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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42화 (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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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알겠다.”

깔끔하게 정리된 집무실 안, 한석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분명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아서 김창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다.

“화 안 내냐?”

“왜? 네가 나한테 말도 없이 요정들을 썰어 죽여서?”

내가 무슨 도축업자냐? 썰어 죽인다는 게 뭔······. 김창이 헛웃음을 흘리자 한석구도 마주 웃었다.

“괜찮아. 솔직히 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랬으면 나도 화가 났을 텐데, 이번 일은 정당방위였잖아.”

한석구가 그리고 하고 말을 이었다.

“요정 그 새끼들 좀 띠껍긴 했어. 걔넨 원탁이 뭐 애들 소꿉장난하는 데인 줄 아는 모양이지? 어쨌건 잘했어. 이 정도 경고했으면 이제 그 녀석들도 더는 시비 걸지 않겠지.”

글쎄, 과연 그럴까? 김창이 만나본 요정들은 대개 자존심이 강하고 고집이 셌다. 요정 기수가 썰려도 기어코 새로운 기수를 보내는 걸 보면 결국 언젠가는 가주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설지도 모른다.

어쩌면 딜루키둠 하나만이 아니라 다른 요정 대가문 전체와 연합해서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땐 다툼이 아니라 전쟁이 된다. 일곱 요정 대가문 전체가 움직인다는 건 요정 왕국이 움직인다는 소리니까.

원탁이 대가문 하나는 감당할 수 있어도 왕국까지 이길 수 있을까? 김창은 혼자 고개를 저었다.

“···왜 그래?”

“떠나야겠어.”

“떠나겠다고? 요 며칠 여기서 머무르기에 나름 원탁에 정 좀 붙인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었던 모양이지?”

장난스럽게 말하는 한석구를 보며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귀찮게 해서 그래. 그냥 조용히 좀 있게 두지, 왜 자꾸 사람들한테 데려가서 인사를 시키는 거냐?”

“너도 원탁의 식구니까 당연히 사람들한테 얼굴도장 찍어야 할 거 아냐.”

이게 건달들이 신입 들어오면 다른 조직에 인사시키는 거랑 뭐가 다른가? 김창이 혼자 웃는데 한석구가 이어 말했다.

“그리고 일종의 영업도 겸하는 셈이지? 너처럼 강한 칼잡이가 있다는 걸 사방에 알려놔야 우리 이름값이 올라갈 거잖아. 그래야 우리한테 일 맡길 놈은 늘어나고, 우리한테 까부는 놈은 줄어들 테니까.”

사람을 무슨 광고지인 줄 아나? 하기야 영주 내외한테 인사하러 갔을 때, 그들이 김창을 보고서 벌벌 떨던 걸 생각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긴 했을 터다.

여기서 먹고 살며 제법 신세를 졌으니 그 정도는 못 해줄 것도 없나······.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는데 한석구가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디로 가려고?”

“목적지는 따로 안 정했는데. 어쨌건 내가 떠나야 원탁도 안전해지지 않겠냐.”

“뭔 소리야?”

“그 귀쟁이 놈들은 날 노리고 있다. 전에는 날 죽이려고 하던 놈들이 이제는 왜 나한테 굽신거리는지 모르겠지만 언제까지고 그러진 않겠지. 그 자존심 강한 놈들이 나중에 또 뭔 일을 벌일지 모르는 일 아니냐.”

“아니, 그래서 떠나겠다고? 원탁이 위험해지는 게 싫어서? 이거 아주 성자 나셨구만? 야, 그럴수록 오히려 네가 원탁에 붙어 있어야지. 너 혼자서 요정 대가문을 상대할 셈이야?”

김창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못할 것도 없지.”

오만한 발언이지만 한석구는 그걸 비웃을 수 없었다. 김창이라면 정말 칼 한 자루 들고 딜루키둠의 요정을 몰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일이야. 내가 시작했고 내가 끝내야 할 일.”

저 새끼 저거 말하는 것만 보면 당장이라도 요정 대가문에 쳐들어갈 기세인데······. 한석구는 김창을 말려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그런데 요정 대가문도 문제지만 그 대악마라는 놈들도 문제로군.”

오늘 티샬레가 찾아온 목적은 대악마를 상대할 힘을 빌리기 위해서다. 한석구는 그녀를 매몰차게 쫓아내긴 했지만 요정 기수가 말했던 것처럼 원탁 역시 대악마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한석구가 생각하기에 원탁을 대악마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원탁에는 강자들이 많고 대악마라고 해봤자 겨우 네 마리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문제는 이 세상이다. 원탁이 멀쩡하더라도 이 세상이 멸망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나?

농부가 없으면 농사는 누가 짓고, 어부가 없으면 물고기는 누가 잡고, 요리사가 없으면 요리는 또 누가 하나?

