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내공이 최우선입니다.
9. 내공이 최우선입니다.
두 명의 여도사는 산 아래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알려왔다.
그 말에 놀란 모산파의 여도사들은 즉시 산에서 내려갔다.
끔찍한 현장이었다.
부상자까지 재차 확인하며 죽였는지 부상자가 하나도 없었다.
증언을 할 만한 사람을 아예 남기지 않은 것이다.
눈치를 보며 어슬렁거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도망을 쳤다가 날이 밝아지자 다시 돌아온 자들이었다.
대부분은 계약 노동자들이었고, 금문상방에 속한 표사나 쟁자수는 몇 명 되지도 않았다.
“살인멸구까지 한 것을 보니 단순한 약탈은 아니었던 모양이군.”
“금문상방의 상행이었던 듯합니다. 여기 깃발이 있습니다.”
“금문상방이라······”
모산파가 도교의 갈래라고 하지만 문파의 특성상 반쯤은 세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곳이었다.
듣는 귀 몇 개 정도는 속세에 두고 지낸다.
금문상방이라면 기억에 있는 이름이었다.
평판이 좋은 곳은 분명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살인멸구를 당할 정도의 일에 휘말려버리다니!
죽음은 금문상방의 사람들은 물론 계약노동자로 보이는 자들도 가리지 않았다.
모산파의 장로인 관여림은 죽은 자들에 대한 연민을 느꼈다.
죽은 자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죽은 자들의 혼을 위로하고 하늘로 돌려보내는 것은 모산파의 도사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주변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죽은 자들을 한쪽으로 모아서 묻고, 혈겁이 벌어진 장소를 정리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을 위해 향을 피우고 경문을 읊었다.
모든 의례가 끝나자 살아남은 금문상방의 사람들은 남아있는 수레와 상품을 챙겨서 떠났다.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 계약노동자들 역시 그들을 따라갔다.
*
이한이 그곳에 도착한 것은 정리가 끝나고도 열흘은 지난 후였다.
하지만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아직도 피가 웅덩이졌던 곳을 구분할 수 있었고, 부서진 병장기도 남아있었다.
부서지고 망가진 수레와 버려진 상자 역시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살아서 그곳을 떠난 자들의 흔적은 바람과 비가 이미 지워버린 후였다.
“하필이면 금문상방이 습격을 받다니. 우연치고는 공교롭군. 남아 있는 흔적으로 촌장의 손녀를 추적할 수 있을까?”
[불가능합니다. 이한님. 이곳을 떠난 수레의 흔적이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습니다. 사람이 남긴 흔적은 비 때문에 이미 사라져서 추적이 불가능하고, 방주민의 흔적을 특정할 수도 없습니다.]
수레의 흔적을 살피던 이한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추적은 일단 여기서 끝내야 할 듯했다.
촌장의 손녀와 이어진 가느다란 인연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이제는 경사로 갈 때였다.
가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은밀전주가 아직 살아있다면 모르겠지만, 만약 죽었다면?
복수해줘야 할 사람이 있다면 복수를 하고, 그냥 권력투쟁에 휘말려서 유탄에 맞은 것이었다면 향 하나 올리면 그만이다.
은밀전주에게 목숨빚을 졌으니 그 정도는 해 줘야 했다.
그리고 무공.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무공은 제대로 익혀야 했다.
이한은 무공이 실존하는 이곳 세상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오랫동안 무공서를 읽고 초식을 익혀왔었다.
내공이 없을 뿐 무공의 이해에 대해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일단 단전이 생기고 내공수련을 시작하자 생각이 좀 달라지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평지에서 주변을 살피는 느낌이었다면, 내공을 익힐 수 있게 된 후로는 동네 언덕에 올라가서 주변을 살피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어떤 때는 10년 공부가 헛수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으로 내공의 수련이 깊어지면 어떨지 감히 어림잡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산 위에서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의 모든 무공 수련을 기본부터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이한은 경사로 가는 동안 시간을 아껴가며 무공수련을 시작했다.
걸으면서 보법을 반복하고, 달리면서 경신법을 익혔다.
