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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2화 (2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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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법사 한석구의 별명은 원탁의 수호자다.

그건 절반 정도는 칭찬이고 나머지 절반은 욕이다. 원래 너무 거창한 별명은 비꼬는 의도가 강하지 않은가.

한석구가 원탁을 지키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직의 존속을 위한 노력은 언제나 개인의 희생을 동반하는 법이다.

그러니 모두가 조직 운영에 만족할 수는 없다. 오늘 한석구를 찾아온 이민세라는 남자처럼.

“그래, 오늘부로 원탁을 탈퇴하겠다고?”

아침부터 대뜸 찾아와 원탁 탈퇴를 선언한 이민세를 보며 한석구는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웃지? 저 성질머리에 원탁을 탈퇴하겠다고 하면 당장 불호령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일 아닌가?

어쩌면 이젠 그 성격이 조금 누그러졌을지도 모른다. 원탁의 탈퇴에 대해선 늘 날 선 반응을 보이는 한석구지만 언제까지고 그러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원탁을 탈퇴하겠다는 이야기도 이번엔 순조롭게 넘어갈지도 모른다······.

“아침 댓바람부터 그게 뭔 소리냐고 말하진 않겠어. 왜 그러는지 대충 짐작이 가니까.”

한석구는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그는 데운 우유를 한 모금 마시고서 말했다.

“의뢰를 받을 때마다 원탁을 통해야 하는 게 아니꼬웠겠지? 원탁을 통해서 일거리를 받으면 보수를 좀 떼줘야 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을 테고. 그것 말고도 불만은 많았을 거야. 이거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마라, 잔소리를 오죽 해댔어야 말이지.”

이민세는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한석구의 말대로 원탁은 플레이어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게 많았다. 일도 원탁을 통해서 받아야 하고 너무 위험할 것 같은 의뢰는 사전에 차단했다.

게다가 일을 끝내고 나면 보수에서 일부를 원탁에 떼줘야 했다. 명목상으로는 중개비라지만 애초에 원탁이 없어도 충분히 일을 받을 수 있는데 그딴 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건 중개비가 아니라 사실상 상납금이었다. 조직에 속해 있으니 군소리 말고 바쳐야 하는.

이민세는 제법 실력 있는 마법사였고 이제는 원탁에서 독립해 스스로 일하길 원했다. 그는 홀로서기에 성공할 자신이 충분히 있었다.

이 정도 실력이면 뭘 하든 먹고 살 수 있었다. 귀족의 마법사가 되든, 용병이 되든, 아니면 뭐가 되든 간에.

이제 원탁의 간섭을 받으며 돈까지 떼이는 건 사양이다. 그러니 원탁을 탈퇴하겠노라고 분명히 말해야겠다.

이민세가 그런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한석구가 웃으며 말했다.

“너 대전이 초반 때 기억나냐?”

대답할 시간은 없었다. 한석구가 바로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땐 세상이 참 혼란스러웠지. 이곳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까지도. 그 왜 같은 플레이어를 죽이면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던 미친놈이 하나 있었지 않나? 그거 말고도 웬 영주한테 붙잡혀서 개처럼 부려지던 놈도 있었고.”

갑자기 웬 옛날이야기인가. 이민세가 미간을 좁히자 한석구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말했다.

“그걸 누가 다 수습했게? 원탁이야. 정신 나간 놈들이 똥 싸지르고 간 거 다 치운 게 우리라고. 네가 왜 길 가다가 칼 안 맞는 줄 아냐? 왜 마탑에서 널 납치해다가 배 못 가르는 줄 알아? 원탁이 뒤에 있어서야.”

“그건······.”

“왜, 내 말이 너무한 비약처럼 들리나? 원탁이 없어도 플레이어들이 전부 다 하하호호 웃으면서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솔직히 말해서 난 그럴 수 있어. 근데 너 같은 새끼들은 아니야.”

한석구의 몸에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의 분노를 대변하듯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마력이 이민세의 목을 졸랐다.

켁켁. 이민세가 자기 목을 부여잡고 기침을 하든 말든 한석구의 말은 이어졌다.

“알겠어? 너 같은 새끼들은 아니라고. 손에서 불 나오고 얼음 나오고 그러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근데 같은 마법사로서 내 분명히 말하는데, 넌 그깟 알량한 재주 자랑하다가 길바닥에서 칼 맞고 죽을 놈이야.”

왜 이렇게 화내나? 원탁에서 나가려고 했다고 이런 모욕적인 말까지 들어야 하나? 이민세는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감히 한석에게 대들 생각은 하지 못한다. 같은 마법사라도 두 사람 사이에는 까마득한 격차가 있기에.

“너 같은 새끼들의 특징이 뭔지 알아? 자기가 누리는 건 생각하지 못하고 그 대가에만 불평해. 넌 원탁이 나한테 대체 뭘 해줬냐고 생각하겠지? 해주는 건 좆도 없으면서 귀찮게 간섭만 한다고 생각하겠지? 내 말 틀리나?”

