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당신은 누구십니까?
13.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실 이한이 향한 곳은 일종의 함정이었다.
조심스러운 침입자를 잡기 위해 경계망에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 놓은 길목이었다.
전각의 주변에서 모습을 드러낸 채 경계를 서고 있는 위사들이 이곳을 지키는 전부는 아니다.
진짜는 그들을 피해 사각지대로 몰래 숨어들어오려는 자들을 잡기 위해 허술하게 방치해둔 길목에 은신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이한이 향한 곳도 바로 그렇게 은신한 자들이 지키고 있는 길목 중 하나였다.
*
황궁에서 오래 살고 싶다면 높은 분들의 일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좋다.
입을 막고, 눈을 감고, 귀까지 닫은 채 지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세라고들 했다.
그러나 황제의 하나밖에 없는 동복누이가 유폐되는 일은 평생을 황궁에서 일한 궁인들조차 현명한 처세를 잊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온갖 흉흉한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어린 황제의 숙부들의 이름이 오고 갔고, 경사의 권문세족에서 후원하는 관리들의 이름이 그 뒤를 따랐다.
황제를 둘러싼 고명대신들에 대한 촌평 역시 빠지지 않았다.
모두가 조만간 불어닥칠 피비린내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장공주가 유폐된 곳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위사들은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황궁에서 어떤 일이든지 벌어진다면 이곳을 빼놓고 지나갈리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령도 명확하지 않았다.
장공주를 가두고 있으라는 것인지 아니면 보호하라는 것인지부터가 애매했다.
그러나 높으신 분들은 명확하게 다시 명령을 내려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현장의 위사들이 다 뒤집어쓸 판이었다.
그래서 숨어있던 위사는 침입자를 발견하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곧장 죽이기에는 이리저리 걸리는 것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침입자에게는 걸리는 것이 없었고, 당연히 망설임도 없었다.
숨어있던 위사는 침입자가 정확하게 자신을 바라보며 손을 입에 올리는 것을 목격했다.
동시에 모기가 무는 것 같은 따끔함을 얼굴에서 느꼈다.
반사적으로 얼굴을 만졌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순식간에 얼굴의 감각이 죽은 것이다.
뭐지? 독인가?
처음에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뒤늦게 자신이 독침에 맞았음을 깨달았다.
들어본 적도 없는 강력한 독이었다.
심장에서 통증을 느끼기가 무섭게 온몸이 마비되었다.
죽어 있는 몸에 정신만 살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느낄 수 있던 것도 잠깐이었다.
침입자가 그의 옆을 지나갈 때는 심장도 완전히 멈춰버렸다.
너무 조용히 죽어서 멀리 있던 동료들은 이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였다.
*
“효과는 확실하군.”
[하지만 너무 위험한 물질입니다. 이한님이 중독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반응 시간 내에 바트라코톡신을 해독하려면 아무리 저라고 해도 전력으로 가동해야 합니다.]
“역시 무공을 사용하다가 중간에 쓰기에는 무리겠지?”
[지금처럼 외부에서 사용하시는 것은 문제가 없겠지만, 체내에 보관하고 사용하는 것은 절대 안 됩니다. 외부에서 공격해 들어온 내공이 신체 내부에 영향을 미칠 때 통제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즉사입니다. 하지만 독성이 약한 것은 제한적으로 사용할만합니다.]
“독공의 절대 고수를 흉내 낼까 했는데. 아쉽군.”
이한은 정말 아쉬웠다.
독은 상당히 편리한 무기다.
나노머신이 혈관을 따라 돌아다니고, 몸 안 곳곳에 뭉쳐서 자리 잡고 있는 이한의 입장에서는 안전하게 쓸 수 있는 도구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독과 달리 즉사성을 가진 독은 다루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노조차 난색을 표할 정도면 실전에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혹시라도 나중에 독공에 대한 무공서를 입수하게 된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미련을 버려야 했다.
이렇게 잠입을 성공한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했다 .
혜목장공주가 거처하고 있는 전각은 상당한 규모였다.
주변을 둘러싼 공터는 관리가 안 되어 황량하기는 했지만, 그 넓이만은 연병장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이한은 서슴지 않고 전각 내부로 들어갔다.
전각 내부에서 인기척이 나는 곳은 중앙에 있는 커다란 공간뿐이었다.
아마 혜목장공주와 시중을 드는 궁인들이 함께 모여서 지내는 듯했다.
[모두 세 명입니다. 한 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이 이한님을 인식한 것 같습니다. 신체 정보가 달라졌습니다.]
[자고 있던 다른 두 명도 깨어났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전각의 중앙으로 향할 때마다 나노가 내부의 사정을 알려왔다.
최소한 한 명은 이한보다 뛰어난 무공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니면 멀리 있는 소리를 증폭해서 들을 수 있는 지청술을 익혔을 수도 있겠다.
나노에 의지해서야 주변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이한으로서는 아직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이한은 일부러 발걸음 소리를 울리며 걷기 시작했다.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도 발걸음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목적지는 금방이었다.
화려한 문이 이한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앞에서 이한은 손뼉을 두 번 쳤다.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궁인들 간의 신호였다.
손뼉을 쳐서 의사를 주고받는 것은 황족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궁인들 사이에서만 전수되는 암호 같은 것이다.
상당히 복잡한 체계를 가지고 있어서 사용에 능숙해지면 길고 복잡한 의사소통도 가능하다고 한다.
