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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옵니다!”
쭈그린 채로 뭔가 중얼중얼 주문을 외우고 있던 심민우가 벌떡 일어났다. 촉매로 썼던 철 쪼가리가 공중으로 붕 뜨더니 스산한 보랏빛을 발산했다.
빛은 점점 강해지더니 나중에는 눈을 찡그려야 할 정도로 번쩍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확실한데 여기 있는 사람 중 누구도 긴장하지 않았다.
산자이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고 한석구는 이 상황이 불만스러운 듯 입을 꾹 닫고 있었다.
김창은 칼자루에 손을 올린 채로 입을 벌려 하암 소리를 냈다.
곧 온다더니 언제 오는 거야? 설마 나오려다가 몰래 도망친 건 아니겠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중에도 빛은 더욱 강해졌다.
길었던 기다림은 곧 끝이 났다. 점차 강해지던 빛이 이윽고 연병장 전체를 집어삼켰을 때, 어디선가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지옥의 전사이며 또한 영혼의 수확자다. 부름에 응해 여기에 왔으니 날 부른 자가 누구냐?”
김창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느새 보랏빛은 사라지고 촉매로 썼던 철 쪼가리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없었다.
그리고 마법진이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악마가 있었다. 그건 누가 정체를 설명해주지 않아도 악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몰개성한 생김새를 가졌다.
그러니까 큰 덩치에 우락부락한 근육, 머리에는 뿔이 달렸고 등 뒤에는 날개며 꼬리 따위가 달린 생김새 말이다.
게임에서 자주 본 듯한 생김새라 다들 깜짝 놀라진 않았다. 심민우만이 저번의 사건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얼굴이 창백해지긴 했지만 딱히 겁먹은 건 아니었다.
“날 보고 다들 겁이라도 집어먹은 게냐? 왜 아무도 대답이 없어?”
저 멍청한 악마는 혼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창이 그 못생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문득 말했다.
“더 센 놈을 불러야 하는 거 아닌가? 이거 딱 봐도 별거 없어 보이는 저급한 놈인데.”
“···음?”
악마가 또 멍청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에 산자이가 말했다.
“내 생각도 그래. 저거 대충 봐도 아는 거 별로 없어 보이는데? 더 센 놈으로 하나 더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잠깐만? 너희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이냐? 도통 뭔 소리인지······.”
악마의 물음을 무시하며 이번엔 한석구가 말했다.
“하나 더 부르긴 뭘 더 불러? 그랬다가 괜히 도망치기라도 하면 쫓아가기 힘들어. 그냥 쟤한테 물어볼 거 물어봐.”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일단 날개부터 자르고 시작할까? 날아서 도망치면 귀찮아지니까.”
이게 대체 뭔 소리인가? 악마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웬 마법사가 자신을 부르기에 옳다구나 하고 지상으로 올라왔는데 저 인간 놈들은 자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이상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악마는 어리둥절했다가 곧 으르렁 소리를 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인지는 몰라도 이 건방진 인간 놈들에게 자신의 두려움을 알려줘야······.
“크아악!”
갑자기 칼잡이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등 뒤에서 뜨거움이 느껴졌다. 악마는 비명을 지르면서 어깨를 움츠렸다.
“이 망할 놈이!”
재빠르게 몸을 돌리지만 김창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악마는 다시 뒤쪽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섬칫함을 느꼈다.
“크악!”
또 날개가 잘려 나갔다. 악마는 그제야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부르기에 나온 건데, 이게 대체 무슨? 이 새끼들 하는 걸 보면 거래를 하려고 악마를 부른 게 아니라 사냥을 하려고 부른 것 같지 않나······.
“다리 힘줄 자를 건데, 가만히 있어.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움직이면 다쳐.”
그런 무시무시한 말을 하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게 말이 되나? 악마는 지옥에서도 만나보지 못한 미친놈을 보고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이건 자신이 섬기는 여덟 기수는 물론이고 그 위의 대악마조차 하지 않을 짓거리 아닌가.
“끄아악!”
“입 닫아.”
“끄악!”
“혀 깨물어. 입 닫아.”
비명이 연달아 울리고 나서 악마의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김창은 기어코 악마를 다리 병신으로 만들고서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도망 못 갈 테니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라.”
