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지금 만나러 갑니다.
12. 지금 만나러 갑니다.
“무공서가 필요합니다. 은밀전의 비고에 쓸만한 무공서가 여럿 있다고 들었습니다. 황궁에 잠입하기 전에 한 번 정도는 읽어보고 싶습니다.”
“어렵지 않은 일이네. 은밀전 자체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자네가 은밀전에 남은 것들을 살펴보는 정도는 문제 될 것도 없지. 하지만 스승의 지도 없이 무공서를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무공을 익힐 수가 없어. 자네도 알고 있잖은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려는 건가?”
은밀전주는 예상외의 요구를 받았다는 표정이었다.
조만간 황궁으로 들어가서 유폐된 황족을 만나야 할 사람이 뜬금없이 은밀전에서 보관하고 있던 무공서를 읽어보겠다고 하니 이게 뭔가 싶은 것이다.
이한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았다면 당장에 집어치우라고 고함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무엇인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내공을 익히고 나니까 무공을 보는 시야가 아예 달라지더군요. 그래서 상승 무공이 어떤 것인지 읽어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견식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삼류 무공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가? 이제 내공을 익히게 되었으니 무공에 대해 욕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군. 상승의 무공서를 읽고 영감을 얻어서 무공의 증진을 이루었다는 사람도 있으니 아예 쓸데없는 짓은 아니겠지. 자네가 원하는 수준의 쓸만한 무공서는 몇 개 되지 않지만 모두 내어주겠네. 그런데 다른 것은 필요하지 않은가? 황궁의 경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장공주 전하께서 유폐되신 곳의 경비는 어떨지 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은데? 원한다면 내가 알아봐 줄 수 있네.”
은밀전주의 말에 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상황에 따라 자신의 처신을 결정한다.
지금은 은밀전이 반역죄에 연루되어 조직이 박살났고, 은밀전주 본인도 간신히 목숨만 구해 몸을 숨긴 후였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함부로 은밀전주의 도움 요청에 응할 수 있을까?
일이 잘못되면 함께 죽어줄 의리가 있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이곳의 문화가 생명을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관직에 있는 사람은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작게는 자신의 목숨부터 크게는 가문의 존속까지.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너무 위험했다.
“누명이기는 하지만 은밀전은 반역죄에 연루되었습니다. 심지어 은밀전에 속한 자들을 모두 죽이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은밀전주께서 먼저 연락을 취하시면, 자신이 반역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자가 과연 없을까요? 차라리 연락하지 않은 것만 못한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마음이 급해서 실수를 했군. 미안하네. 나답지 않은 일이었어.”
은밀전주는 금방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답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언제나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던 사람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여도 심리적으로 몰려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금방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정도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며칠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무공서를 준비해 주십시오. 그 이후로는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장공주 전하의 하교를 받은 후에 오겠습니다.”
이한은 일부러 날짜를 특정하지 않았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자신이 할 일에 외부의 변수가 끼어드는 것은 사양이었다.
“부탁하네.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 있을 예정이니, 무엇이든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해 주게.”
은밀전주의 어조는 간절했다.
평생을 환관으로, 황실의 수족으로 살아온 자의 충성이 이런 것일까 싶을 정도였다.
이한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감성이었지만 은밀전주는 진심이었다.
이한은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에 무공서가 들어온 것은 3일 후였다.
*
무공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하게 설명해 놓은 교과서 같은 것이 아니다.
읽는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한 친절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암호문 같은 비유와 생략 때문에 가끔은 무슨 말인지 읽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를테면 무공서는 요리를 위해 간략하게 기록해 놓은 레시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이 먹기 좋을 정도의 돼지 고기를 두껍게 썰고, 소금 약간과 간장 한 술을 넣은 후 적절한 시간 동안 놔둔다.’
요리서에서 이런 문장을 보면, 분명히 읽을 수 있고 이해도 한 것 같은데 실제로 요리를 하라고 하면 어!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요리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라면 단어 하나하나마다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두 사람이 먹기 좋을 정도라고? 도대체 그게 얼마나 되는 양인데?
돼지고기? 어떤 부위를 말하는 것인지?
두껍게는 도대체 얼마나 두껍게 썰라는 거야?
소금 약간? 한 꼬집인가?
간장 한 술? 수저 크기는 얼만데?
충분한 시간이라니! 그게 한 시간이야 하루야?
요리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더 심각해진다.
자기 나름대로의 지식을 바탕으로 엉뚱하게 이해하고 사고를 치는 것이다.
절대로 자신이 먹어본 그 맛이 나오지 않는다.
게다가 상승의 무공서일수록 불친절은 더 심해진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서로 간에 이미 공유하고 있는 사실은 언급도 없이 그냥 넘기기 일쑤다.
심지어 핵심이 되는 부분조차 이미 기본공을 익힐 때 배운 부분이라면서 그냥 생략하고 건너뛰기도 한다.
물론 무공서에는 필요한 내용을 생략하고 넘어간다는 사실조차 기록하지 않는다.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칠 때 말로 설명하고 지나가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무공의 유출을 막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같은 문파의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암묵적인 지식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무공서를 보면 무슨 소리를 써놓은 것인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경우까지 생긴다.
만약 처음 보는 무공서인데 읽어보니 이해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더욱 위험하다.
반드시 주화입마에 걸릴 테니까.