아마 주변에서 말하는 소리까지 예민하게 반응했던 황족 때문에 생긴 편법이 아니었나 싶은데, 지금은 언제 시작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전통이 되어버려서 궁인들 사이에서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도 쓰인다고 한다.
적어도 외부인은 확실하게 걸러낼 수 있다.
외부인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렵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데다가, 궁인이 아니라면 이런 것이 있다는 것조차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한 역시 은밀전주에게 몇 가지 신호를 배운 것이 전부였다.
내부에서 호응하는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라는 신호였다.
그제서야 이한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황궁 내부의 사람이라는 표시를 하고 들어갔기에 날붙이부터 들이대지는 않았지만, 대신 경계심 어린 시선이 날아와 박혔다.
안에는 세 명의 여인이 있었다.
두 명은 잠을 자다가 막 깨어났는지 침의에 장옷을 걸친 정도였고, 다른 한 명은 제대로 옷을 차려입은 상태였다.
아마 그녀가 깨어있다가 이한의 침입을 알아차린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윗사람처럼 보였다.
이한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대번에 호통이 터져 나왔다.
침의에 장옷을 걸친 궁녀였다.
“무례하다. 감히 외인이 고개를 들고 있다니! 당장 고개를 숙이고 부복하지 못할까!!”
그러나 이한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중드는 궁녀야 자신의 일을 하는 것뿐이니 뭐라고 떠들던 신경을 쓸 것이 없다.
이한이 주목하는 사람은 혜목장공주였다.
수족이 다 잘린 채 유폐되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풍기는 기세만으로는 잘 나가는 집안의 마나님 같았다.
도도하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에서 평생을 남을 부리며 살아온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엿보였다.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지 새벽에 복면을 한 남자가 들어왔는데도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흥미롭다는 눈빛이었다.
“그대는 누군가?”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목소리만으로도 품위가 철철 넘쳐흘렀다.
“저는 그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완의궁의 환관 여문기가 혜목장공주 전하의 하교를 바란다는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완의궁은 은퇴한 환관들이 머무르는 곳이다.
여문기가 은밀전의 전주라는 정체를 모른다면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러나 이한의 조심스러움은 지나친 것이었다.
“은밀전이 무사했던가?”
“여 전주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 이외에는 알지 못합니다.”
“그랬나? 그 사람도 늘그막에 고생이 많군.”
[경고! 지금 말하는 여자는 무공을 익히고 있습니다. 신체 내부에 내공이 존재합니다. 혜목장공주가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이한은 나노의 경고를 받자 새삼스러운 눈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펑퍼짐한 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단련된 몸, 20대 초반의 여인으로 보기에는 어려운 기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흉터가 있는 손.
이한은 그 손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는 혜목장공주가 아니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한의 말에 여인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지금까지는 대갓집의 마나님 같았다면, 지금은 웅크리고 있는 맹수 같았다.
줄기줄기 흘러나오는 살기와 폭력성이 실체로 변해 이한의 앞에 서 있었다.
이한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진짜 고수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상대해온 자들과는 격이 다른 존재였다.
도주할 길부터 살피게 할 정도였다.
“어린아이가 눈치가 아예 없지는 않구나.”
그녀는 손을 들어서 아래로 내리쳤다.
막강한 경력이 그녀의 손을 떠나 이한을 후려쳤다.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런 것을 보면 장풍이라고 하는데, 장풍은 이런 종류의 공격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눈앞의 여인이 한 공격은 내공을 실체화하여 상대에게 충격을 주는 수법이었다.
서로의 수준 차이가 심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적의 내부를 흔들어 곤죽을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이한은 두 팔을 가슴에 겹쳐댄 채 자신을 때리는 공격을 버텨냈다.
신체 내부를 뒤흔드는 경력은 둘째 치고 충격 자체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뼈가 아작이 날 정도였다.
그만큼 눈앞의 여인이 강하다는 의미였다.
“기초는 나쁘지 않게 배웠구나. 내공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은 어디서 배웠느냐?”
튓!
그러나 이한은 대답없이 속에서 올라온 피부터 뱉었다.
내부 장기에 살짝 손상이 간 것이다.
나노는 이미 호들갑을 떨며 내부 장기를 치료하고 있었다.
피는 그냥 보여주기였다.
내가 부상을 좀 입었어도 이렇게 터프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 것은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뼈대가 튼튼해서 버틴 것뿐입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한은 골격강화시술을 받았다.
게다가 지금도 나노는 꾸준히 이한의 골격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한이 제대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 30년 내공이 없었다면 이렇게 작은 손해만으로 상대의 공격을 버텨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강화시술을 받은 뼈는 멀쩡했겠지만, 내부 장기 한두 개는 확실하게 박살이 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 여문기가 재미있는 아이를 데리고 있었구나. 네가 함부로 장공주 전하의 침소에 들어온 죄는 이것으로 갈음하마.”
그제서야 이한은 눈앞의 여인이 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경력에 한 대 맞을 때부터 대략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아직 이한의 업무는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은밀전주로부터 댓가를 제대로 받아내려면 혜목장공주를 만나서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저는 아직 장공주 전하의 하교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한의 말에 지금까지 이한을 어린애 취급을 하던 여자의 시선이 옆으로 돌아갔다.
침의에 장옷을 입은 두 명의 여인 중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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