“악마도 마법 같은 걸 쓸 수 있지 않아? 그러면 마법도 못 쓰게 더 철저하게 병신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이 새끼들 미쳤나? 악마는 뭔 무시무시한 소리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껄이는 인간들을 보고서 몸을 덜덜 떨었다.
“죄 없는 악마 괴롭히지 말고 그냥 물어볼 거 물어보고 돌려보내.”
살다 살다 죄 없는 악마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다. 악마는 사냥꾼에게 붙잡힌 짐승처럼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그, 나는 대체 여기 왜······.”
“아, 너무 떨 거 없어. 그냥 몇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부른 거니까 대답 잘하면 살려서 보내줄게.”
악마가 할 수 있는 건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너 악마지?”
“···그래.”
“그 뭐냐, 지옥의 여덟 기수인가 하는 놈들 부하고?”
악마는 잠깐 고민했다. 이 무시무시한 놈들은 여덟 기수에 대해 궁금한 것 같은데 여기서 술술 불었다간 제 주인을 배신하는 짓이 될 터다.
그러면 지옥으로 돌아갔을 때 주인 볼 명목이 없는 셈이다. 하지만 여기서 대답 안 하면 당장 목이 떨어질 테니 의리와 목숨 중에서 저울질을 해야 했다.
“···맞다. 내게 뭘 물으려는 거냐?”
결국 악마는 제 목숨을 택했다. 어쨌거나 당장 살고는 봐야지.
“듣자 하니 여덟 기수는 또 그 위의 대악마를 섬긴다며?”
“그래.”
“그러면 그 대악마라는 놈들에 대해 아는 걸 말해봐.”
악마가 잠깐 생각을 정리한 후에 말했다.
“대악마는 지옥의 지배자다. 지상에서 으스대는 덜떨어진 도마뱀 따위는 감히 적수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지. 또한 그들은 각기 자신의 영지를 다스리며 악마들을 시켜 영혼을 수확한다.”
“그 목적이 뭔데?”
“왜 영혼을 모으겠나? 그거야 당연히 힘을 기르려고 그러는 거지. 그들은 이미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지만 어느 하나가 지옥을 완전히 지배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면 지옥에서 자기들끼리 물어뜯고 싸우면 될 일이지 지상에는 왜 기어 나오려고 해?”
악마가 고통도 잊고 흐흐 웃었다.
“왜 그러겠나? 지옥에선 악마들이 발로 뛰면서 겨우 모아온 영혼을 섭취할 뿐이지만 지상으로 올라오면 인간들을 학살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더 쉽게 영혼을 수확할 수 있으니까 그런 거지.”
한석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뭔 소리인지 알겠네. 하지만 그래봤자 지상으로 올라올 방법이 없잖아? 어떤 멍청한 놈이 대악마를 부르겠어?”
“너는 인간이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을 모르는구나. 먼 옛날, 대악마가 지상에 올라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으냐? 그리고 또한 꼭 누군가의 부름이 있어야만 지상에 올라올 수 있는 건 아니다. 대악마 정도의 격을 가진 존재라면 그것 말고도 다른 방법으로······.”
“다른 방법으로 뭐?”
중요한 곳에서 말을 끊은 악마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이 자식아, 괜히 대가리 굴리지 말고 아는 대로 말해.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성기사도 있거든? 너 걔 오면 죽는 거보다 더한 꼴 당할 텐데 그거 감당할 수 있겠냐?”
한석구의 협박에도 악마는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그건 확실히 이상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눈을 한 바퀴 돌리는 게 아니라 마치 누가 뒤에서 잡고 흔드는 것처럼 정신 사납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케윽.”
“이거 왜 이래? 눈깔이 맛이 갔는데?”
“케윽, 켁, 아, 아닙, 케윽, 아닙니다, 아니······.”
악마의 눈이 까뒤집히더니 이젠 입을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기 시작했다. 그 못생긴 얼굴로 저딴 짓을 하고 있으니 확실히 봐주기 어려웠다.
산자이가 으엑 소리를 내는 가운데 악마가 혼자서 지껄였다.
“케으윽, 켁, 주, 주인님, 케윽, 저는 아무것도······.”
