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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28화 (2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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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요정이야?”

김창이 미간을 찡그리며 에르단을 쳐다봤다. 그가 당황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요정을 불러서 밀회라도 즐기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저 요정은 누가 봐도 전사였기에 밀회의 대상으론 적합해 보이지 않았다. 물론 에르단의 취향이 그런 거라면 달리 할 말은 없지만······.

“자네, 내 동생은? 이안은 어디에 두고 왜 혼자 돌아왔나?”

배다른 동생이지만 그래도 형이라고 신경이 쓰이나? 아니면 정말 설산에 묻혀 죽었길 기대하고 있나?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했다.

“잠깐 숨어 있는데, 죽진 않았으니까 안심해.”

“숨어 있다고? 왜?”

“그건······.”

김창이 시체 군단의 진격에 대해 말하려는 순간 요정이 말허리를 자르며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나와의 대화가 먼저일 것 같구나, 단명종아.”

단명종? 지금 수명 짧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뭔?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자 반대로 요정이 웃었다.

“널 찾느라 제법 많은 인력과 시간을 썼다. 원탁에 편지를 보냈는데 웬 이상한 답이나 하더구나. 엿이나 먹으라고 하던가? 그게 뭔데 먹으라는 건지 모르겠군. 어쨌건 상관없다. 이 세상에 요정 대가문의 추격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없으니까. 우리는 결국 널 찾아냈지.”

“넌 또 뭐냐?”

“날 모르나? 하기야 초면이니 그럴 만하지. 하지만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왜 널 쫓아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원탁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까 의뢰라도 맡기려고 했나? 미안한데,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으니까.”

“의뢰? 내가 왜 너 같은 단명종 따위에게 부탁을 해야 하느냐?”

그럼 왜 찾았는데? 김창이 버릇처럼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가 급한 일이 있다고 말 안 했나?”

“했지. 하지만 단명종의 사정 따윈 내 알 바가 아니다.”

배에 칼을 맞아도 그런 말이 나올까? 김창은 칼자루를 매만지던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여차하면 뽑으려는데 에르단이 다급히 외쳤다.

“둘 다 그만하시오! 베르고니아! 당신이 아무리 딜루키둠의 기수라고 해도 지금은 일개 손님에 불과하다는 걸 자각하시오! 여긴 탈리얀의 땅이오! 나는 바로 그 탈리얀의 대공의 아들이고!”

외침은 효과가 있었다. 밉살스럽게 지껄이던 베르고니아가 입을 다물었으니까. 에르단은 바로 김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던 거요? 혼자만 돌아온 걸 보니 분명 뭔 일이 있는 것 같은데······.”

김창이 칼자루를 쥐었던 손에 힘을 빼며 말했다.

“시체 군단이 카셀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뭐? 갑작스럽게 그게 무슨······.”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산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전부 듣고 난 에르단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를 죽인 게 그 서리군주라는 놈이었나. 내 손으로 복수하지 못한 게 너무나도 분하군.”

주먹을 꽉 쥐고서 가볍게 떨던 에르단이 이어 말했다.

“그런데 만네르헤임이라니? 줄곧 조용히 지내던 대악마가 어째서 갑자기······.”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래서 어쩔 거냐. 시체 군단이 곧 도시 근처까지 진격할 거다. 대책을 세워야 해.”

에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탈리얀의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지금 바로 전투태세를 갖추라고 일러둘 거요.”

방 안의 종을 울리자 병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그에게 몇 가지 지시 사항을 전달하자 곧 굳은 얼굴로 방을 떠났다.

문이 닫히는 걸 본 에르단이 말했다.

“지금은 한 사람의 칼이라도 급한 상황이오. 힘을 빌려주시겠소?”

“잔업 수당 주나?”

“써야 할 때 쓰지 않는 황금은 길가의 돌과 다를 게 없지. 걱정하지 마시오.”

