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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또 누구냐?”
호르가는 이쪽을 향해 성난 걸음으로 다가오는 남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반대로 산자이는 당황한 얼굴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우와, 당신 엿 됐어요.”
“뭐, 뭐?”
“당신 엿 됐다구. 저 사람 나타나기 전에 다 끝냈어야 했는데···. 아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왔으니 차라리 나으려나?”
산자이가 영문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호르가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뭔 헛소리냐? 아까의 그 자신감은 다 어디 가고 뒤로 도망치는 거야? 당장 나와서 싸워!”
“입 좀 닥쳐요. 다 같이 죽으려고 그래?”
갑자기 왜 저러지? 호르가도 이젠 이상함을 느낄 수 있었다.
“···저 남자 때문이냐? 저 열등종이 뭔데?”
“원탁 대빵.”
“원탁의 수장이라면······.”
호르가가 한석구를 한 번 쳐다봤다. 큰 키, 다부진 체격, 성난 얼굴.
“전사로군. 아주 단련된 전사야.”
“뭔 개소리래? 저 사람 마법사야! 그리고··· 피해!”
뭘 피해? 호르가가 멍하니 있다가 한석구가 갑자기 손을 드는 걸 봤다. 왜 저러나 하고 가만히 있다 보니 갑작스레 냉기가 날아왔다.
“크억!”
날아온 냉기에 밀려 몸이 날아가더니 그대로 벽에 착 달라붙었다. 마치 거대한 수갑처럼 단단한 얼음이 몸을 올려 옴짝달싹도 못 하게 만들었다.
어찌나 꽉 조였는지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크엑······.”
“하여튼 내가 잠깐만 자리를 비우면 별 개짓거리가 다 일어나. 너흰 뭐냐? 뭔데 여기 와서 이러고 있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당황하고 있던 티샬레가 얼른 말했다.
“당신이 원탁의 수장이로군요. 우리 사이에 잠깐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제 설명을······.”
“닥쳐.”
“···네?”
“닥치라고, 이 망할 귀쟁이 놈아. 내 말이 어렵나? 요정 말로 해줘? 너한테 안 물었으니까 닥―쳐!”
그건 요정 말이 아니지 않나. 김창이 이죽거리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한석구가 말했다.
“산자이, 나와.”
“아, 또 나는 왜······.”
“나오라고. 아니면 너도 같이 저기 벽에 붙여줘?”
“씨······.”
김창 뒤에 숨었던 산자이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무슨 일 있었는지 설명해.”
“그게······.”
산자이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걸 가만히 듣고 있던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뭔 이야기인지 알겠군.”
뭔 일이 있었는지 듣고 나서 오해가 약간 풀렸다고 생각한 것인지 티샬레가 얼른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우리는 싸우러 온 것도, 시비를 걸러 온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힘을 빌리러······.”
“내가 아까 닥치라고 안 했나?”
이번만큼은 티샬레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울컥하며 외쳤다.
“이 모욕을 더 참긴 힘들군요. 우리가 뭘 잘못했습니까? 다짜고짜 와서 난리를 피운 것도 아니고 정중하게 대화를 요청했잖아요? 그런데 왜 내가 당신에게 그딴 말을 들어야 하죠?”
그 말에 한석구도 뭔가 느끼는 게 있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그렇군. 내 말이 심하긴 했어. 요즘 들어서 헛짓거리하는 놈들이 많아서 내가 좀 예민해졌나 봐.”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다시 대화를 해볼까요?”
“대화, 그거 좋지. 나도 대화 참 좋아해. 누구처럼 다짜고짜 칼 뽑아서 설치는 것보다 대화가 낫지.”
난 또 왜? 김창이 눈을 흘겼다.
“그러죠. 그러면 정식으로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나는 딜루키둠의 기수이자 황금의 아라비타스를 섬기는 자. 또한 어머니 나무의 자손이니 그 이름은 티샬레······.”
“아, 그래. 어쩌고저쩌고 티샬레. 나는 원탁의 수장인 한석구고 모든 플레이어의 수호자다.”
“···그러시군요.”
“내 말 알아듣겠나? 나는 원탁의 수장이자 모든 플레이어의 수호자라고.”
왜 같은 설명을 또 하지? 티샬레가 미간을 좁히자 한석구가 히죽 웃었다.
