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혜목장공주와의 만남
14. 혜목장공주와의 만남
이한 역시 자신을 공격했던 여자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 시선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지금까지 조용히 침묵하고 있던 여인이 바로 혜목장공주였다.
혜목장공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평범한 여자가 아니었다.
일단, 신분부터가 황제의 누이인 장공주(長公主)다.
황실에 황후는 물론 황태후까지 부재한 상황이라서 현재로는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의 여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10세 초반에 즉위한 황제를 지키기 위해 시집도 가지 않고 내명부를 계속 장악해 왔다.
내명부를 장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내명부를 장악하지 못한다면 궁인들을 장악하지 못한다.
궁인은 황궁과 황실을 유지하는 손과 발이고, 사실상 황제의 사노비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런 궁인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다면 황제는 먹고 마시는 것부터 걱정해야 할 것이다.
누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다.
물론 구설수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부터는 혜목장공주를 향해 노처녀라고 험담하는 소리가 공공연하게 나돌았을 정도였다.
혜목장공주가 내명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이 불편한 자들이 떠드는 것이리라.
제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결혼적령기가 10대 후반이니, 20세 초반인 장공주의 나이를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혜목장공주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황제를 지켜왔다.
그래서 혜목장공주가 반역에 연좌되었다는 따위의 말을 믿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황제가 정치적으로 공격당하고 있으며, 자신의 누이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한의 눈앞에 나타난 혜목장공주는 그러한 세간의 인식과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고귀하고 고상한 품위가 있었다.
보는 순간 저절로 고개를 수그리게 만드는 위엄이 있었다.
시세가 불리해서 이렇게 유폐까지 당했지만 곤경에 결코 굴하지 않는 결기가 있었다.
과연 제국을 한 가문에서 천 년을 넘게 지배해온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을 뻔했다.
[공격 당하고 있습니다. 혜목장공주가 발산하는 기파입니다. 비정상적으로 강렬한 기파가 이한님의 머리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나노의 경고가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한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눈을 부릅떴다.
상승의 무공은 내공심법을 운기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영향을 미친다.
극양 계열의 내공심법을 운기하는 사람의 주변에 종이를 두면 누렇게 타들어 간다.
극음 계열이라면 옆에 나눈 물바가지의 물이 언다.
심지어 여름에도 말이다.
음공의 하나인 탈혼광소의 경우는 내공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주변에 있던 사람은 귀가 먹먹해지고 멀미를 한다고 한다.
그렇듯 내공은 신체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알고보면 내공을 바탕으로 하는 무공에는 일반인은 상상도 하기 어려운 기묘한 공능을 가진 것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무공도 있다.
내공을 수련하는 사람 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드물게 그 주변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이한이 은밀전에서 읽은 무림의 여러 소문 중에는 마교에 대한 것도 있었다.
세상에 퍼진 여러 사교들 중에서 무림에서도 유명한 마교에는 교주만 익힐 수 있는 무공 중 하나로 천마군림보라는 것이 있다.
형(形)도 없이 오직 의(意)만 있는 무공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걷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천마군림보의 심공을 끌어올리고 걷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마교주에게 굴복하고 따를 마음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한 마음의 이끌림에 일반인은 감히 거부할 생각조차 들지 않고, 내공을 익힌 사람이라면 저항할 수는 있지만 내상을 입거나 심하면 죽기까지 한다고 한다.
처음 그런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이한은 사이비 종교 특유의 선전으로 치부했다.
포교를 위해서라면 어떤 헛소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사이비 종교가 아니던가?
그러나 은밀전의 밀위들은 과장이 된 것이 맞기는 하겠지만, 완전한 거짓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한은 은밀전의 밀위들이 말한대로 주변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무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황실에 말이다.
경외심을 느끼고 저절로 마음을 굴복하게 만드는 무공이라니!
과연 황실이라면 있을 법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한을 향해 사용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이한은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댄 것보다 더 큰 위협을 느꼈다.
이한은 자유의지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성장기의 대부분을 살아온 사람이다.
누군가가 억누르려고 한다면 반항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이한이 끌어올린 내공이 이한의 의지를 보호했다.
이한의 기세가 칼날처럼 날카로워졌다.
누구라도 서슴치 않고 죽일 수 있을 정도의 날카로움이었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여인을 공격할 것만 같았다.
여기서 꿇으라는 말이라도 나왔다면 분명히 출수했을 것이다.
“쯧쯧. 장공주 전하. 궁인이라면 모를까 함부로 외인에게 심법을 운용하시면 안됩니다.”
조금 전 이한을 어린애 취급했던 여인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녀는 혜목장공주와 이한 사이에 서서 혜목장공주의 옷매무시를 만져주기 시작했다.
이한을 향해 등을 돌린 것을 보면 이한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침의에 장옷을 걸친 채로 계속 계시는 것도 안 됩니다. 환관들이 이런 모습을 봤다가는 저 사람의 목숨이 열 개라도 부족할 겁니다.”
“유모와 이 전식만 입을 다물면 알 사람이 없지 않을까?”
“궁궐에서 그 사람들 눈이 없는 곳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기는 해. 그런데.”
혜목장공주가 살짝 얼굴을 내밀고 이한을 바라보았다.
“가짜 도사들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저자가 알아차렸다고?”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습니다. 하물며 저자는 은밀전주가 보낸 사람입니다. 평범할 리가 없지요.”
“그럼 유모는 왜 저 사람을 때렸지?”