밤에는 내공을 쌓고, 자기 전에는 무공서를 다시 검토했다.
매일매일 나노의 도움을 받아가며 초식을 분석하고, 내공의 수발을 엄밀하게 살폈다.
그 모든 수련을 체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 결과 얻은 바가 정말 많았다.
하지만 한계 역시 명백했다.
문제는 내공이었다.
내공의 양이 너무 적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제 분석에 의하면 이한님이 현재 익히고 있는 삼단삼극권은 최소한 반갑자의 내공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내공이 부족하면 제 위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내공은 하루하루 꾸준히 쌓아 올리는 것이지. 그게 근본이고 궁극적으로는 맞는 길이야.”
[하지만 이한님은 대량의 내공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말입니다. 그것이 이한님의 무력을 빨리 끌어올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
이한의 태도는 여유로웠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답지 않았다.
나노 역시 그런 이한의 태도를 눈치챘는지 말이 길어지기 시작했다.
[경사에 가게 되면 은밀전주가 남긴 비표를 찾아서 은밀전주 또는 은밀전주가 남겼을 사람과 만나야 하는데 현재 상황이 너무 위험합니다. 왕 밀위의 말을 사실로 가정한다면 은밀전은 말살당한 상태이거나 외부의 세력에게 장악당한 후일 겁니다. 적어도 이한님이 떠나올 때의 그 상태는 아닐 겁니다. 이한님의 안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깨어난 이후 지금까지의 경험과 이한님의 말을 토대로 판단하면 이한님의 무력은 너무 약합니다. 체계적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과 분쟁이 생겼을 때 승리할 확률이 너무 떨어집니다. 저는 이한님이 충분한 무력을 확보하기 전까지는 경사로 가는 것 자체를 반대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경사로 가야 해.”
이한의 여유로운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나노는 이한의 말속에서 자신감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단순히 고집을 피우는 것은 아니었다.
[경사에 이한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준비해 둔 겁니까?]
“그래. 환단이 있지. 혹시 내공을 익힐 수 있게 되면 사용하겠다는 일말의 기대로 빼돌려 놓은 것인데, 진짜로 사용하게 되는군.”
[먹으면 내공을 늘릴 수 있다는 그 환단 말입니까?”]
이한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나노의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갔다.
인공지능 비서에게도 감정이 있다면 지금 저 목소리에 드러나는 감정은 분명 놀라움일 것이다.
“그래.”
[경사로 어서 가시죠. 내공이 최우선입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한 나노는 즉시 태도를 바꿨다.
*
경사.
제국의 수도다.
인구는 40만 가호, 200만 명이라는 말이 있다.
물론,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경사와 그 주변부를 통틀어 최소 수십만, 많게는 100만의 사람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 추산하기도 한다.
이 정도면 현대 기준으로 쉽게 볼 수 없는 규모다.
흔히 농업이 경제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전근대의 문명에서 인구의 수는 곧 국가의 힘이라고 한다.
하지만 좁은 지역에 이렇게 몰려 있는 거대한 숫자는 오히려 재앙에 가까웠다.
상수도와 하수도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거대 도시라니!
사람들이 사는 꼴이 어떨지는 상상 그 이상이다.
상황이 나쁜 곳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이한은 그런 곳에서 10년을 지냈다.
그리고 지금, 그런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을 올라가는 중이었다.
[산이 정말 황량합니다.]
“경사 인근의 산이니까.”
[한 시진 넘게 올라오는 동안 발견한 나무가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나무는 모두 어디로 간 겁니까?]
“글쎄? 내가 이 산에 처음 올라왔던 것이 10년 전인데 그때도 이 모양이었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작이 없으면 경사에 사는 사람들은 난방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아니, 취사부터가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상인들이 석탄을 공급하고 있다. 물론 물류비가 포함되니까 가격이 싼 것은 아니야. 덕분에 겨울에는 얼어 죽는 사람이 흔해. 취사는 공동 취사가 보편적이고. 경사에서 개인적으로 불을 피워서 요리할 정도면 서민층은 아니라고 봐야 할 걸.”
[석탄에 대한 이권을 쥔 자가 돈을 많이 벌 것 같습니다.]
