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무림에서 나노머신-11화 (11/78)

11.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11.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은밀전주가 명월루의 빈방을 일종의 사설 우편함처럼 사용했던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명월루가 은밀전주의 숨겨진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명월루를 방문하지 않았다는 명월루의 주인이 바로 은밀전주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자는 당사자인 은밀전주를 제외한다면 이한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한 말고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비어 있어야 할 방에 사람이 있으니 말이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주인이 사라진 명월루를 차지한 것이다.

황실에서 나온 사람일까?

은밀전의 최고 명령권자가 황실측 인물임을 감안하면 무리한 추측은 아니었다.

이한은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마루에 글자를 썼다.

몇 명?

[1명입니다. 깨어있습니다.]

이한은 잠시 망설였다.

무공을 익힐 수 없었던 그는 언제나 존재를 숨기고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이한은 이전의 이한과 다른 존재가 되었다.

단단한 뼈와 만약의 경우 한 방을 먹일 무공이 있다.

그리고 나노가 있다.

여벌의 목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한 번 정도는 모험을 걸어볼 만도 했다.

일이 잘못되더라도 도망칠 만한 여력은 남길 자신이 있었다.

부상은 피할 수 없겠지만.

그래서 그냥 질렀다.

안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기루와는 어울리지 않는 정갈하고 단정한 느낌의 방이 이한의 눈에 들어왔다.

문사의 거처가 이런 것이겠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두꺼운 보료 위에 앉아 있는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상대를 제압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이한은 중년의 남자를 보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다가, 그의 앞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복면을 벗고, 변장을 지웠다.

이한의 본래 얼굴이 드러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죽은 것 아니었습니까?”

“죽을 뻔했지. 지금도 반쯤은 죽은 셈이고.”

둘 다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온기가 서려있는 어조였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가족이 서로 간에 툴툴거리며 안부를 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왕 선생이 죽었습니다. 도망치느라고 바빠서 누가 죽였는지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왕 밀위까지. 후.”

중년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아마 북면방어사에서 나온 자들이었을 걸세. 은밀전을 공격한 것도 그들이었으니까.”

갑자기 언급된 북면방어사라는 단어에 이한은 안색을 굳혔다.

북면방어사는 경사의 북쪽을 방어하는 군대로 황실의 인물들이 군권을 쥐고 있는 곳이다.

은밀전 역시 따지고 보면 황실 소속이다.

그것도 내명부 쪽.

그러니 황실 내부에서 분란이라도 난 것이 아니라면 현재의 상황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은밀전주님. 어떻게 된 겁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그랬다.

이한의 눈앞에 있는 중년 남자는 은밀전주였다.

명월루주의 방은 다른 사람이 아닌 주인이 직접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한은 지금까지 은밀전주가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은밀전의 일개 밀위까지도 제국의 남쪽 끝까지 추적하며 죽이는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은밀전주의 복수를 해주겠다며 다짐까지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멀쩡하게 살아있었던 것이다.

“은밀전이 반역 혐의를 뒤집어썼네.”

“어쩌다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혐의에 걸린 겁니까?”

은밀전이 반역이라니!

이한이 아는 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은밀전주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몇 년 전 어린 황제의 즉위 과정에서 걸리적거리는 사람들을 은밀전까지 동원해가며 여럿 치웠을 정도니 토사구팽이라면 모를까 반역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혜목장공주께서도 유폐당하셨네. 황제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다는 혐의였다네.”

이한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직 어린 황제, 능력있는 친왕들, 장공주의 유폐.

이것은 어디선가 정말 많이 보던 전개였다.

특히 어린 황제와 능력있는 황숙들이라는 부분에서 그렇다.

그리고 장공주의 유폐.

황제의 무조건적인 지지자라고 할 수 있는 동복 남매가 정치적으로 제거당한 것이다.

명분도 매우 악랄하다.

