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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나중에 보자!”
베르고니아가 껑충 뛰어서 다음 적을 향해 달렸다. 요정답게 가벼운 움직임이었으나 그녀가 휘두르는 창의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성벽 위에서 종횡무진으로 날뛰며 적들을 무찌르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김창은 곧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통해 숫자를 충분히 줄이긴 했지만 전투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다시 전투 속으로 달렸다. 어디선가 병사의 비명이 울렸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싸워라! 우리의 승리가 멀지 않았다!”
“이쪽으로 사람 더 붙어! 붙으라고!”
“죽음의 기사다! 죽음의 기사야!”
시끄러운 외침이 여기저기서 울리고 있었다. 김창은 적들을 빠르게 썰어 버리며 죽음의 기사가 있는 곳까지 달렸다.
시커먼 갑옷을 입은 죽음의 기사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으며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 병사의 머리를 쪼개고 있었다.
콰직 소리가 나며 반으로 잘린 병사가 쓰러지는 가운데 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칼이 죽음의 기사의 갑옷을 강하게 찔렀다.
본래라면 갑옷을 뚫을 수 있을 리가 없건만 불쑥 튀어나온 칼은 무른 땅속에 박히듯 부드럽게 들어갔다.
만약 죽음의 기사에게 감정이 있다면 당황스러워했을 것이다. 칼을 막아주지 못하는 갑옷이라니? 그러면 쓸데없이 무겁게 갑옷을 왜 입나?
그런 의문을 해소해줄 사람은 없었다. 잿빛으로 빛나는 칼이 갑옷 안쪽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칼날이 이번에는 죽음의 기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투구가 바닥에서 텅텅 소리를 내며 굴렀다.
“몰아붙여! 우리가 이기고 있다!”
“싸워라, 싸워!”
“우리는 탈리얀의 수호자다!”
승기는 사실상 탈리얀 가문에게 기울고 있었다. 시체 군단이 아무리 강력하고 죽음을 모르는 전사들이라고 해도, 그들에겐 지휘관이 없었으며 또한 죽은 자를 되살려줄 존재가 없었다.
서리군주의 존재감은 그만큼 컸다. 유능한 지휘관이자 강력한 사령술사. 그가 없으면 시체 군단은 결국 머리 없이 날뛰는 짐승에 불과했다.
거기에 김창과 베르고니아의 요정 부대가 손을 보태고 있으니 애초에 전투의 결과는 정해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들은 한참을 더 싸웠고 어두워졌던 하늘에서는 점차 여명의 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차츰 밝아오는 태양의 빛은 마치 저 악한 무리를 쓸어버리는 것처럼 찬란한 황금색으로 빛났다.
이젠 한 줌조차 남지 않은 시체 군단은 여전히 두려움을 몰랐고 죽음을 향해 돌격했다. 김창이 마지막 죽음의 기사를 죽이는 것과 동시에 전투는 완전히 끝났다.
목이 잘린 죽음의 기사가 성벽 저 아래로 떨어져 갑옷 채로 사지가 분쇄됐다. 쿵 하는 소리가 마치 전투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승리다! 우리의 승리야!”
지휘관이 무기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승리를 선언하자 병사들의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졌다. 이제 완전히 밝아온 태양이 그들의 머리 위로 빛을 뿌렸다.
김창의 검은 머리 위로도 황금의 빛이 흩어졌다. 북부의 추위조차 태양의 온기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몸을 감싸는 따스한 빛이 승리를 축복했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탈리얀 대공의 아들은 네가 자기 비호 아래에 있다고 했지.”
하지만 또 새로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만 유효한 일이다. 그 단명종은 아무리 딜루키둠이라도 탈리얀을 무시할 수는 없으리라 했지. 하지만 그건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의 의사를 존중했으니 이젠 그도 내 의사를 존중해야만 해.”
시체 전사들을 수없이 죽이고 그 오물을 뒤집어쓴 베르고니아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의 몸은 더러웠으나 그 아름다움만은 지울 수 없었다.
사냥꾼이자 또한 전사인 그녀가 씩 웃으며 말했다.
“도망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내가 또 널 추적해야 할 수고를 덜었으니.”
김창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그녀가 이어 말했다.
“따라와라. 여긴 보는 눈이 많으니까.”
두 사람은 승리의 기쁨에 취한 병사들을 지나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그 뒤를 요정 부대가 뒤따랐다.
흘끔 뒤를 쳐다보자 베르고니아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나는 명예를 모르지 않는다.”
부하들이 끼어들 일은 없다는 걸까. 김창이 무심히 말했다.
“상관없는데.”
“뭐?”
“전부 덤벼도 상관없다고.”
