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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에서 나노머신-47화 (47/78)

47. 움직이는 통로가 먹어 치우는 것

47. 움직이는 통로가 먹어 치우는 것

[경고! 통로가 이동하고 있습니다! 통로가 포함된 지질구조가 덩어리째 움직이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통로의 이상을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나노였다.

다른 사람들도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바닥이 흔들린다!”

“지진인가?”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통로 자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진이나 붕괴로 인해 통로가 흔들리거나 내려앉는다면 모를까, 통로가 통째로 움직인다는 생각은 상식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한에게는 나노가 제공하는 위치정보가 있다.

분명 통로는 움직이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통로가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설마? 말도 안됩니다.”

이한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무시하기에는 그들도 이곳에서 겪는 일이 낯설기만 했다.

무엇보다 쌍수쾌검 종대보가 이한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이한이 종종 꿰뚫어보는 듯한 혜안을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을 몇 차례 경험한 바가 있었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한의 말을 증명하는 일이 벌어졌다.

오른쪽의 벽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통로가 드러난 것이다.

이한의 일행이 가고 있던 통로와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뚫려 있는 통로였다

두 개의 통로 사이에 있던 흙벽이 무너지면서 그대로 바닥에 쌓였다.

그리고 바닥에 쌓인 흙더미는 천천히 바닥으로 흡수하듯 내려앉았다.

어느새 두 개의 통로가 하나로 합쳐져서 두 배로 넓어졌다.

처음부터 그렇게 존재했던 통로처럼 말이다.

그리고 두 배로 넓어진 통로는 다시 슬금슬금 폭이 좁아지기 시작했다.

“통로가 살아있는 것 같군.”

종대보의 말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같이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벽돌과 석재로 건설된 건축물이라면 억지로라도 납득할 수 있다.

무엇인가 이해할 수 없는 장치가 설치되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지금 이한의 일행이 지나가고 있던 통로는 그냥 흙이다.

그런데 움직이기도 하고, 다른 통로와 하나가 되기도 했다.

마치 정해진 규격이 있다는 듯 통로의 넓이가 저절로 조정되기까지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장 통로가 붕괴해야 정상이다.

광산도 지지대를 대야 천장이 무너지지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막 움직이는 데도 천장도 바닥도 멀쩡하다니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통로가 다시 좁아지는 것을 보니 무서울 정도군요. 어딘가가 붕괴해서 통로까지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진법일까요?”

“아까 언가의 소저가 이 산 전체에 천문망혼진이 펼쳐져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것과 관련이 있을까?”

“제가 진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거 이름만 들어도 사람의 감각을 속이는 미혼진 아닙니까? 하지만 통로가 움직이는 것은 눈속임이 아니지요. 보십시오. 지금도 이렇게 벽이 움직이지 않습니까?”

이한은 통로의 가장자리에 금을 그었다.

그렇게하니 벽이 움직이는 것이 더 확실하게 보였다.

오래되지 않아서 그어놓은 금을 벽이 잡아먹었다.

“음. 이런.”

그 모습을 본 종대보는 신음을 삼켰다.

오랜 시간 강호에서 활동하면서 쌓은 경험이 제법 된다고 자부하던 그였다.

그러나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행방불명된 사람들에 대한 수색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런 식이면 이곳에 있는 사람들까지 행방불명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통로가 좁아지다가 아예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해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음. 우리는 주변을 조사하러 왔을 뿐이었지.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물러서는 것이 나을 것 같군. 백초장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종 대협의 의견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곽가상방 사람들을 조사한 후에나 다시 와야할 것 같습니다. 진법에 조예가 있는 사람도 대동해야 겠지요.”

사람들의 결정은 빨랐다.

그러나 늦었다.

되돌아서 이곳을 나가려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어온 통로가 없어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벽에 표시해둔 기호가 없어진 것이다.

이동하고 합쳐지는 통로.

바닥에 흡수되는 무너진 벽.

벽에 표시한 기호같은 것이 남아날 리가 없다는 것을 다들 뒤늦게 깨달았다.

산 내부에 갇힌 것이다.

공포가 사람들을 움켜잡았다.

이한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만능은 아니었다.

숨을 쉬어야 했고, 먹고 마시는 것도 필요했다.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게 오래 견딜 수 있을 뿐이다.

무엇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잡음을 제거하고 필요한 부분만 증폭하겠습니다.]

이한은 발걸음을 멈췄다.

나노가 증폭한 소리는 전투소음이었다.

비명소리와 무기 무딪치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했다.

벽 너머였다.

“왜? 무슨 일이 있는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통로의 벽을 노려보는 이한을 향해 종대보가 물어왔다.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비명소리? 어디서?”

이한은 통로의 벽을 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행권의 묘리가 담긴 주먹이 폭발하듯 불어난 내공의 힘을 빌어서 벽을 쳤다.

일권.

이권.

삼권.

주먹으로 벽을 칠때마다 내공이 급증했다.

주먹 한 번에 성질 변환 한바퀴.

오행의 순환을 따라서 내공의 성질 변환을 일순할 때마다 무에서 유가 생성되는 것처럼 내공이 불어났다.

이한은 경맥에 통증이 느꼈다.

[경고! 내공의 급증으로 인해 경맥이 손상되었습니다. 긴급 보수 작업을 시작합니다. 경맥이 성질 변환을 감당할 수 있는 한계는 앞으로 3번입니다. 더 이상은 안됩니다. 단전은 아직 여유 많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물이라도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고래를 치면 이런 느낌일까?