“내겐 플레이어들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어. 원탁의 수장이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그게 의무라는 거야.”
“무슨 소리인지는 알겠는데 갑자기 왜······.”
“왜 갑자기 이런 소리를 하냐고? 잘 생각해 봐. 저번에 원탁에 편지 하나를 보낸 적이 있지? 그 뭐냐, 플레이어 하나를 찾고 있는데 협조 좀 해달라. 우리가 걔 찾아서 죽여도 되겠느냐 그런 내용이었거든?”
티샬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건······.”
“내가 그때는 이게 대체 뭔 개소리냐, 누굴 찾는 거냐, 아무것도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 보니 대충 알 것 같아. 너희는 그때도 창이를 찾고 있었어. 찾아서 죽이려고 했지.”
“그때의 일은 유감입니다.”
“유감이지. 나도 유감이야. 그런 뻔뻔한 부탁을 한 놈들이 이젠 우리의 힘을 빌려달래. 정확히는 창이의 힘이지만 어쨌든.”
티샬레는 물론이고 다른 요정들의 얼굴이 모두 굳었다. 그들이 당장 고함치며 덤벼들지 않는 건 제대로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무력화된 호르가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훈련된 요정 전사들이 겁을 먹은 건 아니다. 단지 여긴 적진이고 싸우면 이쪽이 불리하다는 걸 느꼈을 뿐이다.
“내 마음 같아선 당장 애들 끌고 가서 그 잘나신 요정 대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싶어. 그런데 안 그러는 건 괜히 우리 애들 수고롭게 만들기 싫어서 그래.”
“···그러면 결국 힘을 빌려주지 않겠다는 거군요.”
“너희 가주가 와서 직접 머리를 숙이면 빌려줄 수도 있지.”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다. 티샬레는 부득 이를 갈면서 뺨을 움찔거렸으나 한석구에게 덤벼들진 않았다.
그녀가 휙 하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당신들 이방인도 결국 이 세상의 일원입니다. 악의 위협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거야 우리가 알아서 해.”
티샬레가 또 부득 이를 갈았다. 그녀가 고개만 돌려 김창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또 봅시다, 김창.”
김창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땐 돈 가져오고 말해라.”
티샬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성큼성큼 걷기 시작하자 다른 요정들이 얼른 기절한 호르가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들이 모두 사라지자 홀 안에 감돌았던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심민우가 예의 그 심약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는 사이에 한석구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닌 거냐?”
* * *
‘좆됐다.’
티샬레는 단언했다. 난 좆됐다.
사실 아라비타스가 자신에게 임무를 내렸을 때부터 자긴 좆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창인지 씹창인지 하는 놈이 요정 기수 베르고니아는 물론이고 휘하의 요정 부대까지 다 쓸어버렸다는데 그런 놈을 대체 뭔 수로 설득하나?
그래도 가주가 내린 명령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 일단 오긴 왔는데 설득은 역시나 성공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마법사는 또 뭐야?’
한석구라는 마법사가 호르가를 단숨에 제압했을 때, 솔직히 티샬레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요정 대가문의 마법사 중에도 저 정도 실력자는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아니, 애초에 저만한 위력의 마법을 저토록 빨리 사용하는 게 말이나 되나?
게다가 산자이인가 뭔가 하는 요정도 제법 강해 보이던데 원탁에는 괴물 말고는 없는 건가?
‘아라비타스, 이 멍청한 늙은이. 학습 능력이 없나? 기수가 썰리고 요정 부대가 썰렸는데 날 보내면 설득이 될 것 같아?’
티샬레는 자기 객관화가 철저한 요정이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능력에 비해 너무 위까지 올라왔다는 걸 알고 있다.
남들은 그녀를 베르고니아의 뒤를 이을 유력한 젊은 요정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것만큼 웃긴 일도 없다.
베르고니아는 딜루키둠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에 요정 기수 자리에 오른 창술의 천재다. 그러면 나는? 그 뒤를 이을 재목이라 여겨지는 나도 그 정도 재능을 가졌나?
그럴 리가. 티샬레는 자신에게 그 정도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칼이며 활, 창까지 그럭저럭 쓰긴 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베르고니아의 뒤를 이을 재목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런데도 왜 그녀가 다음 기수로서 주목을 받고 있는가?
