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자연의 기운이 흘러가는 곳
48. 자연의 기운이 흘러가는 곳
생명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을 가진 통로라니!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상상만 해도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이한은 혹시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림의 비전 중에 그런 것이 있을지 궁금했다.
내공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워낙에 다양해서 혹시나 한 것이다.
하지만 이한의 질문에 언가의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시체를 삼켜버리는 통로라니! 진법이나 기관진식에 대해서는 제법 많은 서적을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는 읽은 적도 없어요. 그리고 통로가 움직이는 것은 이해할 수조차 없습니다.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 것인지, 저렇게 움직이는데도 어째서 무너지지 않는지 짐작도 가지 않습니다. 돌이나 철로 만든 기관진식이라면 보이지 않는 곳에 톱니바퀴나 수차 같은 것이 있겠지만, 이곳은 산에 파놓은 통로 아닙니까? 내가 가진 앎으로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언가의 소녀는 바닥을 몇 번 세게 쾅쾅거렸다.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있는 모습이었다 .
“이렇게 단단한데 늪처럼 죽은 사람을 빨아들이기도 하고, 갑자기 무너지기도 합니다. 어떤 원리인지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이기는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를 지켜보면서 일부러 장난이라도 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요.”
알고 보니 언가 사람들은 둘로 갈라진 통로를 확인하기 위해 옆의 통로로 들어왔다가 들어온 통로가 갑자기 막히면서 같이 갔던 사람들과 헤어졌다는 모양이었다.
돌아가기 위한 길을 찾던 중에 마주친 것이 녹림채 사람들이었고 말이다.
“그리고 흑표채를 만나 서로 원한을 쌓았으니 나중에라도 반드시 흑표채를 토벌해야겠습니다. 산적 주제에 감히 진주 언가를 향해 복수 운운하다니!”
아직 어린 소녀인데도 날을 잔뜩 세우고 살기를 흘리는 것이 사람 몇 명 정도는 진작에 담가본 것 같았다.
사천 당문보다야 덜 하지만 진주 언가에 대한 소문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아직 순수하기만 해야 할 어린 소녀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니 진주 언가에 대한 소문이 괜히 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사파 같은 정파라니.
이한은 진주 언가와 얽힐 일이 없도록 주의하기로 했다.
그래도 한가지는 더 확인해야 했다.
여기서 진법과 기관진식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언가의 소녀뿐이니 어쩔 수 없었다.
“언 소저가 천문망혼진이 산 전체에 펼쳐져 있다고 해서 살펴보니 산 곳곳에 놓여진 바위가 산을 타고 흐르는 자연의 기의 방향을 일부러 비틀어서 한곳으로 모으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연의 기를 본다고요?”
무엇인가 믿기 어려운 말을 들었다는 투였다.
그럴 법도 했다.
나노가 제공하는 여러 종류의 시야 중 일부는 무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밤을 낮처럼 보는 야간 투시 같은 것이야 내공을 좀 쌓으면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지만, 열화상 시야나 키를리안 시야 같은 것은 내공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이한은 조금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익힌 무공 중에는 조금 특이한 무공이 있습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볼 수 있지요.”
언가의 소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이한의 말을 듣자 경악하고 말았다.
“어쨌든 그렇게 모여진 기가 우리가 들어왔던 통로로 쏟아붓기라도 하는 것처럼 들어가고 있더군요. 지금도 이 통로를 따라 자연의 기가 맹렬하게 흘러가고 있지요. 저 안쪽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한은 손을 들어서 기가 흘러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 대협은 지금 진법에 의해 비틀린 기의 흐름을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건가요?’
“눈으로 본다는 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기도 어렵군요. 그냥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도 안 돼······”
이한의 확언에 언가의 소녀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곧장 이한에게 달라붙었다.
“역시 비인부전이겠지요? 사문에만 전해지는 비전 같은?”
“언 소저. 이것은 익히고 싶다고 해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타고난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몇 가지 조건을 만족해야 비로소 입문이라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경사에서 지낸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나와 같은 사람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부드럽게 돌려서 한 거절이었다.
이한처럼 다양한 종류의 시야를 가지려면 나노머신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노머신이 인체의 일부로 작동하게 하는 것은 단순히 모체가 되는 나노머신을 주입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신체가 나노머신의 활동을 뒷받침할 정도 강화되어야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이한의 골격계의 상당 부분은 나노머신의 생산과 저장을 위해 나노머신을 주입하기도 전에 개조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호르몬 생산을 위한 별도의 신체조직을 생성한 것은 물론이고 근육과 혈관, 신경까지도 부분적으로 강화되었고, 지금도 계속 강화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덧붙인 기관은 단전이었고.
이한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언가의 소녀 역시 이한이 거절했음을 알아듣고 안타까운 얼굴이 되었다.
“자연의 기운이 흐르는 것을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면, 진법은 이미 9할을 익힌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진법이 제대로 펼쳐졌는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남은 것은 진법의 이름과 어떻게 펼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배우면 그만입니다.”
“그렇습니까? 나중에 진법의 대가를 초청해서 한번 배워봐야겠군요.”