흙으로 된 벽은 이한의 주먹에서 뻗어나오는 강력한 기운을 몇 번이나 흡수했다.

그러나 다섯번째 타격에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모래로 된 벽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처럼 통로의 벽이 10장이 넘게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또 하나의 통로가 드러났다.

그곳에는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무리가 있었다.

한쪽은 언가 사람들이었다.

언가의 소녀와 노파, 얼굴에 금칠을 한 젊은이들이 보였다.

다른 한쪽은 처음보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가죽 조끼를 하나씩 걸치고 도끼와 곡도로 무장한 모습을 보니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녹림채 사람들이었다.

언가 사람들과 대등하게 겨루는 것을 보면 녹림18채에 이름을 올린 산채 소속임이 분명했다.

언가의 젊은이가 둘, 산적들도 몇 명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쌍수쾌검 종대보는 즉시 산적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천영문의 고수들 역시 한박자 늦게 달려들었다.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게 된 녹림채의 산적들은 당황하는 티가 역력했다.

지금도 자신들의 절반 밖에 안되는 숫자의 적을 제압하지 못해서 고생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습을 당한 것이다.

이러면 승패가 어떻게 날지 뻔히 보였다.

결국 그들 중 하나가 언가의 소녀를 향해 손짓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젠장! 여자를 잡아! 여자를 인질로 해!”

이런 곳까지 교자를 타고 들어올 정도니 인질로서의 가치는 검증된 것이나 다름없다.

잡을 수만 있다면.

그런데 이런 곳까지 교자를 타고 들어올 정도의 사람이 쉽게 잡혀줄까?

뒤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산적들 4명이 동시에 언가의 소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 명은 언가의 노파를 노리고 작은 손도끼를 던지며 달려들었고, 다른 셋은 언가의 소녀를 노렸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다.

언가의 노파를 노렸던 손도끼는 그대로 노파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되던져졌다.

노파를 향해 달려오던 산적은 이마에 도끼를 박은채 허공에서 한바퀴 돌아서 바닥에 떨어졌다.

즉사였다.

소녀를 노렸던 3명의 산적들 역시 별로 좋은 꼴을 보지는 못했다.

교자에 장치되어 있던 암기가 발사되어 그들을 쓰러뜨렸다.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바닥에 누운 그들은 독에 중독된 채 경련하며 죽어갔다.

소녀를 인질로 잡으라고 명령을 내렸던 산적은 그 모습을 보자 희망을 버렸다.

“흑표채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반드시 복수하겠다!”

그는 자신을 잡으려는 언가의 젊은이를 폭뢰장공으로 밀어낸 후 그대로 몸을 빼서 휘파람을 불며 도주했다.

순식간에 통로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머지 산적들은 휘파람 소리를 듣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등을 보였다가 그대로 찔려서 쓰러지는 자도 있었지만, 두 발이 멀쩡한 자들은 대부분 몸을 빼는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도망치는 것까지 성공한 산적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들이 도망칠 곳을 이한이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이한은 산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하자 즉시 움직여서 그들이 도망칠 길부터 막았다.

무기를 꺼낸 것은 그 다음이었다.

이한은 등에 메고 있던 칼집에서 도를 하나 꺼내들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직도였다.

한쪽에만 날이 세워져 있지만, 찌르기에도 베기에도 무난한 무기였다.

그러나 무기의 위력은 무기 자체가 아니라 누가 가지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이한의 직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난하고 평범하다는 평가는 무기에 대한 평가지 일류의 극을 바라보는 이한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

도망치던 산적들 역시 그러한 사실을 금방 알게 되었다.

“비켜!”

“죽어라!”

산적들은 기합이라도 넣는 것처럼 외치며 곡도를 휘둘렀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위협해서 비키게 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상대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도망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이한은 서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직도를 찔러넣었다.

달리면서 무기를 휘두르는 자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산적 같이 무공의 깊이가 얕은 자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한의 눈에는 도처에 약점이 널린 것이 뻔히 보였다.

그래서 약점을 찌른 것이다.

가슴과 목을 찔린 두 명의 산적이 뛰어가던 기세 그대로 앞으로 뒹굴었다.

하나는 즉사, 하나는 치명상.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 뒤를 따라 도망치던 산적들은 그 모습을 보자 다급하게 멈춰섰다.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함정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한은 그들을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오지 않으면 자신이 가면 그만이다.

이번에는 삼단삼극권법이었다.

이한은 손에 칼을 쥐고 삼단삼극권을 시전했다.

검법은 권법의 연장선상에 있는 법.

권법의 초식을 따라 직도가 휘둘러졌다.

금기의 경력을 발산하는 직도를 막을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산적들은 토막쳐졌다.

이한의 직도를 피해 도망치는데 성공한 산적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 언가의 소녀는 종대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종 대협.”

제법 진심이 담긴 인사였다.

관리들과 함께 가기 싫다고 먼저 간 사람 치고는 의외로 깔끔한 태도였다.

“당연히 도와야 했을 일이오. 신경쓰지 마시오.”

종대보도 거리낌이 없다는 태도로 감사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인사치레는 거기까지.

이한은 그들이 서로 인사를 마치자 곧장 바닥을 가리켰다.

“언 소저. 혹시 저런 것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죽은 자들과 흩어진 무기들이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마치 늪에 빠져들어가는 것처럼 통로의 바닥이 그들을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억지로 들어내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두 흙 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터였다.

통로가 생명이 없는 것들을 먹어치우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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