베르고니아가 걸음을 멈추고 우뚝 섰고 뒤따르던 요정 부대의 시선이 전부 김창에게 쏠렸다.
이토록 많은 요정에게 주목을 받는 인간은 흔치 않으리라. 별로 기쁘진 않지만. 김창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서 할 건가? 아니라면 빨리 가자고.”
“···자신감이 대단하군. 하긴 그 실력이라면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너 단명종아. 지나친 자신감이 독이 된다는 걸 잊지 마라.”
김창은 얼른 가라는 듯 고개만 까딱일 뿐이었다. 베르고니아가 다시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몇 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작은 공터였다. 사람은 드나들지 않고 한바탕하기엔 딱 알맞은 공터.
“너 단명종의 칼잡이야. 이름이 무엇이냐?”
“김창.”
“나는 딜루키둠의 베르고니아다. 과연, 플레이어였군.”
베르고니아가 당장 싸울 마음은 없다는 듯 자기 부하에게 창을 건넸다. 부하가 더러워진 창을 손질하는 사이에 그녀가 말했다.
“너는 왜 내가 널 쫓아왔는지 모르는 모양이더구나.”
“그래.”
“그러면 말해주지. 너는 아샤리온이라는 요정을 죽였지? 마법검을 쓰는 요정 말이야.”
아샤리온? 그런 요정은 모르지만 마법검을 쓰는 요정은 알고 있다. 자신이 칼로 상반신을 잘라 죽였던.
“아샤 말인가? 설마 동족의 복수를 하려고 날 찾아왔다는 거냐?”
“그래. 아샤리온은 딜루키둠의 배신자지만 그 전에 우리 가문의 일원이기도 하지. 그에게 죄가 있다면 벌해야 하는 건 우리다. 너 같은 단명종이 아니라.”
어이가 없다. 그러니까 지금 자기 가문의 배신자를 내 손으로 죽였다고 이러는 건가?
그러면 뭐 내가 거기서 칼 들고 덤벼드는 놈에게 죽었어야 했나? 별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이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다.
김창이 칼자루를 매만지며 말했다.
“내가 별 이유도 없이 그 귀쟁이를 죽였다면 그건 내 잘못이겠지. 하지만 우린 전장에서 만났고 또한 적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적을 죽인 게 죄가 되나?”
“죄가 된다. 왜냐하면 너는 단명종이고 아샤리온은 요정이니까. 요정의 죄는 오직 요정만이 벌할 수 있다.”
이거 어디서 들어본 논리인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원탁이 저런 소리를 했던 것 같다.
플레이어를 벌할 수 있는 건 같은 플레이어뿐이라던가? 하여튼 조금의 힘만 있으면 그게 자신의 특권쯤 된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너무 많다.
하기야 자신부터 사람 썰고 다니니 남 욕할 건 아니지만.
“그래서 나한테 벌을 주겠다 이거냐? 감히 요정을 죽인 죄로?”
“그럼 내가 널 왜 쫓아왔다고 생각하느냐? 잘했다고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려고?”
김창이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것도 나쁘지 않은데.”
“···여유가 넘치는군. 우리는 열 명도 넘고 너는 혼자라는 걸 잊었느냐?”
칼 한 자루 덜렁 들고 이 세상에 떨어졌던 김창이 아직껏 죽지 않은 건 별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돈 얼마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이 개 같은 세상은 싸움을 고를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싸우지 않으면 죽는다. 그리고 죽으면 끝이다.
그러나 김창은 매번 이겼다.
그러니 이번에도 똑같다. 싸워서 이기면 그만이다. 그러다 죽으면? 그럼 명줄이 거기까지인 거지 뭘.
“몇 명이든 상관없다.”
베르고니아가 침묵했다. 그녀는 김창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들어 부하들을 뒤로 물렸다.
“전사로서 부끄러운 짓을 할 수는 없지.”
그녀가 손을 뻗자 요정 하나가 얼른 다가와 창을 건넸다. 그걸 받아든 베르고니아가 전투 자세를 잡았다.
“결투다.”
“시작해.”
인간 칼잡이와 요정 전사.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고 동시에 움직였다. 먼저 공격한 건 역시나 베르고니아였다.
그녀의 무기는 길쭉한 창이었고 공격 거리에 있어서 당연히 이점이 있었다. 휙 하고 찔러 들어오는 창은 과연 생각한 것만큼 빨랐고 또 위협적이었다.
챙!
칼과 창이 부딪쳐 맑은 금속음을 냈다. 김창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고 베르고니아의 창은 더욱 격렬하게 연격을 이어나갔다.
머리, 어깨, 배, 다리. 어느 곳이라도 일단 찔리면 위험할 만한 부위를 거의 동시에 노리는 건 확실히 신기에 가까운 재주였다.