악마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러면서 켁켁 소리도 더욱 잦아졌다. 저 자식 왜 저래? 김창이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목구멍 안쪽에서 뭔가 보였다.
그건 눈이었다.
마치 불타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황금의 눈. 사람 머리통만 한 크기의 눈이 목구멍 안을 압박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저거?”
한석구는 물론이요 산자이도 그걸 봤다. 심민우가 으악 소리를 지르며 김창의 뒤로 숨는 가운데 악마의 입이 더 크게 벌어지며 숨이 넘어갈 듯 꺽꺽 소리를 냈다.
“자, 잘못···, 켁!”
쩌저적!
기어코 악마의 턱관절이 부서지고 입 근육이 찢어졌다. 목구멍 안에서 이글거리던 눈은 어미의 배를 찢고 나오는 괴물처럼 악마의 얼굴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그 기괴한 광경은 한석구나 산자이라고 해도 무심히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공중에 둥둥 뜬 눈알을 쳐다봤다.
그건 마치 거인의 눈을 손으로 잡아 뜯은 것처럼 시신경 다발 따위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또한 그 상태로 불타고 있으니 기이하면서도 징그러운 느낌이 강했다.
불타는 눈은 혼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뭔가를 찾는 듯 보였다. 그러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여기로군. 하여튼 외눈이라 그런지 잘 안 보인단 말이야.”
나직한 목소리지만 거기엔 위엄이 있었다. 그것은 지배자의 위엄이었다. 남들 위에 군림하며 또한 지배하는 자의 목소리.
“···넌 또 뭐냐?”
“나를 모르느냐? 하긴 당연히 모르겠지. 내 본래의 모습으로 현현한 것도 아니고 이깟 것에 의지하여 모습을 드러냈으니. 통로로 쓴 악마 놈이 너무 약해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된 건 아주 유감이야.”
겨우 눈 하나만 드러냈을 뿐인데 그 위압감은 온전하게 현현한 악마의 것보다 더 엄청나다. 그러면 저 정체 모를 놈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악마란 놈들은 대개 묻지도 않은 별명을 줄줄 나열하는 버릇이 있지. 나 역시 악마이긴 하나 그런 건 질색이라 간단히 소개하마. 나는 지옥의 처형자이며 또한 심연의 대군주다. 날 부르는 이름은 많으나 줄줄이 소개하진 않겠다. 기억해라, 나는 만네르헤임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 이름을 처음 듣는 모양이었지만 김창은 아니었다. 그가 차분히 물었다.
“서리군주 놈의 주인?”
“그래, 네가 죽였던 서리군주의 주인이 바로 나다. 뭐 엄밀히 말해서 그 영혼은 아직 내 수중에 있지만.”
한석구가 두 눈을 부릅뜨며 불타는 눈과 김창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리군주의 주인이라면 저 눈이?
“내 주머니에 철 쪼가리가 왜 들어있나 했더니 네가 수작을 부린 거였군. 남 미행하는 게 취미냐? 악마답게 아주 음습해.”
“그거 대단히 기쁜 말이로군. 악마라는 건 원래 그런 법이야. 어쨌거나 너도 나와 대화할 수 있게 됐으니 서로 나쁠 건 없지 않으냐?”
“글쎄, 네가 진짜 몸으로 왔으면 칼침이라도 좀 놔주는 건데 그럴 수 없어서 아주 아쉬워. 그 눈 혹시 네 거냐? 찌르면 네가 고통스러울까?”
“이건 그냥 마법적인 조화일 뿐이다. 내 눈도 아니고 애초에 진짜 눈도 아니지. 그냥 그런 마법일 뿐이야. 원한다면 다른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지만 역시 이게 제일 그럴듯하지 않나?”
김창이 어깨를 으쓱였다.
“모습이 뭔 상관이야? 그래서 날 미행한 이유가 뭐냐? 결투 신청이라도 하려고? 그런 거라면 내 기쁘게 받아들이지.”
“아쉽게도 그런 게 아니다.”
“그럼?”
“모레이에게 듣자 하니 너는 돈 주면 뭐든 죽여주는 칼잡이라던데. 그러면 내 하나 묻지.”
뭘? 김창이 눈썹을 까딱이자 만네르헤임이 말했다.
“혹시 대악마의 의뢰도 받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