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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32화 (3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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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은 술잔을 매만지다가 곧 내용물을 비웠다. 데운 것도 아니건만 목구멍을 넘어가는 술이 몹시 뜨겁게 느껴졌다.

추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왜 술을 물처럼 마시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런 걸 마시지 않으면 목구멍이며 위장이 얼어붙고 만다.

술이 들어가자 위장이 찌르르 울렸다. 김창은 그 느낌을 가만히 즐기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살려달라고?”

심민우는 대답하는 대신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창이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나?”

“글쎄요, 게임으로 치면 모험가가 아닐까요? 온 세상을 떠돌며 온갖 모험을 하고, 진귀한 보물을 찾아다니는······.”

“난 칼잡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은 돈 받고 뭔가를 죽이는 거고.”

심민우가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며 김창이 이어 말했다.

“흔히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지. 근데 내 생각은 달라. 돈 받고 사람 죽이는 게 귀한 일이라고 할 수 있나? 그럴 리 없지. 나는 내 일을 아주 잘 알아. 이건 천한 일이고 그걸 하는 나는 아주 천박한 놈이야.”

“그, 하지만······.”

“내가 그 천한 일을 오래 하면서 안 게 뭔지 아나? 나 같은 놈에게 뭔가 부탁하러 오는 놈들은 대개 뒤가 구리다는 거야. 너도 뭔가 문제가 생겼으니 날 찾아왔을 텐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뭔가를 죽여주는 것뿐이다. 근데 보통은 뭔 일이 생겼다고 사람 죽이려고 들진 않아. 대화로 해결하든, 돈으로 회유하든, 뭐든 하겠지만 칼 들고 일단 찌르고 보진 않는다고.”

심민우가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벙긋거렸다. 그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김창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이한 압박감이 목구멍을 바짝 말라붙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넌 굳이 날 찾아왔지. 그건 네가 뒤 구린 짓거리를 했거나 아니면 뭔 죄를 지었다는 소리다.”

여관 안은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건만 심민우의 귀에는 오직 김창의 목소리만 들렸다.

목소리는 나직했으나 그 어떤 외침보다 잘 들렸다. 칼잡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굴 죽이려고 날 찾아온 거냐.”

심민우는 고요한 검은색 눈동자를 보면서 자신이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돈만 주면 뭐든 죽여주는 칼잡이. 조금 머리가 이상한 것 같지만 실력만은 확실한 놈. 어쩌면 이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잘 죽이는 남자일지도 모르는 자.

마지막은 솔직히 과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보니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사람 죽이기 대회 같은 게 있다면 정말 1등이었을지도 모르지.

침묵은 조금 길었다. 하지만 영원할 수는 없어서 억지로 입을 뗐다.

“아까 저보고 누굴 죽일 거라면 직접 하라고 하셨지요?”

“그래, 너도 플레이어니까.”

플레이어인 거랑 사람 직접 죽이는 거랑 대체 무슨 상관인가? 이 칼잡이는 사람 직접 죽여본 게 플레이어의 증명쯤 된다고 생각하나?

심민우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가 뭔가를 죽이려고 김 선생님을 찾아온 건 맞습니다. 근데 그게 사람은 아니에요.”

김창이 미간을 좁혔다.

“그럼 뭔데, 괴물? 미안한데 괴물은 추가금이 붙어.”

“아···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요. 돈이라면 많습니다.”

김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손가락으로 의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일 이야기 좀 해볼까. 계속 서서 이야기 하긴 그러니 대충 적당한 곳에 앉아라.”

심민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 하나를 끌고 와 앉았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자 지나가던 여급이 잔 하나를 내왔다.

뭔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내오는 걸 보고 물인 줄 알았는데 막상 마셔보니 술이었다. 과연 물 대신 술을 마시는 북부다운 일이었다.

“난 보통 의뢰인의 사정에 대해선 안 물어본다. 그냥 뭔 사정이 있으니까 날 찾아왔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야. 그러니까 내가 알아야 할 부분만 짧게 말해.”