설사 누명을 벗는다고 해도 정치적으로 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지금까지 어린 황제를 지지하기 위해 시집도 가지 않고 황궁에서 버티고 있었다는데, 자칫하다가는 폐서인이 되어서 황실 가족의 신분을 잃고 황궁에서 쫓겨날 판이었다.

운이 나쁘면 죽을 것이고.

은밀전에게 말살령이 떨어진 것은 아마 혜목장공주의 손발을 끊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일 것이다.

설마 황제가 궁궐 내부에서 고립당한 것일까?

자기 편이 숙청당하는데 손도 못을 쓸 정도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 10대 중반에 불과한 어린 황제라고 하지만, 황제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고명대신들이 여럿이었다.

하나같이 강력한 가문을 배경으로 가진 자들이었다.

아무리 친왕들이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이런 억지까지 받아들일 정도는 아니었다.

실제로 무엇인가가 일어났다고 봐야 했다.

황제 시해를 시도했다고 오해할 만한 무엇인가를 말이다.

하지만 왜?

이한은 정보의 부족을 느꼈다.

그래서 대놓고 물어보았다.

“저는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제가 은밀전을 떠날 당시만 해도 별문제가 없지 않았습니까? 황제에게 위험이 될 정도로 앞뒤 분간하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제거했고, 경사의 민심이 황제를 지지하도록 하는 작업도 성공적이었습니다. 명월루처럼 경사의 권력자들을 감시하는 눈도 여럿 만들었지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겁니까? 설마 우리가 우려했던 친왕 중 하나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한의 말에 은밀전주의 얼굴에 붉은 기가 돌았다.

억지로 화를 눌러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자네가 이 년 전에 황도를 떠날 무렵에 대진국에서 일단의 도사들이 도착했네. 자네도 기억할 거야.”

“기억납니다. 제법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었지요.”

“자네는 그들이 사기꾼 같다고 했었지?”

“예. 대진국에서 온 것 같지 않았으니까요. 임페라토르라는 단어를 모르는 대진국 사람이라니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습니다. 게다가 대진국에서 어떻게 도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회회승이라면 모를까.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자신들의 출신을 숨기기 위한 수작이었을 겁니다.”

“나는 자네의 말을 믿지. 하지만 그들이 진짜 사기꾼인지 확인하기에는 대진국이 역시 너무 멀었어. 게다가 그들의 실력은 진짜였다네. 자네는 얼마 후에 경사를 떠나서 잘 모르겠지만 그자들은 기존의 도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지. 마치 이야기 속에서 걸어나온 도사 같다고나 할까. 결국 그들은 황제 폐하께 봉사하던 무당파의 도사들을 밀어내고 대신 자리를 차지했다네.”

“그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겁니까?”

“아마도. 혜목장공주 전하께서 최근에 내게 분부하신 것의 대부분이 그놈의 도사들을 조사하고 감시하는 일이었네. 하지만 황궁 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정확한 사정은 나도 아직 모르네. 은밀전은 경사를 감시하는 조직이지 황궁 내부를 들여다 보는 곳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장공주께서 그 도사들에게 뭔가 문제를 발견하시고 조치를 취하려고 하시다가 역으로 당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네”.

“그런데도 황제폐하께서는 그냥 그대로 계셨다는 것입니까? 주변의 고명대신들조차?”

“그래.”

이한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경사를 떠난지 2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황실 내부에 무엇인가 문제가 생겨도 단단히 생긴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일개인이 손을 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은밀전 같은 첩보 조직조차 단숨에 날아가는 판이니, 30년 내공을 가진 무림인이라고 해봐야 전쟁터에 던져진 소총병에 지나지 않는다.

은밀전주가 멀쩡하게 살아있는 것을 확인한 이상 이한이 이 일에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저는 왜 불렀던 겁니까? 왕 선생에게 그런 흉사가 생겨서 놀란 마음에 이리저리 따질 것 없이 달려왔지만 사건의 앞뒤를 맞춰보면 은밀전에 일이 생기기도 전에 저를 불렀던 것 같습니다.”