“그럼 내 기꺼이.”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자 에르단이 곧장 베르고니아를 향해 말했다.

“상황은 들어서 아시겠지. 김창은 지금 내 비호 아래에 있소. 용건이 있다면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해주시겠소? 아무리 딜루키둠이라고 해도 북부의 탈리얀과 척질 생각은 아니시겠지.”

탈리얀은 북부의 왕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가문이다. 가문의 위세가 기운 것도 아니고 단지 탈리얀 대공이 허무하게 죽음으로써 왕좌를 차지하지 못한 것뿐이니 다음 세대에서 정말 왕이 나올 수도 있었다.

그런 가문을 향해 창칼을 들이미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다. 아무리 요정 대가문이라고 할지라도.

“그러지.”

베르고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르단이 안도하는 사이에 그녀가 이어 말했다.

“한 사람의 칼이라도 필요하다고 했나? 그럼 내 칼도 빌려주지. 내 부하들의 칼도.”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에르단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정말이오? 도움이라면 감사히 받겠소만 이건 우리 가문의 일인데 굳이 왜······.”

“단명종아, 너는 왜 요정이 그토록 아름다우며 강인한 힘을 가졌는지 아느냐?”

자기 입으로 저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 않나? 김창이 픽 웃는 사이에 에르단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너희 단명종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겐 더 적게 가진 자를 도와야 할 의무가 있지. 우리가 바로 그러하다. 우리는 너희 단명종을 보호하고 인도하는 목자이니라. 그러니 내 어찌 너희의 위험을 그냥 두고 보랴?”

어이없는 소리도 너무 당당하게 하면 할 말이 없는 법이다. 요정이 인간보다 강하고 더 오래 사는 건 맞지만 그게 인간을 보호해야 할 이유가 되나?

애초에 지켜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대체 뭔 보호? 에르단이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에 베르고니아가 김창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 싸움이 끝난 후에 하자. 설마 도망가지는 않으리라 믿겠다.”

“손 내려.”

“···끝나고 보자.”

베르고니아가 먼저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남겨진 에르단이 침묵하는 가운데 김창이 말했다.

“금방 끝내고 올 테니 기다려.”

“조심하시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테니.”

김창이 어깨를 으쓱하며 방을 나갔다. 그는 곧장 성벽을 향해 달렸다.

에르단의 지시가 전 병사에게 전달된 것인지 성벽 위에 횃불이 켜지고 단단히 무장한 병사들이 다급히 움직이고 있었다.

궁병들은 시위에 화살을 건 채로 성벽 아래를 겨누고 있었다. 눈 밝은 병사가 저 멀리 다가오는 시체 군단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적이다! 시체 군단이다!”

시체 군단은 느리지만 착실하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제 다른 병사들도 그들을 발견했을 때, 성벽 위의 지휘관이 크게 소리쳤다.

“우리는 북부의 전사이자 탈리얀의 수호자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 따위에게 지지 마라!”

지휘관의 외침에 호응하듯 병사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체 군단은 전진을 이어나가 이젠 성벽 근처까지 다가왔다.

방금까지의 함성이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긴장된 침묵이 감돌았다. 모두가 다가오는 적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지휘관이 머리 위로 검을 들었다.

두 눈을 부릅뜬 지휘관이 검을 아래로 휘두르며 크게 외쳤다.

“발―사!”

불붙은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아무리 사악한 힘으로 움직인다 해도 그 근간은 인간의 시체기에 적들에게 있어서 그만큼 효과적인 공격도 없었다.

악취를 내뿜으며 걷던 시체 전사들이 불탄 채로 쓰러지기 시작했으나 그보다 더 많은 적이 시체를 밟으며 전진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들이 꾸역꾸역 성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떨어트려! 올라오게 두지 마라!”

“밀어! 창으로 찔러서 떨어트려!”

“이쪽에 하나 올라왔다!”

