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김창은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농담인 거 알지?”
아니다, 이 새낀 농담이 아니었다. 심민우는 확신했다.
“···악마가 마탑에서 도망친 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입니다. 뭔 꿍꿍이인지 아직까진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언젠간 크게 사고를 칠 게 분명해요. 그러기 전에 없애야 합니다.”
“널 위해서?”
김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일주일? 마탑은 대륙 동부에 있는 걸로 아는데 북부까지 일주일 만에 날 찾아왔다고?”
하늘을 나는 괴물을 잡아타고 오기라도 했나? 그랬다면 마을에서 난리가 났을 테니 그건 아닐 것이다.
심민우가 어깨를 약간 으쓱이며 말했다.
“마법으로 왔습니다. 전 마법사니까요. 물론 한 번에 오지 못해서 여러 번 마법을 쓰고, 마력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탓에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요.”
“마법으로 왔다고? 텔레포트를 써서?”
“네, 맞습니다.”
김창은 이 키 작은 마법사가 생각보다 대단한 놈이라는 걸 깨달았다.
본래 텔레포트는 먼 거리를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마법이지만 실패할 확률이 삼 할이나 돼서 웬만하면 잘 쓰지 않는다.
반대로 차원문 마법은 실패할 확률이 훨씬 더 낮지만 자기가 가본 곳만 갈 수 있어서 이동 범위가 제한적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장거리를 이동할 때는 갈 수 있는 곳까지 차원문을 열고 거기서부터 직접 걸어서 가는 게 일반적이다.
텔레포트는 진짜 급한 상황이 아니면 아껴두는 카드 취급인데 심민우는 그걸 연속으로 써서 여기까지 왔다. 아마 한석구도 그런 재주는 못 부리지 않을까.
확률은 독립적이라지만 그래도 실패할 확률이 삼 할이면 한 번쯤은 차원의 미아가 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건 엄청 운이 좋거나 엄청 실력이 뛰어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놀랍군. 그 정도 실력이라면 이번 싸움에서도 제법 큰 도움이 되겠는데.”
“아, 아쉽지만 전 이번 싸움에 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낄 수 없다니? 그러면 김창이 싸우는 동안 뒷짐 지고 구경이나 하겠다는 건가? 물론 그러라고 돈을 주는 것이니 그래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건 좀 재수 없긴 한데.
“왜?”
“저 텔레포트 마법에만 집중 투자해서 공격 마법은 거의 못 써요.”
이거 바보인가? 마법사가 공격 마법을 못 쓰면 존재 가치가 어디에 있나? 어쩐지 자기도 플레이어인 주제에 악마 죽여달라고 돈 들고 찾아온 걸 보고 좀 싸하긴 하더니만······.
“장난하냐?”
“장난 아닌데요. 저 진짜 전투 능력은 거의 없어요.”
자랑스럽게 할 말은 아니다. 김창은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어딜요?”
“악마 죽여달라며.”
“지금 당장요? 식사 중이던 거 아니었습니까?”
김창이 아직 남은 술과 소시지를 흘끔 봤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가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더 안 먹어도 돼. 그리고 귀찮게 구는 놈들 때문에 떠날 생각이기도 했고.”
심민우는 김창에게 호되게 처맞고 쫓겨나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제 텔레포트 주문으로 편히 모시겠습니다.”
여관을 나서던 김창이 길거리에 우뚝 섰다.
“헛소리하지 말고 차원문 열어.”
“···절 너무 못 믿으시는데요. 전 여기까지 텔레포트만 써서 왔다니까요?”
“나랑 같이 차원의 미아가 돼서 죽을 때까지 맞으려는 거 아니면 그냥 얌전히 차원문 열어라.”
심민우가 슬쩍 김창의 주먹을 보았다. 아까 저걸로 갑옷 입은 기사도 때리던데 맞으면 확실히 아플 것 같다.
“큼, 그러면 어쩔 수 없죠. 여기선 안 되니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실까요?”
차원문을 열려면 제법 공간이 필요하다. 두 사람은 혼잡한 길거리를 지나 적당한 공터에 도착했다.
“금방 엽니다.”
심민우는 텔레포트뿐만 아니라 차원문 마법에도 일가견이 있는 듯했다. 그는 정말로 공격 마법에는 일절 투자를 하지 않고 이동 마법만 배운 모양이었다.
저번에 요정들이 베르고니아를 도망치게 하려고 차원문을 열 땐 여러 명이 붙어도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은데 심민우는 혼자서 그보다 더 빠르게 차원문을 열었다.