“대진국에서 왔다는 도사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얻은 사실들에 대해 자네의 조언이 필요했었네. 그자들이 이상하다고 알아챈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었고, 대진국뿐 아니라 멀리 있는 나라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시겠지만 저는 사실상 은밀전을 떠난 사람입니다.”

이한은 은밀전주의 말에 선을 그었다.

은밀전이 멀쩡했다면 조언 정도는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은밀전은 엄청난 일에 휘말린 후였다.

남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 뻔했다.

어쩌면 눈앞의 은밀전주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더욱 선을 그어야 했다.

세상의 일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다.

자문을 하다보면 현장의 일에 참견하게 되고, 의리와 정으로 얽혀서 선을 넘는 순간 자신까지 일선에서 뛰고 있는 꼴을 보게 되는 것이다.

관련되고 싶지 않다면 처음부터 명확하게 거부해야 했다.

“명월루주인 여문기 대방 어른에게 빚진 것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지만, 은밀전과의 일은 이미 예전에 끝났습니다.”

“알지. 알아. 내가 왜 모를까. 나는 자네가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네.”

이한은 자세를 바로 했다.

언제나 냉철하기만 한 사람이 이런 감성적인 말을 하다니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무슨 말로 자신을 설득해서 은밀전의 일에 끼어들게 할지 두려울 정도였다.

“나는 혜목장공주 전하께서 내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있을지 궁금할 뿐일세.”

“직접 가서 들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직 황궁에 동료분들도 많이 남아 계실 텐데.”

“나도 그러고 싶지. 그런데 그게 안 돼. 이것을 보게.”

은밀전주는 상의를 벗어버렸다.

길게 그어진 흉터가 팔에서 어깨를 지나 목 어름까지 이어져 있었다.

상처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가슴과 배에도 칼로 찔러댄 자국이 여럿이었다.

죽지 않은 것이 천운이라고 할 정도로 심한 상처들이었다.

“죽지 않았으니 불평을 말할 것은 아니겠지만, 내공을 잃었다네. 이제 나도 자네와 다를 바가 없어졌어. 아니 더 못하다고 하겠지. 그동안 내공으로 노화를 억눌러 놓았던 반동이 곧 닥칠 테니까. 얼마 후면 나이가 미수에 다다른 노인답게 늙어 있을 걸세.”

“아직은 괜찮습니다. 88세면 충분히 걸어 다니실만합니다.”

“88살이나 먹었으면 죽을 날을 준비해야지. 그런 의미에서 여기 명월루는 어떤가? 자네에게 넘겨주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환관 출신이고 재산을 남겨줄 자손도 없네. 엉뚱한 놈이 차지하는 꼴을 보느니 자네에게 넘기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

이한의 눈이 커졌다.

명월루는 경사 10대 기루 중의 하나였다.

현대 지구 기준으로 따지더라도 중견 기업의 가치는 있다고 봐야 한다.

“부족한가? 그렇다면 내가 가진 연줄을 주지. 자네는 제국 남부에 가서 피라미드라는 것을 만들겠다고 했었지? 그쪽 지방의 관리들을 소개해 주겠네. 무엇을 하든 도움이 될 거야.”

은밀전주는 이한을 보며 강조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일세. 혜목장공주 전하의 의향을 알고 싶어. 그것만 알아다 주면 내가 말한 것을 모두 자네에게 주겠네.”

은밀전주의 말에 이한은 주먹을 쥐고 가볍게 허공을 가격했다.

멀리 벽에 세워져 있던 등의 불꽃이 꺼졌다.

내공을 싣지 않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재주였다.

“자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은밀전주가 아니었다.

“주시는 것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말만 하게. 뭐든지.”

은밀전주의 기세가 달라졌다.

이한이 원한다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