마치 쏟아지는 장대비처럼 쉭쉭 소리를 내며 날아오는 창날이 위협적으로 반짝였다. 김창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그 모든 공격을 칼로 받아냈다.
허공에서 쉴 새 없이 불티가 튀었다. 창과 칼이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그들의 위치를 짐작하는 방법은 불티가 튀는 곳을 보는 것 외엔 없었다.
조용히 싸움을 지켜보던 요정 한 명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그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딜루키둠의 기수와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건 같은 요정 대가문의 기수 외엔 없다고 생각했는데 저게 대체 무슨?
겨우 인간 따위가 요정처럼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 아무리 재능이 넘친다고 해도, 아무리 오래 수련했다고 해도 저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저기 있는 칼잡이가 실은 요정의 혼혈이거나 아니면 반신이라도 된단 말인가?
“큭!”
갑작스럽게 울린 목소리에 요정이 상념에서 깼다. 그가 재빨리 고개를 돌리자 거기엔 어깨에 상처를 입은 베르고니아가 있었다.
칼에 찔린 어깨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기에 요정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기수님!”
베르고니아가 창대를 세게 쥐며 외쳤다.
“끼어들지 마라!”
요정 기수의 두 눈은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녹음이 우거졌던 눈은 이제 타오르는 들과 같았다.
“이건 내 싸움이다! 감히 날 욕 보일 셈이냐!”
우렁찬 목소리에 요정이 찔끔 몸을 떨며 다시 뒤로 물러났다. 베르고니아는 어깨의 난 상처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다.
창대를 너무 세게 쥐어서인지 상처에서 흐르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김창은 무심히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부르지 그러냐.”
“···뭘?”
“부하들.”
베르고니아가 이가 부러질 듯 으득 소리를 냈다. 그녀가 땅을 박차고 뛰었으나 김창은 별로 긴장한 기색이 아니었다.
네 실력은 이미 충분히 맛봤다. 그러니 겁먹을 것도 없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런 얼굴이라서 베르고니아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챙!
허공에서 불티가 튀고 날카로운 금속음이 반복됐다. 베르고니아의 창은 아까보다 훨씬 더 격렬하고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의 목숨을 태우듯, 반드시 이 건방진 칼잡이를 죽이겠다는 일념 아래에 거센 폭풍과 같은 공격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창은 찌르고, 베고, 다시 찔렀다. 베르고니아의 단단한 손가락 안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창대는 손바닥 안에 착 감겨서 단단히 붙었다.
어깨는 뒤로 빼고, 다리는 땅을 단단히 딛고, 시선은 적을 향했다. 누가 봐도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는 모양새였기에 방어로 일관하던 김창도 얼른 칼자루를 고쳐잡았다.
베르고니아의 창에 희미한 빛이 일렁이더니 곧 창날이 녹색으로 물들었다. 그 힘은 베르고니아가 고작 삼백 살의 젊은 나이에 요정 기수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해주었다.
바위를 뚫고 강철을 자르며 인간의 몸 따위는 갈기갈기 찢어 버리는 그것은 오러였다.
너, 건방진 칼잡이야. 네가 아무리 칼을 잘 써도 이것까지 막을 수 있을까? 베르고니아가 사나운 미소를 지으며 창을 세게 내질렀다.
쉭!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창날이 녹색의 길을 남겼다. 그걸 보며 김창이 칼을 들었다.
“이 멍청한 놈! 오러가 실린 공격을 그깟 칼 따위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김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잿빛으로 빛나는 칼날을 휘둘렀을 뿐.
“···어?”
잘려 나간 창날과 공중에서 휙휙 돌고 있는 창대. 베르고니아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뭘 놀라. 별거 아니야.”
오러가 별거 아니라고? 요정 중에도 아직 오러를 다루지 못하는 놈들이 수두룩한데? 저 정신 나간 칼잡이는 지금 돌 맞아 죽을 만한 소리를 무심히 하고 있다.
“막아.”
뭐? 베르고니아가 잠깐 당황한 사이에 김창이 칼을 휘두르며 말했다.
“내가 너 죽일 거니까, 막으라고.”
베르고니아의 얼굴이 수치심과 굴욕감으로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을 보며 반사적으로 절반만 남은 창대를 들었다.
과연 이딴 걸로 막을 수 있을까? 그냥 칼도 아니고 오러가 담긴 칼인데 설마 되려고······.
“끄윽!”
과연 생각한 대로였다. 창대를 서걱 소리를 내며 잘리고 그걸 들고 있던 베르고니아의 왼쪽 어깨도 뚝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현실감 없는 모습이라서 싸움을 지켜보던 요정 부대조차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김창이 말했다.
“진짜 막으면 어떡하냐. 한 번에 못 죽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