‘어릴 때부터 허세를 너무 많이 부렸어······.’
딜루키둠을 섬기는 가신으로서 태어나 밑에서부터 올라온 베르고니아와 다르게 티샬레는 날 때부터 딜루키둠의 요정이었다.
그러니 시작점부터 달랐고 노력의 정도 역시 달랐다. 적당한 재능과 특출난 출신, 그리고 본래 성격은 소심한 주제에 남을 상대할 때만 나오는 허세까지.
그 모든 게 합쳐지니 티샬레의 능력은 과장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런 식으로 백 년 넘게 살다 보니 어느새 자신은 다음 시대를 이끌어 갈 인재들의 우두머리쯤 되어버렸다.
난 별 능력도 없는데 왜 여기까지 올라왔지? 나보다 잘난 놈들이 많은데 왜 내가 걔네 위에 있는 거지? 난 그냥 놀고먹으면서 인생 낭비하는 게 꿈이었는데······.
문제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그녀의 본질은 겁쟁이였기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어영부영 백 년을 더 살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은 이제 베르고니아의 뒤를 이을 다음 기수의 재목이 되어 있었다.
‘적당히 자리만 지키다가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아무리 티샬레가 차기 기수가 될 거라는 의견이 다수라고 해도, 기수 자리는 결국 자격의 증명을 거쳐야 한다.
그러니 베르고니아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다음 기수를 선정할 때가 되면 대충 적당한 놈에게 져주고 반쯤 은거할 생각이었는데.
‘베르고니아, 이 망할 기수야. 벌써 죽으면 어떡해······.’
베르고니아가 너무 빨리 죽는 바람에 티샬레는 자격의 증명조차 거치지 않고 기수 자리에 올랐다.
그만큼 상황이 급하다는 이야기겠지만 그게 또 티샬레의 심약한 마음을 짓눌렀다.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는 언제나 목을 졸랐다.
‘아, 내가 미쳤지. 거기서 왜 허세를 부려서.’
티샬레의 본질은 겁쟁이인 주제에 항상 허세를 부리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사실 그게 문제를 악화시켜 왔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지만 요정이란 원래 오만한 종족이기에 고칠 수가 없었다.
아라비타스가 임무를 맡길 때, 그냥 못 하겠다고 해야 했는데······.
“···기수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티샬레가 상념에서 깼다. 그녀가 근엄한 얼굴을 연기하며 말했다.
“왜 그러지?”
“이제 어쩔까요? 원탁 놈들은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요. 돌아갈까요?”
“일단은 호르가의 상태부터 확인하지. 그는 어떤가?”
“호르가는 이제 막 정신을 차렸습니다. 크게 다친 곳은 없지만 가문으로 돌려보내 안정을 취하게 해야 할 듯하군요.”
“그래? 그러면 차원문을 열어라. 너희는 호르가를 데리고 돌아가.”
“···저희만 돌아갑니까? 기수님은 어쩔 생각이신지.”
티샬레는 어릴 적부터 수도 없이 연기했던 어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겐 아라비타스 님께서 내린 명령이 있다. 그리고 난 아직 그걸 완수하지 못했지. 너희까지 날 따라다닐 필요는 없다. 나 혼자서 능히 해낼 수 있는 일이니.”
아, 이 미친년. 대체 뭘 믿고 이딴 소리를 지껄이나? 티샬레는 자기 입을 꿰매버리고 싶었지만 주둥이는 멋대로 지껄였다.
“가문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아라비타스 님에게 전해라. 내 반드시 명령을 완수하고 돌아가겠다고.”
“과연 기수님······. 저는 그간 기수님이 어떤 임무도 훌륭하게 해내는 걸 봤습니다. 이번에도 그러하시겠지요. 그러면 믿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땐 빈말이라도 같이 가겠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티샬레는 속으로 울상을 지었다.
“기수님, 모쪼록 몸조심하시길!”
“어, 어어······. 그래, 조심히 가라······.”
요정 마법사가 연 차원문을 통해 부하들이 하나둘씩 사라졌다. 잠시 뒤 오도카니 혼자 남겨진 티샬레가 중얼거렸다.
“이제 어쩌지······.”
주사위는 던져졌다. 좀 잘못 던졌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