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이한, 장법의 고수를 만나다
23. 이한, 장법의 고수를 만나다.
호장주 같이 한 지역을 대표하는 유력자에게는 여러 가지 덕목이 요구되는 법이다.
우선 재산이 많아야 한다.
그것도 단순히 돈이 많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종류의 재산이어야 한다.
농업을 하는 곳이라면 대규모의 토지를, 광업을 하는 곳이라면 광산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상업 지역의 실질적인 지배까지 겸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그리고 인망이 있어야 한다.
사람들에게 후하게 베풀어야 한다.
호구처럼 퍼주라는 것은 아니다.
도움이 간절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기댈만한 사람으로 인식되는 정도면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단순히 돈이 많고 인망이 있는 정도로는 존경받는 부자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한 지역을 대표하는 유력자라고는 할 수 없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힘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을 무시하거나 함부로 대했다가는 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고, 지역 공동체에 위험이 되는 자를 처벌할 수 있다.
호장주가 무당의 속가제자로 무공을 익히고, 여러 무림인들을 가문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이유가 바로 그래서였다.
언제든 필요하다면 불러서 쓸 수 있는 낭인방을 우대한 것 역시 같은 이유였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작은 산에는 작은 산에 어울리는 작은 맹수가 사는 법이니까.
하지만 무당산에서 절정급의 고수가 내려와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다.
높은 산 깊은 골에 사는 거대한 맹수가 작은 산까지 돌아다닐 때도 있다는 것을.
거대한 맹수는 미친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산발한 흰머리에 찢어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맨손으로 날뛰는 그의 모습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채석장에서 처음 마주친 그는 경고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부터 해왔다.
그에게 가까이 접근했던 10여 명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사방으로 튕기듯 나가떨어졌다.
죽은 자는 없었지만 멀쩡하게 일어나는 자도 없었다.
어딘가 한 군데는 반드시 부러져 있었다.
단 한 수에 10여 명을 제압하다니!
더구나 총관까지!
총관의 실력은 호장주 자신과 별로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실전경험에서 좀 떨어진다고 할까?
하지만 제압하려고 한다면 만만하지 않다.
오히려 죽이는 것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호장주는 즉시 폐광 입구로 물러서려고 했다.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뒤로 물러서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장법이었다.
산발한 노인은 물러서는 호장주의 일행을 따라오며 연신 경력을 날렸다.
위력은 약했다.
일류급에 가까운 무림인인 호장주라면 어렵지 않게 막아낼 정도였다.
호장주가 데려온 낭인을 때려잡을 수 있을 정도, 딱 그 정도의 위력이었다.
하지만 호장주는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끊이지 않고 날아오는 경력에 상대의 내공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발한 노인의 장법이 청륜 도장의 검법에는 못 미칠지 모르지만 내공은 아니었다.
절정급의 무림인과 비견하는 내공이라니!
무기를 들지 않았음에도 무기를 든 사람을 압도했다.
손은 강철과도 같았고, 내력은 마르지 않는 샘 같았다.
호장주는 상대가 최소 일류, 어쩌면 절정급의 무림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으로서는 절대로 맞상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호장주는 더욱 빠르게 폐광으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호장주의 그런 행동이 산발한 노인의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폐광 쪽으로 물러서는 와중에도 근처의 낭인들을 여럿 때려잡으며 날뛰던 노인이 호장주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호장주는 전력으로 조양검법의 방어식을 휘두르며 몇 걸음 물러섰다.
그것으로 자신에게 날아온 경력을 파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반격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폐광을 향해 물러설 뿐이었다.
그러나 자신처럼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는 자는 몇 명 되지도 않았다.
간혹 너희도 잊지 않고 있다고 상기시키듯 낭인들에게 경력을 날릴 때마다, 대부분의 낭인들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했다.
저 공격을 피하는 것은 낭인들에게 불가능한 요구였다.
낭인들은 늙은 광인이 손짓할 때마다 몇 장씩 날아가 버렸다.
급소를 잘못 맞은 자는 그대로 즉사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팔다리 하나 정도는 부러졌다.
낭인이 아니라 일반인을 데려다 놓아도 별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수준 차이가 너무 심했다.
청륜 도사가 와야 했다.
그러나 호장주의 바램과 달리 청륜 도장이 아니라 적이 먼저 늘어났다.
산발한 채 날뛰는 늙은 광인도 상대하기 버거운데 이번에는 광대가면을 쓰고 있는 자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광대가면을 쓴 자는 나타나자마자 고함부터 질렀다.
“미친놈아! 이렇게 다 부숴 놓으면 어떡해!”
“고쳐 쓰면 되잖아.”
“귀찮게 고쳐 쓰라니! 뼈가 다시 붙으려면 며칠이나 걸리는지 알아! 그냥 얌전히 기절만 시켜놓으면 되는 일이잖아.”
“어차피 다 쓸모없는 놈들이었어. 여기서 쓸만한 것은 저놈 하나야. 저놈은 조심스럽게 몰았으니 알아서 챙겨가.”
산발한 노인이 가리킨 것은 호장주였다.
호장주는 숨을 들이켰다.
왜 자신이 상처 하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겨우 하나? 나는 좀 더 있다고 들었는데?”
“나머지는 폐광 안에서 자고 있을 거다. 내가 근사한 함정을 하나 만들어 두었지. 그곳에서 자고 있는 자들 중 몇은 자네가 원하는 일류급 무림인들이야. 저기 들어가서 싱싱한 재료를 그냥 주워 오기만 하면 돼.”
호장주는 산발 노인의 말에 자신이 휘말린 일이 보통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문파 간의 대립이나, 상대방의 약점을 잡기 위한 조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일류급 무림인들을 향해 싱싱한 재료라고 하다니!