“진법의 대가? 멀리 갈 것 없어요. 내게 배우세요. 늙은 멍청이들은 그냥 과거의 진법을 답습하며 외울 뿐입니다. 이 대협이 구할 수 있는 그 누구보다 내가 더 뛰어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어요.”
지금 당장은 거절당했다고 해도, 한 번 더 기회를 잡아보려는 언가의 소녀였다.
이한의 입장에서 나쁠 것은 없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이한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일 테니 말이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부탁드리지요. 그런데 아직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아! 그렇지요. 질문.”
언가의 소녀는 통로 저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많은 곳에서 적은 곳으로 이동한다.
인위적으로 기를 한곳에 모으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다.
내공을 쌓는 것에 많은 시간이 걸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초니 영물이니 하는 것을 보기 힘든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내공을 쌓는 것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기 때문에 심법 같은 수단을 사용해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처럼 진법 역시 자연의 이치를 비트는 수단이다.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자연의 기가 흘러가도록 만드는 것이 진법이다.
그런데 자연의 기운이 모여서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가능한 일이기는 하다.
쓸데없어서 그렇지.
언가의 소녀는 숨을 들이켰다.
갑자기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교자를 매고 있는 황동인에게 잠시 시선을 두었다.
“천문망혼진은 미혼진의 일종입니다. 미혼진은 대개 사람의 감각을 교란시켜서 방위와 시간을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요. 지켜야 장소가 있다면 미혼진은 좋은 수단입니다. 그런데 천문망혼진은 여기에 더해서 사람의 기력까지 빼앗습니다.”
“내공을 빼앗는다는 겁니까?”
“사람이 가진 모든 기운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내공도 포함이 되지요. 원래 진법은 자연의 기운을 이용해 작동합니다. 사람이 쌓은 내공은 물론이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자연의 일부이니 사람이 가진 기운이 진법에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미혼진이 왜 사람의 감각에 영향을 주겠습니까? 하지만 천문망혼진은 단순히 감각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천문망혼진이 펼쳐진 곳에 사람이 들어가면 방위를 구별하지 못하고, 빙빙 돌다가 결국은 기력이 쇠해서 죽고 말지요. 진법의 이름에 망혼이라는 말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빼앗은 기운은 진법에 남아서 더욱 진을 강화하지요.”
“그런데 그게 내 질문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모르시겠습니까? 기운이 흘러가는 모양을 직접 보신다면서요? 진법은 원래 자연에 있는 기의 흐름을 비트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의 기운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기운이든지 가리지 않고 흡수하는 절진이 모든 기운을 모아서 한곳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그곳에 뭐가 있을 것 같습니까?”
“설마 누군가가 내공수련이라도 하는 걸까요?”
“강물을 통째로 입에 퍼붓는 꼴입니다. 기경팔맥이 터지고 단전도 깨질 겁니다.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견딜 수 없어요. 하지만 생명이 없는 것이라면 모르겠군요.”
생명이 없는 것?
이한은 진주 언가가 진법은 물론이고 강시에도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것은 그뿐이었다.
아니, 하나 더.
이한과 종대보가 이곳까지 온 이유.
공간이동과 관련된 무엇인가가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싶었다.
설마 혼천감에서 사라진 탑이 통로 저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것은 아니겠지?
이한은 옆에서 대화를 듣고 있던 종대보를 보았다.
“종 대협.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있기는 한가? 뭐가 되었든지 어차피 나가려면 통로의 끝까지 가야 할 걸? 설마 그곳에는 출구가 있겠지.”
통로는 계속 위로 향했다.
경사도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 위였다.
그리고 한참을 지나자 이번에는 내리막으로 변했다.
가면 갈수록 경사는 점점 급해졌다.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동안 몇 차례 멀리서 비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한의 일행이 발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생명이 없는 것은 통로가 흡수했을 것이고, 살아있는 자는 떠났을 것이다.
통로가 아예 변했을 수도 있고.
[들어온 입구보다 낮은 지역에 진입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지하입니다.]
이한은 차가운 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것처럼 거센 기운의 흐름이 통로 저편으로 내달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엇인가 게걸스럽게 폭식하는 것의 입에 쏟아붓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지하로 들어온 순간부터는 흙으로 된 통로가 아니라 벽돌로 된 통로가 섞이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은 흙벽이고, 일부는 벽돌벽이고, 어떤 곳은 석회벽으로 두서없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때그때 재료가 있는 대로 만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통로 역시 하나가 아니었다.
동시에 여러 개의 통로가 입구를 드러냈다.
“아무래도 미로인듯 하군.”
종대보의 말에 모두가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언가의 소녀는 이한을 바라보았다.
“기운을 볼 수 있다고 했지요? 이 대협.”
“그렇습니다. 언 소저.”
“그 기운이 어디로 가고 있나요?”
“저곳으로 가고 있군요.”
이한은 손을 들어서 가장 왼쪽에 있는 통로를 가리켰다.
벽돌벽이 있는 통로였다.
물이 수로를 타고 흐르는 것처럼 위에서 쏟아져 들어온 자연의 기운은 대부분 이한이 가리킨 통로로 밀려들어 가고 있었다.
이한의 일행 역시 그 통로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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