“가벼운 질책이었습니다. 윗전에 대한 존중이 없더군요. 혹여나 다른 곳에 가서 저렇게 대놓고 속마음을 드러낸다면 단숨에 목이 잘릴 겁니다. 황궁은 무서운 곳이니까요.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다면 이미 저자에게도 말했듯이 장공주 전하의 처소에 함부로 들어오는 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자들이 문제삼기 전에 처벌까지 완료함으로 저자를 보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자네의 호의를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양이야. 저렇게 눈빛이 불손하다니.”
“궁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해하셔야지요.”
“흥.”
순간 혜목장공주의 기세가 달라졌다.
여전히 태어나면서부터 고귀했던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방금처럼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무릎을 꿇을 생각같은 것은 들지도 않았다.
조심스럽게 대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여전했지만.
그제서야 이한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것은 어미새처럼 장공주를 싸고 드는 무서운 여자를 향한 신호였다.
유모 역시 이한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고 이한을 향해 몸을 돌렸다.
세 여자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이한은 대답을 기다렸다
“은밀전의 피해가 막심하리라는 것은 나 역시 예상했던 바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저 큰 피해가 없기를 바랐을 뿐. 이렇게 은밀전주의 충심을 전해 들으니 기쁘면서도 슬프다. 은밀전주에게는 보름 후에 다시 사람을 보내라고 하라.”
그럴듯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결국 일을 미루어 버린 것이다.
이래서는 일의 마무리가 안 된다.
이한은 이렇게 계속 끌려다닐 생각이 없었다.
“은밀전주는 부상이 심해서 움직이지도 못합니다. 과연 보름 후에 다시 올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자네가 있지 않은가?”
“저는 대가를 받기로 하고 이번 한 번만 도와주기로 했을 뿐입니다. 더 이상 얽힌 의리도 이익도 없으니 다음은 없을 것입니다.”
“자네가 은밀전이 당한 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겠다. 그러나 대의를 생각하라. 큰 홍수로 강이 범람하여 물길을 바꿀 때 사람의 선악을 따져가며 목숨을 가져가던가? 자연에게 사람의 윤리를 묻지 않는 것처럼 황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더 큰 이익을 가져다주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홍수가 진 후에 풍년이 들 듯, 황실이 굳건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큰 혼란은 없다. 은밀전은 그를 위한 밑거름이 된 것이다. 천명이 유씨에게 있는 한 황실을 위한 일은 언제나 옳은 일이다.”
이한은 동의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를 생각하면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누가 옳고 그르니 하면서 의견을 다툴 생각 따위는 없었다.
이한은 현실적인 부분만을 지적했다.
“장공주 전하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협박으로 입을 열게 한 자가 여럿입니다. 이곳을 들어오기 위해 죽인 위사도 있습니다. 날이 밝으면 모두 발견될 것입니다. 이곳을 지키는 자들이 보름 후에도 오늘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알았다. 그렇다면 보름 후에 이쪽에서 사람을 보내는 것으로 하지. 그렇게 말하면 은밀전주는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은밀전주에게는 확실히 전하겠습니다.”
이한은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곧장 전각을 빠져나갔다.
*
이한이 전각을 떠나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단순한 심부름꾼은 아닌듯한데? 유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말하는 것이나 건방진 태도를 보아하니 누군지 알 것 같습니다. 도지감의 태감이었던 여문기가 10여 년 전에 특이한 청년을 하나 주웠다고 했는데 아마 그자일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특이했기에 10년 전의 일을 다 기억합니까?”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견문이 그렇게 넓다고 하더군요. 제국 밖의 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답니다. 게다가 숫자를 다루는 것도 사람을 다루는 것도 뛰어나서 저 청년이 은밀전의 일에 가담한 후로는 더 이상 예전의 은밀전이 아니게 되었다고 했지요.”
유모의 말에 장공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도라면 특출나기는 했지만 특이하지는 않았다.
특이한 일이나 사람이라면 겪을 만큼 겪어본 장공주였다.
“그 정도라면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관리 중에도 제법 있을 텐데요?”
“관리에게는 돈을 버는 재주가 없지요. 저자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을 만들어 내서 상품으로 파는데, 웬만한 장사꾼은 상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은밀전 같이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곳은 아귀가 식탐을 하듯 돈을 잡아먹는데 저 젊은이가 치부책을 잡은 이후로는 오히려 돈을 쌓아둔다고 합니다.”
“궁으로 불러들이고 싶은 종류의 사람이로군요.”
“원하시면 그렇게 하시지요. 은밀전주는 마땅히 전하의 하교에 따를 것입니다.”
혜목장공주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실제로 불러들일 생각은 없었다.
듣는 것만으로는 황실의 재산을 맡겨도 될 법한 재주를 가진 자였다.
하지만 직접 본 인상으로는 전혀 장사꾼처럼 보이지 않았다.
반골일지 아니면 자신만의 원칙을 가진 사람일지는 모르겠지만 대하기가 그리 만만한 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유모의 인물평대로 황실에 대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중이나 두려움 같은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아래에 두고 부리기에는 마땅하지 않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은밀전주가 말한 것과 다른 것이 있습니다. 듣기로는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체질이라서 아쉽다고 했는데, 실제로 보니 제법 뛰어난 무공을 가진 자였습니다.”
“무엇인가 기연을 만난 것이겠지요. 어쩌다가 그런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밖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그것은 무공의 고수가 전력을 기울여 부딪쳤을 때나 나오는 소리였다.
*
폭음의 원인은 이한이었다.
정확히는 이한과 노랑머리를 한 도사와의 충돌이었다.
[이한님! 저자의 지팡이를 확보해 주십시오! 디멘션이늄의 파장이 느껴집니다!]
나노 역시 이한의 머릿속에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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