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절정 초입일까?
33. 절정의 초입일까?
실패하든 성공하든 집부령을 향한 암살 시도가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 황실의 입장이었다.
어차피 서로를 살피느라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구태여 시끄럽고 거창하게 일을 벌이지 않아도 알 사람은 다 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한 역시 그러한 사실을 대충은 짐작했다.
그래서 한결 편하게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물론 계획을 세우고 바로 다음 날 쳐들어가는 짓을 벌이지는 않았다.
이한이 하려는 것은 암살이지 자살이 아니다.
충분한 준비를 하기 전까지는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마음이 급한 것은 일을 시키는 쪽이지 일을 하는 쪽이 아니니까 말이다.
황력은 그런 점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말로 재촉하기보다는 대가를 미리 안겨주는 것으로 이한을 압박했다.
이한이 황실의 명령을 따르는 대가로 요구한 것을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모두 가져다 준 것이다.
심지어 관직조차도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어사교위를 고려하고 있다며 알려줄 정도였다.
어사교위라면 품계는 그리 높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감찰 조직인 어사대의 일원이다.
가짜 도사들을 추적하고 그들이 가진 비밀을 알아내야 할 이한의 입장에서는 꽤나 괜찮은 명함이었다.
나노 역시 전달받은 오행심법과 오행권을 분석하며 즐거워했다.
[매우 흥미롭습니다. 원류는 역시 다르군요. 삼단삼극권과 심법, 황보상의 무공 시연을 관측해서 분석 후 재구성한 나노식 오행심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 정도의 여유를 주시면 통합해 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환단은 그다음에 먹을까?”
[그렇게 하십시오. 시뮬레이션을 담당하는 뇌 속 기관과 신체의 강화를 담당하는 관리 기관은 각각 다른 나노머신에 의해 운용되고 있지만, 만약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동시에 두 가지 일을 진행하는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내공 운용에 대한 충분한 데이터를 쌓고 복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황력이 가져다준 환단은 무당의 태청단이었다.
태청단은 한갑자의 내공을 쌓을 수 있게 해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보물이었다.
이한이 이미 먹어본 조화신단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화산의 자소단과 맞먹을 정도라고 하면 될까?
무림의 고수들, 특히 경험이 충분하고 오랫동안 수련을 해왔지만,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자들이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만한 귀물인 것이다.
연단파에 속하는 무당의 도사들이 수백 년에 걸쳐서 황궁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태청단씩이나 되는 환단을 이렇게 간단하게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한은 나노의 제안대로 하루가 지난 후 태청단을 복용했다.
보다 안정적인 복용을 위해 나중으로 미루는 것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태청단을 복용하고 절정급의 무림 고수에 한 발이라도 걸쳐야 이번 암살행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이라니.
의도가 너무 투명해서 오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
태청단을 먹는 느낌은 조화신단을 먹을 때와 비슷했다.
입에 넣는 순간 물처럼 변하면서 자연스럽게 목을 넘어가는 청량한 느낌이었다.
이것은 두 환단이 가진 기운이 비슷하다는 뜻이다.
둘 다 도교 문파에서 나온 환단이라서 그런 모양이었다.
이한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만약, 오래전에 우연히 구했던 환단이 조화신단이 아니라 다른 계통의 무림 문파에서 나온 환단이었다면, 황력의 경고대로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았다.
사실 지금도 아슬아슬했다.
[경고! 내공의 흐름이 너무 거셉니다. 경맥이 감당할 수 있는 수치를 넘고 있습니다. 좀 더 강하게 정신을 집중해 주십시오. 손상당한 경맥에 대해 긴급보수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한은 자신의 의지를 벗어나 멋대로 내달리는 내공의 격류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경맥이 찢어지기라도 하는지 온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단전 역시 터져나갈 것은 기세로 회오리치고 있었다.
나노가 깨어난 후로 꾸준히 이한의 육체를 강화한 덕분에 이한의 육체는 단 몇 개월 만에 오랜 기간 동안 내공을 수련한 사람의 육체처럼 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이라.
아마 몇십 년 정도?
몇 개월의 수련 기간과 30년의 내공을 가진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질기고 억센 경맥과 강력하고 튼튼한 단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60년짜리 내공을 한꺼번에 감당할 정도가 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에는 글쎄? 라는 의문기호가 붙을 수밖에 없다.
해봐야 아는 것이다.
한꺼번에 수십 년의 수련을 건너뛰는 것이니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본다고 해도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그래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한과 나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설사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큰 위험은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만약 내공 수련의 기간이 부족한 자가, 이를테면 10년 정도 꾸준히 내공 수련을 했고, 그에 어울리는 육체를 가진 자가 태청단 같은 것을 먹었다면, 갈무리를 제대로 못해서 대부분의 기운이 그냥 몸 밖으로 흘러 나가는 것으로 끝난다.
육체도 의지도 60년의 내공을 잡기에는 한참 부족하니 오히려 안전하다고 할까?
내공이 없는 사람이 환단을 먹으면 무병장수하기만 할 뿐 내공까지 쌓이지는 않는 경우와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감당할 수 없는 내공은 자연스럽게 외부로 발산될 것이고, 사소한 오차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내공은 사람의 의지에 따라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많은 내공일수록 사람의 의지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것이 이한과 나노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이한은 내공없이 오랜 시간 몸을 사리며 살았던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내공이 간절해서 내공을 포기한다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받아들인 내공을 갈무리하고 체화하기 위한 의지를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내공조차도.