이런 것은 무공을 익히는 사람에게는 상식 같은 것이다.
은밀전주가 이한에게 무공서를 건네면서도 걱정을 하던 것은 그래서였다.
자기나름대로의 이해를 바탕으로 책으로만 무공을 익히려고 하면 반드시 사고가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냥 한 번 읽어보기만 한다고 해서 그나마 안심하고 건낸 것이다.
그리고 한 종류의 무공의 끝을 본 후, 자기 나름대로의 무공을 창안할 수 있는 대종사급의 무림인이 아니고서야 무공서를 보는 것만으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한에게는 나노가 있다.
초식의 움직임과 내공의 흐름을 미리 시뮬레이션 하면서 최적의 조합을 찾아내는 것이 가능한 존재가 함께 있는 것이다.
오직 이한만을 위한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주는 존재 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대종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한이 나노와 함께 은밀전주가 건넨 무공서를 검토한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물론 은밀전주가 건넨 무공서는 정상이었다.
참마무영도법, 오대부검, 대파수, 절패권.
극한까지 익히면 절정에 다다를 수 있다는 상승 무공들이었다.
무림의 거대 세가에서 흘러나온 무공까지 섞여 있는 것을 보면 은밀전의 영향력이 절대 적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용상 결여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복원을 위해서는 같은 계열을 무공서를 더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해당 무공을 시전하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충분한 데이터가 쌓일수록 원형에 가까운 복원이 가능합니다.]
“삼단삼극권의 보완은?”
[대파수의 초식을 통해 삼단삼극권의 위력을 좀 더 강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최적의 결과를 찾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시물레이션을 돌려봐야 합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 것에 대해 만족할 수 있었다.
좀 더 그럴듯한 결과는 결국 나노에게 달린 문제였다.
나노에게 좀 더 많은 자료와 좀 더 많은 시간을 주면 되는 것이다.
“그래. 잘 좀 부탁하자고. 그리고 뭔가 내게 요구할 것은 없나?”
[이한님의 신체 일부를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허가를 요청합니다.]
“신체 일부?”
[내공을 좀 더 강력하게 운용하기 위해서는 경맥을 강화해야 합니다. 경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경맥뿐 아니라 주변의 세포조직 역시 효율성을 개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역시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자신의 몸이 아니게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한은 이미 나노의 모든 기능을 기꺼이 사용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인하고 싶었다.
“나노 역시 로봇 3원칙을 따르던가?”
[사용자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것은 밀키웨이 시리즈에서 지원하는 나노 시스템의 확고부동한 원칙입니다.]
“그래. 잘하자.”
*
황궁이 차지하는 면적은 대단히 크다.
감히 누구도 정확하게 재어본 사람은 없지만 세간의 소문을 종합해 보면 적어도 300만 평은 넘는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아무리 1천 년을 넘게 이어온 곳이라고 하지만 상상을 불허하는 규모다.
그 정도의 크기면 작은 도시라고 해도 될 정도다.
그 말인즉슨 어쩔 수 없이 경비가 허술한 곳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황제가 있는 곳이나 황실 가족이 있는 곳에는 촘촘하게 시위를 깔아 놓았겠고, 관청이나 창고가 있는 곳 역시 경계가 엄중하겠지만, 황궁 지역의 규모상 방치하다시피 하는 곳도 적지 않다.
이한이 노린 것은 바로 그 부분이었다.
정기적으로 순찰을 돌 뿐, 고정적으로 배치된 시위가 없는 곳을 통해 혜목장공주가 유폐된 곳으로 접근할 계획이었다.
게다가 숨어서 경비를 서고 있는 시위가 있다고 해도 이한에게는 별문제가 아니었다.
미리 발견하고 피해서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열화상 시야로 전환합니다.]
이한의 시야에 빛을 발산하는 사람 형태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한의 눈에 끼어든 나노머신이 적외선을 감지해서 인식한 모습이었다.
내공을 익힌 후 밤도 낮처럼 보게 된 이한이 열화상 시야의 도움까지 받게 되자 거칠 것이 없게 되었다.
이한의 눈앞에서 숨어 있을 수 있는 존재는 죽은 자들뿐이었다.
이한은 혜목장공주가 유폐된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목장공주가 유폐된 곳은 황실의 후궁이 황제의 총애를 잃고 잊혀질 때 머무르던 전각 중 하나였다.
황제의 누나로 아직 남아있는 몇 안 되는 황실의 어른이 머무르기에는 격에 맞지 않는 장소였다 .
그러나 주변에 별다른 건물이 없어서 감시하기에도 편하고, 어쨌든 과거에 황제의 후궁이 살던 곳이라서 지나치게 초라하거나 수수하지도 않아서 일단 그곳에 둔 모양이었다.
이한이 도착한 것은 밤도 다 지나서 새벽에 가까워 올 때였다.
아직 해가 뜨기에는 많이 이르고, 밤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그런 시간이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전각의 주위를 돌며 경계 상황을 살폈다.
[보이는 자들만 10명입니다. 전각의 외부에서 은신한 자들은 3명입니다. 내부에는 몇 명이 있을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반역과 연루된 사건인 데다가 유폐된 자의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외부에서 감시하고 있는 자들의 실력은 뛰어날 것이다.
거기다 숫자도 적지 않다.
소란을 피워서 어떻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한은 경계 상황을 살필 때 찍어놓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이 조용히 숨어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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