이민세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강력한 마력에 목이 졸려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정말 원탁이 너희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않고 돈만 뜯어갈까? 아니야. 우리가 왜 꼭 원탁을 통해서 의뢰를 받으라고 하는 줄 아나? 너처럼 대가리에 든 거 없는 새끼들이 뭣도 모르고 이상한 의뢰 받아서 뒈지는 꼴 막으려고 그러는 거야. 하나 말해주는데, 실력에 맞지도 않는 의뢰 받아서 개죽음을 당한 놈이 열 손가락을 넘어가.

또 그리고 뭐가 불만이냐? 우리가 중개비 뜯어가는 거? 씹새, 넌 조직이 그냥 굴러가는지 알지? 세상 모든 일은 돈이야. 돈이 없으면 얼마나 강한 조직이든 결국 무너진다고. 그럼 원탁이라고 다를까? 아니면 뭐 원탁은 돈이 땅에서 솟기라도 하나? 아니야. 우리도 돈이 있어야 굴러가.

그래서 너희들한테 돈 받는 건데, 그게 불만이냐? 우리가 네 돈 받아서 삥땅이라도 치는 것 같아? 멍청한 새끼. 세상에서 자기만 똑똑하고 잘난 줄 알지.

내가 왜 너 같은 새끼들이 탈퇴 못 하게 막는 줄 아나? 괜히 다른 놈들까지 헛바람 들게 만들어서 마음 심란하게 만들거든. 뒈질 거면 혼자 뒈질 것이지 하는 짓거리가 참 역겨워.”

흘러나오는 마력은 더욱 강해졌다. 이민세의 얼굴은 빨갛게 물들다 못해 이제는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나는 너 같은 새끼를 몹시 혐오해. 아는 건 개뿔도 없는 게 제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설치고 다니지. 내 마음 같아선 너처럼 혐오스러운 놈들을 싹 청소해버리고 싶은데 그러지 않지. 왜 그런 줄 아나?”

“왜, 왜······ 켁.”

“네가 같은 한국인이니까 그런 거야. 미우나 고우나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살려주고 지켜주는 거라고. 알았나? 내가 뭔 말하는지 알겠어?”

“케흑······.”

목이 너무 졸려 이민세의 눈알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한석구가 사납게 흩뿌렸던 마력을 갈무리하며 말했다.

“대답해, 새끼야. 내 말 알겠어?”

“케, 케켁···.”

목을 조르던 마력을 완전히 거두자 이민세가 연신 기침을 했다.

“아, 알겠······.”

“알겠어? 정말 알겠으면 됐어. 그러면 이제 꺼져.”

한석구가 다시 한번 외쳤다.

“알겠으면 탈퇴가 어쩌고 하는 좆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꺼―져!”

강대한 마력을 가진 마법사의 외침은 그 자체로 하나의 마법이다. 창문이 흔들리고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이 깨져 안에 담겨 있던 우유가 줄줄 흘렀다.

이민세는 게임으로 치면 혼란 상태에 빠진 것처럼 비틀거리더니 곧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그제야 한석구의 분노가 사그라든 것처럼 흔들리던 창문이 멈췄다.

“하여튼 씹새끼들, 은혜를 몰라요. 내가 씨발 나 좋자고 이딴 고생하는 줄 아나? 나도 원탁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어디 왕국의 궁중 마법사나 하면서 떵떵거리고 살 수 있는데······.”

“저기······.”

방 안에는 사실 한석구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에게 데운 우유를 전달하러 왔던 접수원 서수민도 함께 있었다.

원래는 우유만 주고 바로 나가려고 했는데 이민세가 들어와 한석구의 화를 돋우는 바람에 꼼짝없이 갇혀 있었다.

‘저 또라이, 하여튼 탈퇴 이야기만 나오면 발작해서······.’

서수민은 원탁에 대한 한석구의 과도한 집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제 입으로는 한국인이 어쩌고 하지만 실은 원탁의 수장이라는 자리에 집착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자꾸만 구성원들이 나가겠다고 설치면 제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우니 그리 발작하는 것이고.

전부 다 자기 생각일 뿐이지만 그럴듯하다고 느끼긴 했다. 같은 한국인이니 뭐니 해도 결국 여기 오기 전까지는 얼굴도 모르던 남 아닌가?

“어, 그래. 수민이, 아직 안 나가고 있었어?”

“아, 그게······.”

“내가 또 흥분해서 험한 꼴 보여줬네. 미안해. 얼른 가서 일 봐. 너 보려고 원탁 찾아오는 손님도 많다던데.”

한석구가 농담을 건넸지만 서수민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또 똑똑 소리가 났다.

“수민이? 뭐 두고 간 거 있나? 찻잔이라면 내가 갖다 둘 테니까······.”

“찻잔은 뭔 찻잔?”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서수민이 아니었다. 한석구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외쳤다.