60년짜리 내공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순간, 이한은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은 절대로 들어오는 내공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촌장 방일의 손녀가 가진 유전자 데이터를 기초로 해서 만들었다는 이한의 단전은 30년짜리 내공 정도는 손쉽게 다루었었다.
그러나 60년짜리 내공은 아니었다.
그 정도로 강한 단전은 아니었던 것이다.
오랜 시간동안 꾸준한 내공 수련을 하면 그만큼 내공의 양이 불어나고, 그에 어울리게 경맥이 질겨지고 단전 역시 강화된다.
60년을 수련해야 60년의 내공이 쌓이고 60년의 내공을 감당할 정도로 단전과 경맥이 강화된다.
일단 원칙은 그렇다.
그러니 아무리 나노가 지난 몇 개월 동안 단전과 경맥을 꾸준히 강화했다고 해도, 그것이 60년의 시간을 건너뛸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한은 필사적으로 내공의 운용에 매달렸다.
아슬아슬하게 파탄이 날듯 말듯 예민하게 반응하는 내공의 흐름을 다잡기 위해 집중하며 오행심법의 운용에 최선을 다했다.
나중에는 내공의 흐름만 보일 정도였다.
시간의 흐름도, 외부의 변화도, 심지어 나노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보이는 것은 내공의 흐름뿐이었다.
나노는 경맥의 실시간 보수와 단전의 강화에 집중했다.
경맥에 흐르는 내공의 기세에 나노머신이 숱하게 파괴되며 단백질로 돌아갔지만 부서진 것보다 더 많이 그리고 끊임없이 생산하면서 파괴된 숫자를 채우고 손상된 육체를 보수했다.
아직 능숙하지 못한 내공의 운용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경맥이 터져나가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나노의 덕분이었다
그렇게 삼일이 지났다.
이한은 그제야 내공을 온전히 갈무리할 수 있었다.
30년에 60년을 더한 내공의 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 갑자는 넘는 내공을 갈무리하고 체화해 내는 것에 성공했다.
드디어 절정 고수의 최소치라고 할 수 있는 한갑자의 내공을 넘긴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절정 고수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절정 고수가 되려면 자기류의 깨달음을 필요로 한다.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자기 나름의 무공체계가 서야 한다.
그러나 이한은 아직 깨달음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었다.
그럴만한 경험도 아직 쌓지 못했다.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일지는 몰랐다.
그것은 하루일 수도 있고, 평생일 수도 있다.
아니, 시간은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다.
절정 고수의 경지에 들기 위한 한걸음의 진전.
그것이 필요했다.
어떻게 해야 그것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이한은 준비가 끝나자 하루의 휴식을 가진 후 곧장 움직였다.
경사의 서쪽에 위치한 집부령의 저택이 목적지였다.
상서성의 집부령은 위지산이라는 사람으로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진 위씨 세가의 가주이기도 다다.
권문세족, 명문거족.
그렇게 불리는 가문이 경사에서 한 30개쯤 된다.
하나같이 오랜 역사를 가진 거대한 가문들이다.
거대한 가문.
구성원의 숫자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쥐고 있는 권력과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의미에서의 거대한 가문이다.
실제로 위씨 세가의 직계는 불과 10여 명에 불과하다.
오랜 역사가 있으니 방계의 숫자는 제법 되지만, 가주를 정점으로 하는 위씨 세가의 직계는 의외로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은 절대로 적지 않다.
적어도 1할에 달하는 관리가 위씨 세가의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할 정도다.
학맥과 추천으로 엮여있는 끈끈한 관계라서 위지산이 집부령에 있던 없던 상관 없이 발휘하는 영향력이다.
만약 누군가가 관료조직을 접수하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포섭 대상으로 위지산을 꼽을만했다.
그래서 위지산이 암살의 목표가 된 것이다.
뱀을 놀라서 튀어나오게 할 만한 수단으로는 더 이상 좋은 수단을 찾기 어려울 정도니까.
위씨 세가의 저택은 그리 큰 편이 아니었다.
예친왕의 경우 중요한 전각만 해도 30채가 넘는다고 할 정도인데, 위씨 세가의 경우는 모조리 합쳐 봐야 7개에 불과했다.
세가의 직계가 10여 명밖에 안된다고 하니 그 정도로도 부족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는 영향력과는 어울리지 않는 규모였다.
정원과 마당이 상당히 넓은 것이 오히려 특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곳에 이한이 들어간 것은 밤이 깊을 때였다.
슬쩍 담을 넘었지만 그때까지도 알아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문과 담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그저 창을 든 일반인에 지나지 않는 자들이었다.
이한과 같은 사람은커녕 삼류 무림인도 당해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하지만 위씨 세가를 지키는 진짜는 저들이 아니었다.
위씨 세가에 머무르고 있는 식객이었다.
일부는 위씨 세가에서 초청한 사람이고 일부는 소개를 받아서 온 사람으로, 모두 관직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었다.
이한은 자신이 위씨 세가의 내부에 들어서면 감각이 예민한 자들은 금방 알아차리고 경계할 것이라고 보았다.
위지산이 머무르는 곳에 가까이 간다면 대번에 튀어나올 것이다.
그 정도의 능력은 되는 자들이고, 위지산에게 잘 보일 필요도 있는 자들이었다.
이한은 누가 가장 먼저 나오는지 지켜보았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