옷은 누가 만들고, 집은 누가 짓고, 돈만 주면 해주는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은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원탁은 부수는 건 잘해도 생산적인 일은 못 한다. 그들에겐 아직 이 세상이 필요했다.

“대악마고 나발이고, 걔네도 다 죽여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

“말이야 쉽지. 대악마라는 놈들은 지옥에 있다며? 그런데 뭔 수로 죽여?”

“불러내면 되잖아. 말 나온 김에 하나 불러서 죽여볼까.”

미친놈인가? 지옥에 처박혀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 놈을 왜 굳이 끄집어내겠다는 건가?

한석구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미쳤니? 걔네를 왜 불러내?”

“불러내야 죽일 거 아니야. 싹 다 죽이고 나면 귀쟁이 놈들도 더는 날 귀찮게 하지 않겠지.”

“너 공짜 일은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싫어하지. 근데 이번 건 걔네가 먼저 도움 청했으니까 일 끝내두고 나중에 금액 청구하면 돼.”

칼잡이의 사고방식은 이해할 수가 없다. 한석구가 헛웃음을 흘렸다.

“걔네가 돈 안 주면?”

김창은 대답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 대답이 되었다.

한석구는 오싹함을 느끼며 몸을 약간 떨었다. 그 사실이 뭔가 겸연쩍게 느껴져서 괜히 과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쨌거나 대악마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겠지. 돈이라면 걱정하지 마라. 귀쟁이 놈들이 안 주면 원탁에서 대신 내줄 테니까. 어쨌거나 대악마를 죽이는 건 원탁을 위하는 일이기도 하니까.”

“돈은 일 시킨 놈이 주는 거야. 내가 무조건 받아올 테니까 그럴 필요 없어.”

이거 잘하면 대악마만 죽는 게 아니라 요정도 여럿 죽겠는데. 한석구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면 그 일은 나중에 다시 만나서 의논하도록 하자. 넌 원래 사건에 잘 휘말리는 체질인 것 같으니 다시 돌아올 때쯤이면 대악마 하나 정도는 죽였을지도 모르겠네.”

김창이 그게 뭔 악담이냐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말도 틀린 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게 요 몇 달 사이에 대체 몇 개의 사건에 휘말렸는가? 다음에 원탁에 들리는 건 몇 달 뒤일 텐데 그 정도 시간이면 대악마 하나둘쯤 죽여도 이상하진 않았다.

“그러면 난 간다. 대악마 이야기는 나중에 돌아오면 또 하도록 하고.”

“그래. 집 그리워지면 언제든 돌아와라.”

김창은 여기가 왜 내 집이냐고 따지지 않았다. 그런 걸 따지면 괜히 붙잡혀 있는 시간만 늘어난다.

그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향해 움직일 때였다.

“잠깐!”

쾅!

누군가 거칠게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넌 또 뭐냐?”

멋대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산자이였다. 그녀의 등 뒤로 심민우도 보였는데 둘이 왜 같이 붙어 다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에서 하는 이야기 들었어! 대악마를 불러낼 거라며!”

한석구가 뭐라고 하기 전에 산자이가 지껄였다.

“그래서 내가 적임자를 불러왔어! 어때, 나 잘했지?”

심민우랑 왜 같이 있나 했더니 그것 때문이었나. 확실히 심민우는 지옥의 여덟 기수 중 하나를 불러낼 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다. 악마를 불러내는 일이라면 그만한 적임자가 없을 것이다.

“아, 아니, 저는 제대로 된 설명도 못 듣고 끌려왔는데요?”

심민우의 심약한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는 이미 악마를 불러내는 일 때문에 호되게 고생한 경험이 있었다.

“에이, 뭐 어때? 이제라도 설명했으니 됐잖아?”

“되긴 뭐가 돼요? 저는 악마를 불러낼 생각이 없어요! 그런 일은 한 번이면 족하다고요!”

“아, 쩨쩨하게 그러지 말고! 한 번 시원하게 불러내 보자니깐?”

악마가 무슨 동네 똥개냐? 참다못한 한석구가 소리쳤다.

“야, 산자이!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당장 나가! 누가 멋대로 들어오래?”

“석구 아저씨, 요즘 들어서 화가 너무 많아진 것 같아. 그러면 빨리 늙어요.”

“···넌 왜 자꾸 나한테 아저씨라고 하는 거냐? 나 아저씨 아니야. 그리고 악마를 불러내긴 뭘 불러내? 너도 김창 닮아가냐?”

“난 원래 이랬는데? 애초에 이장우한테 악마랑 거래하는 걸 주선했던 게 나 아닌가?”

생각해보니 그러네. 한석구가 얼굴을 찡그렸다.

“넌 악마가 아주 우습게 보이는 모양인데, 그건 함부로 불러낼 게 아니야.”

