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망겜 속 칼잡이-23화 (23/200)

23

* * *

대륙 북부에는 왕이 없다.

먼 옛날에는 왕이 있었으나 전쟁으로 왕국이 무너지고 난 후에는 여러 귀족이 북부의 주인을 칭하며 다투고 있을 뿐이다.

그중에는 탈리얀 대공이 있다. 그는 왕이 되기엔 너무 작고 영주에 머물기엔 너무 커서 대영주라 불린다.

탈리얀 대공이 지배하는 영역의 크기는 북부 귀족 중 독보적이다. 그에게 약간의 운만 따랐다면 북부는 다시 한번 왕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전부 의미 없는 가정이다. 탈리얀 대공은 죽었고, 죽은 사람은 왕이 될 수 없으니까.

“내 아버지께선 전사셨지.”

눈처럼 새하얀 방 안에서, 한 남자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북부의 남자들은 대개 그래. 전사로서 태어나 전사로서 죽길 원하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셨다. 하지만··· 이런 죽음을 원했던 건 아니었어. 전사는 전장에서 죽어야 해. 눈사태에 휩쓸려 죽을 게 아니라. 내 아버지가 일개 전사 따위가 아니라 위대한 탈리얀 공작이라면 더더욱 그래야지.”

남자는 탈리얀 공작의 장남이었다. 이름은 에르단이라고 했다.

“이런 죽음은 어디 가서 자랑할 것도 못 돼. 우리 가문을 노리는 적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기 딱 알맞지. 그러니 내 아버지의 위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선 이 모욕적인 죽음을 씻어내려야만 한다.”

에르단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검을 뽑아 탁자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복수의 때가 왔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방 안에 있던 모두가 바르르 떨리고 있는 단검을 쳐다봤다. 탈리얀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단검은 본래 대공이 쓰던 것이고 눈사태 속에서 건진 유일한 물건이기도 했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복수를! 탈리얀 가문의 복수를!”

함성처럼 울리는 외침에 에르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는 그 함성을 잠깐 즐기다가 곧 고개를 돌려 한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우리의 사정은 들었겠지. 그러니 우리의 복수를 도와주시겠소, 김창?”

염병, 이게 대체 뭔 개짓거리야. 김창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그가 한석구의 의뢰를 받아들여 북부의 대도시인 카셀로 온 게 어제의 일이다. 어제는 휴식도 취할 겸 여관에서 쉬었고 오늘 아침 일찍 의뢰인인 탈리얀 대공을 만나러 왔다.

그런데 가서 사정을 들어보니 탈리얀 대공이 며칠 전에 죽었단다. 그것도 눈사태에 휩쓸려서.

그것만 해도 어이가 없는 일인데 에르단은 지금 가신들을 전부 불러 대공의 복수를 하자고 난리를 치고 있다. 하지만 대체 뭔 수로?

세상에 산사태가 나서 죽은 사람의 복수를 하는 방법도 있나? 산 정상에 올라가서 바닥을 찌르기라도 하면 되나? 그럼 복수가 끝나나?

어이없는 소리를 당당하게 하는 것도 재주다. 김창은 감탄하며 물었다.

“대공은 산사태에 휩쓸려 죽었다면서? 그런데 뭔 복수? 자연에 복수하는 법도 있나? 산을 아주 날려버리게?”

“그것도 방법이겠지만 그런 무식한 짓거리를 할 수는 없지. 그랬다간 산이 무너져 내려 도시를 휩쓸어버릴 테니까.”

“그러면?”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원숙한 지도자의 느낌이 물씬 나는 에르단은 자기 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산사태라는 건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오. 자연적으로 일어나기도 하지만···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도 있지.”

“누군가 일부러 산사태를 일으켜 대공을 죽였다는 건가?”

에르단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를 노리고 산사태를 일으킨 건 아닐 거요. 아버지가 거길 지난다는 건 가족 외에는 몰랐을 테니까. 언제 올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노리고 며칠 동안 추위에 떨며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지.”

김창은 그런 설마 가족이 배신한 거 아니냐고 묻진 않았다. 그랬다간 화를 낼 것 같아서.

“그럼 우연이 겹쳤다는 소리인가?”

“아마도. 하지만 우연히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그게 죄가 되지 않는 건 아니지. 죽음은 언제나 죽음으로 씻어내려야 하오.”

“뭔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내가 받은 의뢰는 그게 아니라······.”

“북부에 갑자기 나타난 시체 군단에 대해 조사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이번 일과 아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소. 왜냐하면 산사태를 일으킨 게 바로 그 시체 군단이니까.”

“시체 군단이?”

에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하면서 산사태가 일어난 건지, 아니면 시체 군단의 주인이 뭔가 마법을 쓴 탓인지,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시체 군단 때문인 건 확실하오. 산사태 속에서 살아남은 자가 한 명 있거든.”

에르단은 그 생존자가 주군을 살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김창으로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나보고 시체 군단의 주인을 죽이라고?”