이 정도면 차원문 열고 다는 것만으로도 떼돈을 벌 수 있는 것 아닌가. 확실히 비행기 같은 것보다 더 편리해 보이는데.
“자, 다 됐습니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어요.”
“뭔데.”
공간을 일그러트리고 거리를 왜곡하는 마법의 힘이 웅웅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어서 들어가라는 듯 차원문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지만 심민우가 몸으로 그 입구를 막고 섰다.
“아시겠지만 차원문은 제가 가본 적 있는 장소에만 열 수 있습니다. 전 악마가 어디 있는지 알지만 거기 가본 적은 없으니 그 장소에 차원문을 바로 열 수는 없다는 소리죠. 그러니 며칠 걸어야 할 텐데, 그 문제에 대해서 불평하시면 안 됩니다.”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김창은 별 상관없다는 듯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겠습니다. 차원문 이용해본 적 있으세요? 처음이면 약간 멀미가 날 텐데 안에서 토하면 안 돼요.”
심민우가 주의사항을 말하며 먼저 차원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김창도 그 뒤를 따라서 들어갔다.
차원문을 통과하는 게 어떤 기분이냐고 묻는다면 그냥 문 하나를 지난 것과 같다고 하겠다. 머리를 들이밀었더니 그냥 반대쪽에서 불쑥 튀어나왔으니 심민우가 말한 멀미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이것도 심민우의 마법 실력이 뛰어나서일까? 김창은 생각했던 것과 다른 감각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차원문에서 몸을 완전히 빼냈다.
역시나 멀미 같은 건 없었고 어지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어지럼증 같은 건 없어 보이는군요. 다행입니다.”
김창은 잠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북부의 차가운 공기는 사라지고 따스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미약하게 흙냄새가 났는데 확실히 북부보다 싱그러운 느낌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오른쪽에는 벽돌을 쌓아 만든 벽이, 왼쪽에는 허름한 창고가 있었다. 한 발자국 뗄 때마다 흙이 부드럽게 밟혀 으스러지고 신발에 눌린 풀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하늘은 맑으며 흐르는 구름은 느긋하다. 뭔가 한가한 농촌에 온 것 같은 느낌이라 마음이 편해졌다.
“여기 어디야?”
“악마가 있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입니다. 그리고 마탑에서 좀 멀리 떨어진 마을이기도 하죠.”
“마탑 근처의 마을이라고? 그러면 여기에도 널 쫓아온 마법사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마탑의 마스터도 텔레포트 마법에 한해서는 저보다 몇 수는 아래입니다. 전 거의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텔레포트 했으니 제가 어디로 갔는지 모를 겁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아직 멀리 도망치지 못했겠거니 생각하고 주변을 수색하는 것뿐이겠죠. 그런 식의 수색도 여기까지 오려면 며칠 더 걸릴 겁니다.”
자기가 그렇다는데 무슨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김창은 고개를 끄덕이며 심민우와 함께 거리를 걸었다.
한가한 농촌이라 그런지 사람들은 대개 여유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에게 풀을 먹이려고 줄을 잡고 가는 소년이나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니는 꼬마들, 따스한 햇빛 아래에서 얼굴 벌게진 채로 열심히 떠들고 있는 남자들, 빨랫감을 들고 냇가로 가는 여인들.
그들은 지금 여기에 사람 잘 죽이는 칼잡이와 악마를 소환한 마법사가 있으리라곤 생각조차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영영 모르는 쪽이 좋았다. 괜히 그런 걸 알아봤자 기분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김창은 저들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서 여길 빨리 떠나는 게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데 심민우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잠깐 여관에 들러도 될까요? 제가 마탑에서 급하게 도망치느라 짐을 거의 가지고 나오지 못했거든요. 조금 챙겨 나왔던 식량 같은 건 김 선생님을 찾으러 가는 동안 다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물자 보급을 할 생각인데요.”
여긴 이름도 모르는 작은 마을이지만 가끔 사람들이 오고 가는지 여관이 있긴 했다. 거기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라 해봐야 몇 개 안 될 테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을 터다.
김창이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심민우는 혼자서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혼자 남게 된 김창은 어느 집 울타리에 기대 하늘을 바라봤다. 한 달 넘게 북부에서 시간을 보냈더니 이런 하늘이 몹시 생경하게 느껴졌다.
때마침 불어온 따스한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대화하는 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 그리고 바닥을 때리는 말발굽 소리.