도대체 저자들은 정체가?
그러나 호장주는 더이상 추측하기를 멈추었다.
지금은 살아서 도망쳐야 할 때였다.
그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한두 명 만이라도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했다.
소식만 닿는다면 나머지 일은 낭인방주가 알아서 해 주리라고 믿었다.
호장주는 자신의 검을 굳게 쥐었다.
여기서 도망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만한 자는 자신뿐이었다.
“쳐라!”
낭인들 역시 눈치라면 남 못지않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호장주와는 이런저런 의뢰를 통해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오기도 했다.
호장주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를 수가 없었다.
호장주의 명령과 함께 낭인들 역시 적에게 달려들었다.
일방적이었지만 격렬한 전투가 잠깐 벌어졌다.
이한과 청륜이 폐광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바로 그런 상황에서였다.
“컥!”
낭인 한 명이 산발한 노인의 주먹 한 방에 허공에서 한 바퀴를 돌아서 쓰러졌다.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즉사였다.
폐광에서 나오자마자 그 모습을 본 이한은 즉시 산발한 노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청륜은 이미 광대가면을 쓴 자에게로 향한 후였다.
그자의 옆에는 호장주가 쓰러져 있었다.
10여 장이 넘는 거리를 단숨에 좁힌 이한은 산발한 노인을 향해 연달아 칼로 내리쳤다.
세 번의 공격을 한 초식으로 묶어낸 연환식이었다.
삼단삼극권의 금기를 기반으로 하는 내공이 이한의 손을 타고 흘렀다.
사람의 몸은 물론이고 바위라도 쪼갤 만한 위력이 칼을 통해 발휘되었다.
산발한 노인은 주먹으로 이한의 칼을 마주 부딪쳤다.
아무것도 없는 맨주먹을 이한의 칼에 들이댄 것이다.
당장이라도 주먹이 두 쪽 나고 피가 솟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먹과 칼 사이에서 보이는 것은 불꽃이었다.
철과 철이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주먹이 강철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강철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철이라면 분명히 흠집이 났을 테니까.
[경맥 손상! 복구 시작합니다!]
이한은 튕기듯 반발하며 역류하는 내공에 고통을 느꼈다.
만약 경맥이 약한 자라면 가벼운 내상을 입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강한 반탄력이었다.
상대의 주먹에 실린 기운이 이한을 압도한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내공의 양이 너무 차이가 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었다.
이한은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반탄력에 몸을 실어 가볍게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이한을 향해 산발한 노인은 지체하지 않고 따라 붙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연달아 허공을 격해 때리듯 경력을 쏘아냈다.
이한은 고스란히 그 공격을 맞아야 했다.
칼을 휘둘러 경력의 날카로움을 파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심지어 몇 번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칼이 부러질 정도였다.
그래도 덕분에 공격은 대부분 막아낼 수 있었다.
단지 그 여파로 약간 벌리려던 거리가 거의 10장은 될 정도로 벌어지기는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멀리서 허공을 격하고 연달아 경력이 날아온 것이다.
한방 한방이 묵직하게 때려오는 것이 쉽게 막을 수 있는 위력이 아니었다.
단전을 흔들고 경맥을 찢으며 뼈를 부순다.
내공에 근거를 둔 공격의 위력을 말할 때 흔히 언급하는 내용이다.
지금 이한을 향해 날아오는 경력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제대로 맞는다면 단숨에 병신이 되거나 죽는다.
이한은 소림의 무공인 백보신권이 생각났다.
격산타우니, 침투경이니 하는 무공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경지를 구현했다고 하는 무공이다.
백보신권의 고수는 백보 밖에 있는 바위도 일격에 부술 수 있다고 한다.
이한으로서는 쉽게 체화하기 힘든 종류의 무공이다.
주먹으로 때리고, 칼로 찌르고 베고, 둔기로 치는 것은 자연스럽다.
어떤 식으로 공격이 이루어지고, 공격에 맞을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몸은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백보신권 같은 종류의 무공을 두고 본능적으로 반응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뭔가 날아온다고는 하는데 보이지는 않고, 그 속도를 알 수도 없다.
심지어 궤적도 모른다.
만약 이한이 여전히 내공을 익히지 않은 상태였다면 뭐가 뭔지도 모르는 상태로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공을 익히고 있는 지금, 이한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있었다.
나노 역시 마찬가지였다.
[홀로그램 기능을 이용하여 공격의 궤적을 표시합니다.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차라니!”
[오차의 교정을 위해서는 충분한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가까이 접근해 주십시오. 상대방의 내공 흐름을 분석하고 싶습니다.]
이한은 이를 악물고 앞으로 움직였다.
대지에 두발을 굳게 두고 한발한발 전진했다
토기를 근본으로 둔 기운이 일어나 이한의 몸을 보호했다.
산발한 노인의 앞에 도달하자마자 내공이 발산되어 경력으로 화한 덩어리가 하나 또 날아왔다.
이번에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고 격렬한 기운이었다.
그러나 이한은 토기의 힘을 빌려 경력을 밖으로 쳐낼 수 있었다.
경력은 힘도 기세도 잃지 않은 채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보다 못한 위력에도 칼은 부러졌지만, 삼단삼극권의 내공이 실린 손은 멀쩡했다.
“황보세가의 놈인가? 그런 것치고는 오행권을 이상하게 쓰는 놈이구나.”
“내 장법을 보고 황보세가를 떠올릴 정도라니. 아무래도 노인장에게 들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은데.”
“어린놈아. 황보세가의 가주가 와도 나한테 함부로 뭐라고 못 해.”
산발한 노인의 손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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