“김창!”

“몇 년 헤어졌다가 만난 가족이냐. 뭘 그렇게 반가워해?”

무심하게 내뱉는 말투가 익숙했다. 한석구가 김창을 보며 싱글벙글 웃었다.

“저번에 그리 매몰차게 떠나더니 다시 돌아온 걸 보면 원탁이 그립긴 한 모양이지? 돌아온 걸 환영한다.”

“뭔 헛소리냐. 그냥 할 말 있어서 온 건데.”

“무슨 할 말?”

“용이 나 죽이려고 하더라.”

“뭐?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김창은 광산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자신이 신성을 얻었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던 한석구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하여튼 씨발, 이런 상황인데 원탁을 탈퇴하겠다는 씹새끼가 다 있네.”

“내 얘기냐?”

“너 말고. 하, 세상이 진짜 말세인가? 뭔 이런 개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나지? 저번엔 웬 멍청이가 악마숭배자가 되질 않나, 그것 말고도······.”

한석구가 말끝을 흐리는 걸 보고 김창이 물었다.

“내가 없던 사이에 또 뭔 일이 있었나?”

“있었지. 복자 만난 적 있냐?”

“내가 그 새낄 왜 만나?”

“이젠 좀 화해해라. 사춘기 애새끼도 아니고. 어쨌든 저번에 복자가 의뢰 때문에 대륙 북부까지 간 적이 있거든? 근데 거기서 웬 시체 군대를 만났다더라.”

“시체 군대?”

“그래. 그 왜 있잖아, 언데드인가 하는 놈들. 그걸 누가 부리는진 몰라도 규모가 제법 되는 것 같던데. 리치나 뭐 그런 놈이 있는 모양이야.”

리치는 강력한 네크로맨서다. 오랫동안 힘을 축적한 리치는 용과 호각을 이룰 수 있다던데 그런 게 북부에 자리 잡고 있다면 제법 위험한 일이 될 터다.

“정복자한테 토벌하라고 시키지.”

“걘 바빠. 원탁의 랭커 중에서 유일하게 내 부탁을 잘 들어주는 놈이거든. 다른 놈들은 그냥 이름만 올려두고 한량처럼 놀기만 하는데 하여튼 위기감이라는 게 없어.”

한석구와 정복자 둘 다 원탁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들이다. 그들만큼 강하거나 더 강한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 시키는 일에 비협조적이라 어지간한 일은 둘이서 해결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수고 좀 해주면 안 되겠냐?”

“내가?”

“그래, 북부로 가서 정찰만 좀 해주면 돼. 북부에서 의뢰가 들어왔어. 시체 군대를 토벌하기 전에 그 규모를 제대로 알고 싶다고 하더군. 이런 일은 플레이어가 제격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북부는 먼데.”

칼라드는 대륙 남부에 있는 도시다. 거기서 북부까지 가려면 한 달은 넘게 걸리는 여정이 된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북부의 대도시로 곧장 가는 스크롤이 있으니까.”

상당히 비싼 물건일 텐데 그냥 주겠다는 걸 보면 한석구가 이번 일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걸 줄 테니 내 부탁 좀 들어주겠어? 물론 보수는 따로 준비할 거야.”

“돈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지. 여기 더 머물렀다간 네가 귀찮게 굴 게 뻔하니 바로 북부로 떠나겠다. 그리고 보수는 선금으로 줘.”

“아니, 내가 뭘······.”

한석구는 투덜거리면서도 김창에게 가죽 주머니 한 개를 건넸다. 받아보니 묵직했다.

“설마 네가 돈 떼먹고 가진 않겠지. 일 끝나면 돌아와. 네 자리는 늘 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해.”

김창은 그대로 방을 나섰다. 하여튼 정 없는 새끼라니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데 잠깐 회포도 풀지 않고 그냥 가나?

하기야 임무가 급하니 빨리 가주면 물론 좋은 일이지마는······.

한석구가 혼자 중얼거리며 깨진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는 걸 보고 반색하는데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의장님?”

한석구의 대외적인 직함은 원탁의 의장이었다. 원탁은 본래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기 위한 곳이니까.

“수민이? 또 왜?”

“원탁 앞으로 편지가 와서요. 그런데 이거 요정 대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는데요.”

“뭐?”

깜작 놀라서 얼른 편지를 뜯어보니 내용이 이랬다.

우리가 지금 누구를 찾고 있는데 도움 좀 줘라. 아무래도 플레이어인 것 같은데 우리가 걔 좀 잡아다 죽여도 되겠느냐?

대충 그런 내용이었는데 한석구가 미간을 찡그렸다.

“누굴 찾는데 이 지랄이야?”

서수민이 한석구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답장 보낼까요?”

“뭐라 보내긴?”

한석구가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자 편지가 한 줌의 재로 변했다.

“가서 엿이나 먹으라 그래.”

걔넨 엿이 뭔지도 모를 텐데. 서수민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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