이런 작은 마을에 말 타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기껏해야 짐마차 끄는 말 정도일 텐데 그런 거라면 바퀴 구르는 소리도 났을 것이다.
그러니 마을 바깥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왔다고 봐야 맞다. 김창은 감았던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녹색 망토를 두른 사람 둘이 있었다. 두 명 다 말을 탔고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체격을 보면 양쪽 다 남자였다.
한쪽은 호리호리하고 다른 한쪽은 제법 강건한 체격이다. 둘 다 같은 색깔의 망토를 두르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일행이다.
어쩌면 같은 조직에 속해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대체 어디서 왔길래 저런 눈에 띄는 색깔을 택했는지 모를 일이다.
바람에 펄럭이는 망토를 자세히 보니 뭔가 문양이 그려져 있긴 하다. 하지만 등 뒤에 그려진 거라 제대로 보이진 않았다.
“···그래서 본 적 없단 말이지.”
“아, 그렇다니까. 제가 나리께 왜 거짓을 고하겠습니까요?”
“정말 아니냐? 너 같은 무지렁이들은 금화에 혹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은 법인데······.”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가 농부에게 뭔가를 꼬치꼬치 캐묻고 있었다. 체격이 큰 쪽은 묵묵히 그걸 보고만 있었고.
그들은 그런 식으로 마을 사람들을 하나씩 찾아다니며 뭔가를 묻고 떠나길 반복했다. 사람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젓거나 모른다고 했고 그럴 때마다 마른 쪽의 한숨은 늘어났다.
“이거야 원···. 이런 식으로 해서 꼬리를 잡을 수나 있을는지.”
투덜거리면서도 일은 열심히 하고 있다. 김창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었는데 정체 모를 여행자 두 사람은 결국 그에게까지 다가왔다.
“넌 이 마을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창이 말했다.
“여행자니까.”
“그래? 음, 너도 별 정보가 있을 것 같진 않지만 하나 물어보지. 우린 마탑에서 파견된 집행관이다. 간단히 말해서 나쁜 짓을 한 마법사를 잡아가는 마법사야.”
염병. 심민우 그 자식, 절대 벌써 쫓아왔을 리가 없다더니 이미 쫓아왔지 않나. 김창은 헛웃음을 흘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의 직함을 들으면 알겠지만 지금 우리는 어떤 마법사를 쫓고 있다. 키는 좀 작고 얼굴은 창백해. 내 생각엔 이 마을에 들렀을 것 같은데, 혹시 본 적 없나? 정보를 제공한다면 기꺼이 사례하지.”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난 이 마을에 오늘 왔거든. 혹시 내 말이 거짓말 같으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좋아.”
“···후, 이번에도 꽝인가. 아니야, 굳이 물어볼 건 없지. 나도 솔직히 댁한테 정보가 있으리라고 기대하진 않았거든. 그 쥐새끼 같은 자식, 대체 어디로 튄 거야?”
집행관이 한숨을 내뱉더니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협조에 감사하지. 좋은 여행 되시라고.”
그리고 그대로 다시 떠나려는데 김창이 문득 물었다.
“그 마법사가 뭔 잘못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잡으면 어쩔 셈이냐.”
“어쩌긴? 그대로 마탑으로 압송해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지.”
“어떤 식으로?”
“마녀사냥에 대해서 아나? 그걸 마법사한테 하는 거야. 그럼 마법사사냥이라고 할 수 있겠군. 음, 별로 재밌는 농담은 아니었어. 그러니까 십자가에 매달아서 못질 좀 하고, 창으로 좀 찌르고, 달군 불판 위에 올리고, 뭐 그런 걸 하는 거지.”
심민우 이 새끼, 차라리 원탁의 감옥에서 죽을 때까지 썩는 게 낫겠는데.
김창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집행관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끔찍한 소리를 해서 당황한 모양이군. 귀한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우린 이만 떠나지.”
집행관이 이젠 정말 떠나려고 할 때였다.
“이봐, 여행자.”
묵직한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줄곧 가만히 있던 다른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나?”
“뭘?”
“도망친 마법사에 대해서.”
“모른다니까.”
후드 아래에서 집행관의 눈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거짓말을 하는 눈이로군. 내가 네 손톱을 뽑고 손가락을 부러트려도 진실을 숨길 수 있을까?”
“글쎄······.”
김창은 턱을 긁적이며 무심히 말했다.
“그 전에 네가 먼저 뒈질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