“나노가 나보다 빨리 배우는데? 내가 그런 사실을 깨달은 것은 여기서 겨울을 나고서였지. 다 왔다. 여기다.”
[공동묘지로군요.]
“그래. 최소한 500년은 전부터 공동묘지였던 곳이지.”
이한이 도착한 곳은 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공동묘지였다.
한때는 경사의 빈민층이 밀고 들어와서 거처로 삼기도 했지만, 10여 년 전 지진이 일어나서 경사에서 이곳까지 나 있는 소로가 무너지고 계곡 중간의 다리까지 끊어진 후로는 완전히 버려진 곳이었다.
이한은 반쯤 무너져 있는 무덤 중 하나로 다가갔다.
앞에는 석수까지 있을 정도로 제법 규모가 있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무덤이었다.
석수의 뒤편에 있는 커다란 돌을 치우고 약간의 흙을 걷어내자 철로 된 상자가 하나 드러났다.
밀랍으로 틈새를 밀봉하고 기름종이를 겉에 발라서 방수까지 완벽하게 한 상자였다.
이한은 그 상자를 가지고 무덤으로 사용하는 동굴로 들어갔다.
너무 오래전에 만든 동굴무덤이고, 한때는 집으로도 사용되었던터라 내부는 따로 손을 볼 것도 없었다.
이한은 동굴무덤의 입구를 막고 깊숙이 들어가서 철상자를 열었다.
철상자 안에는 자기로 된 작은 호리병과 금편이 몇 개 들어있었다.
이한은 밀랍으로 봉인해놓은 호리병의 입구를 열고 금박에 둘러싸인 환단을 두 개 꺼냈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환단을 구경하는군요. 이런 환단이 어떻게 내공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한님. 어서 복용을 해 주십시오. 당장에 분석해서 대량생산을 위한 데이터를 뽑아보겠습니다.]
“대량생산하면 좋겠지. 화산파에서는 질겁을 하겠지만.”
[화산파의 환단이었습니까?]
“화산파의 조화신단이다. 먹고 운기하면 30년의 내공을 쌓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
[화산파라면 자소단이 최고 아니었습니까? 자소단도 구해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나노의 말에 이한은 웃음을 터뜨렸다.
경사로 오는 동안 나노에게 무림의 이런저런 상식을 두서없이 알려주다 보니 나온 나노의 오해였다.
“자소단이 화산파에서 최고로 치는 환단인 것은 맞는데 화산파 밖으로는 내보내지도 않는다고 해. 그도 그럴만한 것이 적어도 화경에 달한 고수가 천년 묵은 산삼을 기본재료로 해서 직접 연단해야 하는데 당장 천년산삼부터가 구하기 쉽지 않은 귀물이거든. 나로서는 조화신단을 구한 것만으로도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유감입니다. 이한님. 그래도 만약 기회가 닿으면 반드시 자소단을 복용해 주십시오. 충분한 데이터만 쌓을 수 있다면 대량생산은 무리라고 하더라도 소량의 복제는 가능할 겁니다.]
“알았다. 기억해 두지.”
이한은 조용히 가부좌로 앉아서 조화신단을 하나 입에 넣었다.
조화신단은 침을 만나자 순식간에 녹아서 청량한 느낌이 드는 액체로 변했다.
액체는 따로 어떻게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목을 넘어갔다.
청량한 느낌은 목을 타고 흘러서 아랫배에 뭉쳤다.
그리고 호흡에 맞추어 리듬을 타며 전신을 순환하기 시작했다.
청량했던 느낌은 뜨거움이 되고 다시 차가움으로 변했다.
내공이 전신을 일주천할 때마다 성질이 변하고 풍기는 기세가 달라졌다.
의식의 지평선 저 멀리 아득한 곳까지 눈길이 미치는 듯했다.
그러자 지금까지 수련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삼단삼극권의 어색하고 불편한 점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이 언덕보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보는 새로운 시야인 것일까?
이한은 질문과 해답을 찾아 끊임없이 의식의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한이 무아지경에서 깨어난 것은 사흘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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