자로 생각하는 자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돌아가는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해룡방주와 그의 의형제들을 제외하면 바다에서라면 모를까 육지에서는 평범한 흑도문파와 다를 바가 없다고 평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룡방이 수십 년 동안 별 탈 없이 문파를 유지한 것은 별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그들의 수적질이 복주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이익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 이익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해룡방의 약탈이 복주의 상인들에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점이었다.

해룡방은 복주의 상인들로부터는 통행세를 걷을 뿐이었다.

그리고 외지의 상인들로부터 약탈한 물건은 복주에 싸게 풀었다.

복주의 상인들 입장에서는 싼값으로 다른 지역에서 오는 경쟁자를 제거하고 그자들의 상품까지 헐값에 구입하는 셈이었다.

다른 하나는 해룡방 하나만 신경을 쓰면 다른 수적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장강을 이용하는 상인들이 장강수로연맹에게 통행세를 내는 것이나 산을 지나는 상인들이 녹림채에 통행세를 내는 것과 다르지 않은 논리였다.

물건을 나르는 표국이 녹림의 산적이 무서워서 산을 지날 때 통행세를 내던가?

그것은 아니다.

녹림도가 자리잡고 있는 곳에서는 나름대로의 치안을 유지하기 때문에 통행세를 내는 것이다.

뜨내기 산적, 원정 강도단, 심지어 맹수까지.

녹림의 산채가 자리한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그래서 통행세는 상인과 도적 모두가 적당히 용납할만한 선에서 균형을 잡기 마련이었다.

간혹 그런 세상의 이치를 모르고 무리한 욕심을 부리는 산적이 나올 때가 있는데, 절대로 오래 가지 못한다.

우연하게, 어디까지나 우연하게 근처를 지나가던 무림 고수가 의분에 못 이겨 산적을 토벌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산채는 같은 명패를 걸고 몇백 년을 이어가고, 어떤 산채는 몇 년도 안 되어서 문을 닫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해룡방은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편이었다.

이한이 해룡방을 목표로 삼은 것은 그 때문이기도 했다.

너무 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다.

해룡방을 위해 발 벗고 나설 우호적인 세력도 없다.

역사가 오래되어서 어떤 늙은 괴물이 똬리 틀고 앉아 있을지 모르는 무림 문파가 아니라는 점도 안심이었다.

수적 몇 명 정도가 사라지는 것은 해룡방 자체에서도 신경을 안 쓸 것 같았고, 일이 크게 번져서 의형제라는 자들까지 손을 대도 예상외의 실력자가 나설 일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한 님. 그렇게까지 서로의 이익이 얽혀있으면 해룡방을 돕겠다고 나설 자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는 체면이 걸려있다고 할까. 수적에 불과한 자들을 돕는다는 것은 자신들 역시 수적이나 다름없다고 공개리에 선언하는 격이거든. 무림 문파라면 그래도 복주에서 나름 행세하는 자들인데 그 정도로 막 나가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아. 게다가 역사가 오래되고 강한 문파일수록 꼰대끼가 많아서 더 그렇지.”

[정파나 정사지간의 문파가 그렇게 체면에 신경을 쓴다면 흑도에 속한 문파는 어떻습니까? 같은 부류이니 서로 돕지 않겠습니까?]

“나노야. 지구에서 조폭끼리 서로 돕고 살던? 그놈들은 오히려 잘 됐다면서 해룡방을 뜯어먹으려고 덤빌 거다.”

[역시 아직 이곳의 문화가 익숙하지 않아서 예측이 어렵습니다.]

나노의 반응에 이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도 한때는 그랬다.

“시간 지나면 다 익숙해진다.”

[아! 저놈입니다. 제가 발견했습니다. 저 앞에 있는 대머리. 해룡방의 당주 중 대머리는 저자뿐입니다.]

이한이 보는 것은 나노 역시 본다.

듣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보고 듣는 것 중에서 무엇에 집중할지는 같지 않았다.

이한은 대머리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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