술을 물인 줄 알고 마셨다가 켁켁 소리를 내던 심민우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러시다면야······. 긴 이야기인데 짧게 말씀드리죠. 저는 원래 마탑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마탑?”

그게 뭔지는 김창도 안다. 원래 게임에 있던 건물이기도 하고 꼭 게임이 아니더라도 다른 매체에서 자주 나오는 거니까.

마탑은 이름 그대로 커다란 탑에 마법사들이 모여 마법을 연구하는 장소다. 강력한 힘을 가진 마법사들이 많이 모여 있다 보니 왕조차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곳의 마법사들은 자신의 문양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다녔는데 자신만의 문양 반지를 만드는 건 많은 마법사의 꿈이었다.

슬쩍 심민우의 손가락을 보니 거기엔 문양 외에도 화려한 장식이 음각된 반지가 있었다. 마탑에서 일한다는 게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플레이어가 왜 거기서 일하지?”

플레이어 중에는 마법사가 많다. 원래 게임일 때부터 마법사는 키우기 쉽고 강력한 성능을 가진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다른 캐릭터에 비해 눈에 띌 정도로 숫자가 많은 덕에 원탁 내부엔 마법사 협동조합도 있다던가?

자기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면서 원탁 내부에서 상당히 입지를 다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당장 원탁의 수장인 한석구부터가 강력한 마법사니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어쨌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플레이어인 심민우가 왜 마탑에서 일하느냐, 그게 중요한 부분이다.

그건 김창은 물론이요 다른 플레이어 입장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플레이어가 마탑에서 일한다는 건 프로 축구 선수가 동네 조기 축구회 선수로 뛴다는 것과 비슷한 일이었다.

모든 마법사 플레이어가 한석구만큼 강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충분히 강하다. 당장 지난번에 한석구에게 모욕을 당하며 쫓겨났던 이민세 정도만 해도 마탑에서 천재 소리 듣기에 충분하다.

심민우가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몰라도 이민세보다 못할 것 같진 않았다. 혼자서 이 먼 북부까지 찾아온 걸 보면 확실히 실력은 있다.

그런 놈이 대체 왜 마탑에서 일하나? 게임에서처럼 양학이라도 하려고? 아니면 힘숨찐 놀이라도 하나? 그런 이유라면 정말 부끄러운 짓거리다.

“뭔 생각하는지 압니다. 이곳의 마법사들은 대개 마법사 플레이어보다 약하죠. 온갖 천재며 수재가 모인 마탑이라고 해도 별다를 건 없어서 저 정도의 마법사가 가도 거기선 수백 년만에 나온 천재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마법이란 건 배우기도 어렵고 재능도 많이 타는 재주다. 그래서 이곳에선 마법사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데 내가 왜 거기서 일하느냐. 간단합니다. 난 학구열이 강하거든요. 마탑은 지식의 보고이며 끝없이 이어지는 신비의 성전입니다.”

김창은 순간 당황했다. 심민우는 지금까지 만나본 플레이어 중 가장 황당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뭔 열?”

“학구열이요. 배우고자 하는 욕구 말입니다.”

“아니, 그딴 걸 가지고 있는 놈은 처음인데······.”

김창은 그답지 않게 당황했다.

플레이어 중에서 정신 제대로 박힌 놈은 드물어서 대개 비틀린 욕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몇 년을 지낸 탓에 이제는 그런 놈을 만나도 별로 놀랍지 않지만 이건 확실히 놀랍다. 세상에, 학구열이라니?

그러니까 이 새낀 지금 이 개 같은 세상에서 와서까지 공부를 하겠다는 건가? 한국인이 학구열이 강하다는 건 익히 들어서 아는 이야기지만 이건 좀······.

차라리 마탑의 마법사들을 모두 발가벗겨 스트립쇼 댄서로 만들겠다고 하면 웬 미친놈이냐고 욕이라도 하겠는데 이건 그럴 수도 없다.

자기가 미쳤다고 하는 놈은 죄다 가짜 광기라던데 심민우를 보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서 마탑에서 뭘 배우는데?”