“아니오. 의뢰 내용은 바뀌지 않았소. 시체 군단의 본거지를 찾아내고 그 규모를 알아내는 것.”

그러면 굳이 나까지 이런 가족 회의에 불러낼 필요는 없지 않았나.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일이 바뀌지 않았다니 다행이군. 의뢰는 오늘 중으로 시작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사람을 붙여줄 테니 데리고 가시오.”

김창이 얼굴을 찡그렸다.

“굳이 왜?”

“그쪽의 실력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요. 원탁에서 굳이 댁을 보냈다는 건 그만큼 실력 있는 자라는 뜻이겠지. 다만 이번 일은 단순히 북부의 안위를 어지럽히는 적들을 몰아내기 위한 것만이 아니오. 우리 가문의 복수이기도 하지. 그런데 외부인의 도움만 받아선 우리의 체면이 어찌 되겠소?”

귀족들은 이게 문제다. 그깟 체면이 대체 뭐라고? 돈만 주면 알아서 다 해결해주겠다는데 왜 사서 고생하겠다는 건가?

김창은 들리지 않게 혀를 찼다.

“그래서 누굴 데려 가라고?”

“이안!”

에르단이 부르자 구석에서 가만히 있던 한 남자가 화들짝 놀랐다.

“···형님?”

“네가 이 남자를 따라가라.”

“아니, 왜 굳이 제가······.”

“너는 탈리얀 가문의 차남이자 아버지의 적자니까. 너는 항상 네 가치를 증명하길 바랐지. 이번이 그 기회가 아닌가? 설마··· 내빼려고 하진 않으리라 믿겠다.”

에르단이 싸늘하게 웃자 이안이 얼굴을 구겼다.

“······금방 다녀오지요.”

“그래, 믿고 있겠다. 자, 이걸로 회의는 끝이다! 다들 자리로 돌아가 본업에 충실하도록! 아버지를 추모하되 눈물 흘리는 건 용납하지 않겠다! 복수가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눈물 흘려서 안 된다! 테리얀을 위하여!”

테리얀을 위하여! 가신들이 소리치는 걸 들으며 에르단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테리얀 가문은 대공을 잃었지만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에르단이 굳건히 버티고 있는 한.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에르단은 대공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건 반쯤 확실시 된 일이었다.

“씨발.”

그리고 이안은 그게 못내 불만스러웠다.

“씨발.”

김창은 회의가 끝난 후에 곧장 산사태가 일어난 산으로 향했다. 이안도 단단히 무장하고 병사들을 이끌고 뒤를 따랐는데 그는 십 분에 한 번씩 욕을 내뱉었다.

“씨······.”

“좀 닥쳐.”

산을 오르던 중, 참다못한 김창이 말을 내뱉었다.

귀족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시비를 걸 필요도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는데, 이 새낀 무슨 녹음기처럼 욕만 반복하고 있다.

“뭐, 뭐? 이 새끼가 지금 뭐라고 했어?”

“닥치라고.”

이안은 멍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대공의 아들로 태어나 저딴 말을 면전에서 들어본 적도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씨발, 너도 내가 우습냐? 그러니까 그딴 식으로 말하는 거지?”

“욕 좀 그만하면 안 되나? 그리고 네가 우습긴 뭘 우스워? 난 오늘 너 처음 보는데.”

“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젠 별 잡것까지 날······.”

이안은 힘없이 터덜터덜 걸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에르단, 그 씹새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이제 완전히 자기 세상이다, 이거지? 나보고 가서 콱 죽으라고 이딴 데 보낸 거 아냐. 서자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에르단은 이안을 보고 대공의 적자라고 했다. 그걸 보면 에르단은 장남이긴 해도 본처 태생이 아니고 이안은 차남이긴 해도 본처의 태생인 모양이다.

지루한 행군 중일 때는 시시한 잡담이 시간 죽이기에 제격이다. 원래 같았으면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을 이야기지만 이번엔 달랐다.

김창은 묵묵히 짐을 지고 걷는 한 병사에게 물었다.

“저거 뭔 이야기냐?”

“아, 그게······.”

병사는 이안의 눈치를 잠깐 보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들으신 것처럼 에르단 님은 가문의 서자입니다. 하지만 능력이 출중하여 서자임에도 가신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지요. 반대로 이안 님은 적자이긴 하지만 그 능력이 에르단 님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탈리얀 대공께선 말은 안 하셨지만 내심 다음 가주 자리에 이안 님이 오르길 바라셨습니다. 그 때문에 가문 내에서 에르단 님을 지지하는 가신이 많아도 그분이 가주 자리에 오르는 건 요원한 일이었는데 대공께서 제대로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가셨으니······.”

그러니까 이안이 저토록 넋이 나간 건 자신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대공이 없더라도 그 자리를 노려볼 만하겠지만 그 정도 능력이 있는 놈 같지도 않았다.