“우습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우스운데? 나 강해서 악마 따윈 별로 안 무서워요. 석구 아저씨는 아닌 모양이지?”

“야, 산자이.”

“아, 화내지 말고 들어요. 석구 아저씨가 보기엔 내가 그냥 장난만 치는 것 같겠지만 실은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거든?”

한석구가 억지로 화를 꾹 눌렀다.

“네가 생각이란 것도 하냐? 뭔 생각?”

“아까 왔던 요정 언니나 석구 아저씨나 둘 다 원하는 건 대악마를 죽이는 거잖아? 근데 내가 대악마를 만나본 적은 없어도 걔네가 아주 강할 거라는 건 알거든?”

“그래서?”

“그러니 정보 수집을 좀 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악마를 불러내서 말이에요. 그래야 나중에 대악마를 상대할 때 좀 더 쉽게 싸울 거 아냐?”

이 짝퉁 요정이 왜 정상적인 소리를 하지? 그냥 자기 흥미 때문에 개소리를 지껄이는 게 아니었다고?

한서구가 몹시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 있군.”

“맞지? 그러면 얼른 하나 불러내 보자구!”

김창까지 동의하자 심민우가 불안한 눈으로 한석구를 쳐다봤다.

“어쩔까요?”

“어쩌긴······.”

한석구는 고민했다. 산자이의 말은 그럴듯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그가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있을 때 김창이 말했다.

“뭐가 걱정이야? 악마를 불러냈다가 뭔 일 날까 봐 그러냐. 내가 볼 때 걱정은 우리가 아니라 악마가 해야 해. 걘 나오자마자 우리한테 뒈지도록 처맞을 텐데.”

하기야 여기엔 한석구는 물론이고 산자이와 김창까지 있다. 세 사람 중 한 명만 있어도 악마를 죽도로 괴롭힐 수 있을 테니 악마를 불러내봤자 별일은 없을 터였다.

끙 소리를 내며 고민을 거듭하던 한석구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남들 시선도 있으니 좀 으슥한 데 가서 해보자고.”

“잘 생각했어, 석구 아저씨! 자, 그러면 빨리 가자구요!”

산자이가 신이 나서 심민우의 뒷덜미를 끌고 방을 나섰다. 김창도 움직이자 한석구가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정말 불러냅니다?”

원탁 내부에 마련된 연병장의 구석. 약간 그늘이 져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는 곳에서 심민우가 바닥에 뭔가를 길게 썼다.

악마를 불러내려면 뭔가 동물의 피 따위로 마법 문자를 써야 할 줄 알았는데 그런 건 그냥 겉멋이고 실제로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면 그냥 바닥에 글자만 좀 끄적이면 되는 거냐고 했더니 악마를 불러내기 위한 촉매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촉매? 뭐 어떤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악마마다 달라요. 보통 악마가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물건이어야 하는데요.”

“악마가 좋아할 만한 물건이 뭐 있지? 소나 돼지라도 잡아야 하나?”

심민우가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사실 악마는 그런 제물 바쳐봤자 생고기를 뜯어먹지 않기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러면 저거 어때?”

산자이가 불쑥 손을 뻗어 김창을 가리켰다. 모두의 표정이 묘해졌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자고? 역시 중국인이라 그런지 생각하는 게 좀.”

“뭔 소리야! 쟤 주머니 안에 있는 걸 촉매로 쓰자는 건데.”

내 주머니? 김창이 아무 생각 없이 주머니를 뒤져보니 뭔가 손에 잡혔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는데 꺼내 보니 웬 철 쪼가리였다.

“이게 뭐야?”

“네 주머니에 있던 건데 왜 나한테 물어?”

“이거······.”

김창이 철 쪼가리를 만지작거리다 보니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거 혹시 서리군주의 투구 조각 아닌가?

이게 내 주머니에 왜 들어 있는지는 차치하고, 산자이는 이게 주머니에 들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나? 요정의 눈은 투시 능력이라도 있나?

“왜 그런 눈으로 봐? 주머니에 그거 들어 있던 거 몰랐어?”

“몰랐으니까 이러지. 넌 어떻게 알았는데.”

산자이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잖아. 감각이 영 둔한 모양이네.”

여기서 몇 년 살았지만 그런 소리는 처음 듣는다. 김창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심민우에게 철 쪼가리를 건넸다.

그걸 조심스럽게 받아든 심민우가 철 쪼가리를 바닥에 내려두고 주문을 외울 준비를 했다.

악마를 불러낼 준비는 모두 끝났다.

김창은 영 알아듣지 못할 주문을 외우고 있는 심민우를 보며 칼자루 위에 손을 올렸다. 먼 길 오는 악마한테 딱히 줄 게 없으니 칼빵이라도 놔줘야겠다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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