병사들이 고함을 치며 각자의 무기를 휘둘렀다. 북부인은 모두 전사라더니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고 용맹하게 싸웠다.

일반적인 시체 전사라면 병사들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만 단단한 갑옷을 입은 죽음의 기사는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상대는 자연스럽게 김창이 되었다. 그는 성벽 위로 기어코 기어 올라온 죽음의 기사들을 하나씩 상대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통의 적이라면 성벽에서 떨어트리는 것만으로도 죽거나 전투 불능 상태가 될 테지만 시체 전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더는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반복해서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기에 실제 숫자에 비해서 병사들이 감당해야 할 부담은 더욱 컸다.

또한 죽음의 기사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강한 병사는 한정적인 탓에 시간이 지날수록 성벽 위로 올라오는 적들의 숫자가 많아졌다.

그런데도 큰 혼란 없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건 베르고니아와 그녀가 이끄는 요정 부대 덕분이었다.

북부인이 날 때부터 전사라면 요정은 날 때부터 전투의 달인이었다. 그들은 좁은 성벽 위를 잽싸게 돌아다니며 시체 전사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어떤 요정은 활을 들고 다니면서 멀리 있는 적은 화살로 맞히고 가까이 있는 적은 주먹을 때려죽이고 있었는데 보통 궁병이라면 감히 하지 못할 재주였다.

“불타라!”

또한 요정 부대 중에는 마법사도 있어서 적들을 한꺼번에 태워버리기도 했다. 마력으로 일으킨 불길은 적이 완전히 타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고 다른 적에게 옮겨붙기까지 해서 혼자서 정말 일당백의 위용을 보여줬다.

“이 더러운 오물 놈들! 숭고한 죽음을 모독하지 마라! 너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

그러나 요정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역시 베르고니아였다. 부대의 대장이면서 또한 위대한 전사이기도 한 그녀는 길쭉한 창을 휘둘러 적을 베고 찔렀다.

창 한 자루로 일렬로 늘어선 적을 세 명이나 찔러죽인 후 홱 하고 창을 뽑는 모습이 상당히 박력 있었다.

탄탄한 근육은 그녀가 상당한 단련을 거쳤다는 증거고 좁은 성벽 위에서 흔들리지 않고 창을 휘두르는 건 혹독한 훈련의 성과였다.

게다가 이따금 마법을 부려 보호막을 만들거나 바람을 일으켜 적을 썰어 버리는 걸 보니 과연 오만한 소리를 지껄일 만한 실력이었다.

저 정도면 확실히 플레이어 중에서도 강자 축에 들만하다. 하기야 요정은 인간보다 오래 사니 그 긴 시간 동안 논 게 아니라면 약한 게 이상할 테지만······.

“제법 싸우는구나, 칼잡이야.”

김창이 죽음의 기사 하나를 끝장내고 그 몸을 성벽 아래로 밀어 떨어트릴 때였다. 재빠르게 창을 휘둘러 시체 네 명의 목을 자른 베르고니아가 서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 정도 실력이니 그런 짓거리를 벌일 수 있었겠지.”

내가 뭘? 김창은 저 귀쟁이가 자신한테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딱히 의뢰를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다른 접점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한테 왜 자꾸 시비인가?

목이 붙어 있는 게 답답한가? 그래서 좀 잘라달라고 저러나?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생각이라 김창이 픽 웃자 베르고니아가 얼굴을 빠르게 굳혔다.

“···우습나? 이 내가 우스워? 딜루키둠의 기수인 이 내가?”

“왜 자꾸 나한테 시비인지는 모르겠는데, 용건 있으면 싸움 끝나고 하지 그러냐.”

휙!

베르고니아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시체 전사의 머리를 찔렀다. 창대를 확 잡아당겨 창날을 뽑자 시체가 으어어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분명히 말했다. 도망치지 마라. 딜루키둠의 베르고니아가 널 기다린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칼 맞는 게 소원이라면 못 들어줄 것도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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