“에르단이 먼저 선수를 친 셈이군. 가문의 차남이자 적자인 이안을 이런 위험한 임무에 보낸 걸 보면.”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만, 그게 맞습니다. 다만 가문 내에는 적자인 이안 님을 지지하는 가신이 제법 있어서 어찌 될지는 모르겠군요. 어쩌면 가문이 쪼개질 수도 있고요.”

“그러면 에르단은 제 동생이 죽길 바라겠군. 제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병사가 헉 하고 숨을 삼켰다. 그는 감히 말하기 어려워했다.

“서, 설마 그러려고······.”

“그냥 한 소리야.”

김창이 어깨를 으쓱했다. 지나친 상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고 한 의뢰를 받아본 적이 있었다.

“잠깐 정지! 눈보라다! 움직이지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선두에 서서 걷던 병사 하나가 다급히 외쳤다. 갑작스러게 불어온 눈보라는 시야를 가리고 방향감을 잃게 했다.

이럴 때 멋대로 움직이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렸을 때부터 눈과 함께 살아온 북부인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창도 병사가 시키는 대로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세찬 눈보라 때문에 주변의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눈보라는 거칠게 몰아쳤고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김창이 슬슬 체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걸 느끼며 미간을 좁혔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불어온 눈보라는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다시금 시야가 회복됐을 때, 김창이 본 건 여섯 구의 시체였다.

“······이건 또 뭔?”

눈보라 좀 불었다고 사람이 죽을 수가 있나? 아니, 죽을 수야 있겠지만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베르사는 서리군주의 영토다······.”

죽었던 병사들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들 모두는 몸 곳곳이 찢기고 베인 상처가 있었는데 홱 까뒤집은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베르사는 서리군주의 영토다······.”

염병, 이건 또 뭔 일이래? 죽은 놈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걸 보고 김창이 허 하고 소리를 냈다.

“···그런데 왜 여섯 구지?”

한 명이 부족한데. 김창이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눈더미 속에서 이안이 불쑥 튀어나왔다.

“씨발, 뭔데!”

저거 살아 있었나? 다른 놈들은 다 죽었는데 그래도 귀족이라고 제법 실력 있는 놈인가.

“베르사는 서리군주의 영토다!”

줄곧 같은 말만 지껄이던 시체들이 갑작스레 달려들기 시작했다. 김창은 칼을 뽑아 바로 반격했다.

싱싱한 시체로 만들어서 그런지 그냥 사람 죽이는 거랑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가 순식간에 시체 네 구를 토막 내서 죽였을 때였다.

“씨발, 씨발! 에르단, 이 씹새끼! 날 이딴 곳에 보내? 돌아가면 찢어 죽이겠어!”

이안은 아직 살아 있었다. 심지어 달려드는 시체 전사 둘까지 처리한 후였다. 새끼, 에르단보단 못해도 능력이 있긴 한 건가?

휘유, 김창이 가볍게 휘파람을 불자 이안이 핏발선 눈으로 말했다.

“난 돌아간다!”

“아니, 그러면 곤란하지.”

“닥쳐! 내가 돌아가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야!”

김창은 이안을 향해 가만히 손짓했다.

“···그 건방진 손짓은 뭐야?”

“가까이 오라고.”

“내가 왜······.”

“오라고.”

이안은 일단 시키는 대로 가까이 갔다. 순간 얼굴에서 불길이 일었다.

“어억!”

따귀를 맞은 얼굴이 홱 하고 돌아갔다. 입 안에서 찝찔한 맛이 느껴지더니 곧 입술 사이로 피가 질질 흘렀다.

이안은 순간 뭔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맞고 갈 거냐, 아니면 그냥 갈 거냐.”

이미 처맞았는데 그딴 건 왜 물어봐? 이안이 얼얼한 뺨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난 귀족인데······.”

“귀족도 칼 맞으면 죽어.”

미친 새끼, 말 안 들으면 날 죽이겠다는 건가? 이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뭔 생각하는지 아는데, 그거 아니야. 내가 널 죽이는 게 아니라 네 형이 널 죽일 거다. 내가 장담하는데 너 혼자 돌아가면 분명 죽어.”

생각해보니 그랬다. 에르단은 자길 눈엣가시처럼 생각하는데, 임무도 제대로 끝내지 못하고 돌아온 얼간이를 그냥 두려 할까?

“······그러면 너랑 가면 안 죽나? 형이 너까지 죽이려고 하면?”

“네 형은 뭐 목숨이 두 개냐?”

“뭐?”

“짐 들고 따라와. 내가 떠나기 전까지는 네 목숨 책임질 테니까.”

이안은 잠깐 생각했다. 돌아가서 형한테 죽거나, 아니면 여기서 개기다가 저 새끼한테 죽거나.

“씨발······.”

애초에 선택지가 없었다. 이안은 곧장 짐을 챙겨서 김창의 뒤를 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