“뭘 배우겠습니까? 마법을 배우지요. 정확히 말해서 마법이라기보다는 신비의 근원에 대해 배웁니다. 좀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저는 원래 오컬트 마니아였거든요. 학생 때부터 그런 거에 빠져서 따돌림도 당하고 그랬는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에 마법 같은 건 없지만 수비학이니 악마학이니 하면서 오컬트적인 요소를 신봉하는 자들은 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정말 신비한 힘을 부리고 악마를 소환할 수는 없으니 그건 결국 헛수고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마법도 있고 악마도 있으니 오컬트 마니아에게 있어서 얼마나 꿈만 같은 곳이겠는가?

심지어 이상한 취미 때문에 학생 때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중2병 환자 놈이라면 더더욱.

“네 취미 생활을 위해 마탑에 들어간 거군.”

“맞습니다.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물론 그곳의 마법사들은 진지하게 수행하는 거고 저는 컨셉 플레이긴 하지만 어쨌든, 함께 생활할 수 있다는 건 썩 괜찮은 경험이죠. 그래서 마탑에 들어간 겁니다.”

“그런데 왜 날 찾아온 거냐? 뭐 때문에 살려달라고 하는 거야?”

심민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이 빠지기 쉬운 게 뭔지 아십니까?”

“몰라.”

“악마나 피, 죽음이나 어둠 뭐 그딴 겁니다. 그러니까 전형적인 찐따 망상이죠. 물론 전 이제 성인이라 그런 망상은 안 하긴 하는데······.”

아니다, 이 새낀 한다. 김창은 분명히 확신했다.

“이 세상에 악마가 실존한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더군요. 지옥의 악마를 불러내 부하로 부리던 마법사에 대한 전설을 들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래서 악마를 불러냈나?”

심민우가 큼 소리를 내며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그냥 호기심의 문제였어요. 악마를 불러내서 뭐 지옥의 군주니 암흑의 제왕이니 그런 별명으로 불리고 싶었던 건 아니라고요.”

“안 물어봤으니까 대답이나 해.”

“···네, 불러냈습니다. 처음엔 그냥 작은 악마, 사실 악마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마물 같은 걸 부르려고 했죠.”

“그랬는데.”

“제 자랑 같습니다만, 제가 좀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 큰 놈이 나왔죠.”

그러면서 말끝을 흐리는 게 수상했다. 김창이 탁자에 꽂았던 포크를 뽑았다가 다시 콱 꽂았다.

부르르 떨리는 포크를 본 심민우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내가 짧게 설명하라고 말 안 했나? 본론만 말해.”

“···그냥 악마 따위가 아니라 좀 거물을 불렀어요. 지옥의 여덟 기수라고 하면 김 선생님도 아실 겁니다. 그놈들 중 하나가 나왔는데 도망쳤죠. 덕분에 전 악마를 소환했다는 누명을 쓰고 마탑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야 했고요.”

진짜로 소환했는데 그게 왜 누명이야? 하여튼 플레이어치고 제정신인 놈이 없다.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그런 일이 생겼으면 내가 아니라 원탁부터 찾아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한석구가 같은 플레이어를 외면하진 않을 것 같은데.”

“원탁은 안 돼요. 그 왜 저번에 이장우인가 하는 놈이 악마숭배자가 됐던 것 때문에 의장님 화 많이 났잖아요. 근데 이번에 제가 악마숭배자가 된 것도 아니고 아예 악마 소환한 거 알면 감옥에 죽을 때까지 갇혀 있어야 할걸요······.”

하기야 한석구 성격에 그럴 것 같긴 하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일 수습해 달라는 거냐.”

“네, 맞습니다. 이 일이 원탁의 귀에 들어가기 전에 수습해야 해요. 그러니까 제가 뭘 원하는지 아시겠죠?”

“알다마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탑의 마법사들을 몰살시키고 증거를 없애달라는 거 아니야.”

“···악마가 날뛰기 전에 그놈을 죽이자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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