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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52화 (5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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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게 뭔······.’

김창은 자신의 내면에서 또렷하게 느껴지는 신성에 당혹감을 느꼈다.

용을 섬기는 난쟁이를 죽였을 때부터 자신의 내면에 신성이 깃들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껏 크게 신경 썼던 적은 없다.

왜냐하면 신성을 얻긴 했지만 정말로 신성해지거나 뭔가 신다운 권능을 부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성이라는 건 듣기에는 멋져도 실제로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그게 있으면 승천의 자격이 생기는 셈이라지만 결국 천상의 권좌에 오르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더군다나 김창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세상에, 칼잡이가 신이 된다니? 세상이 대체 어찌 되려고?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신성이 갑자기 왜?’

이름만 거창하고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신성이 왜 갑자기 커졌는가? 그 해답이야 간단하다.

김창은 눈을 내리깔고 대악마 칼레드리온을 쳐다봤다. 분명 심장을 찔렀는데 아직 목숨이 완전히 끊어지진 않았는지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다.

갑작스레 신성이 커진 이유는 당연히 대악마를 무찔렀기 때문이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은 남들이 감히 해내지 못할 위업을 이루어내는 존재다.

그런 위업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전설이 되고, 그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영웅은 필멸자의 몸을 벗어나 천상의 일원이 되거나 별의 주인이 되곤 한다.

김창이 대악마를 무찌른 것 역시 그런 위업에 비할 만한 일이다. 만약 칼레드리온이 지상에서 무자비한 살육을 시작했다면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테니까.

그러니 이건 확실히 신성이 커질 만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왜 이번에만? 처음 신성을 얻고 난 후에도 여러 싸움을 벌이지 않았나? 저번에 서리군주를 무찌른 것만 해도 제법 대단한 위업이었을 텐데.

‘그깟 놈 따위는 시련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안 되는가 본데.’

신성이라는 걸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내려주는 건진 몰라도 그가 보기에 서리군주는 별 대단한 위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기야 서리군주라고 해봤자 여덟 기수와 비슷한 수준의 적일 테니 그딴 걸 죽이고 대단한 일 했다고 으스대는 것도 좀 우스운 일이긴 하다.

‘조각난 신성을 전부 모아야 완전한 신성으로서 기능하는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닌 모양이지······.’

본래 김창이 가지고 있는 신성은 먼 옛날 어떤 용이 천상에서 훔쳐낸 것으로 그가 지상에 추락할 때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승천하기 위해서는 본래 양만큼의 신성이 있어야 할 테니 승천할 자들은 서로의 신성을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시련을 극복하고 위업을 달성하는 것만으로 신성의 양을 늘릴 수 있다면 꼭 다른 승천할 자들과 충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들로선 다른 승천할 자를 죽이고 신성을 빼앗는 게 좀 더 확실하고 쉬운 방법일 테니 순순히 영웅 놀이나 하고 다니진 않겠지만.

“돈 받고 하는 일인데 별걸 다 얻는군.”

있어 봐야 별 도움 될 것도 없는데 괜히 거추장스러운 혹만 늘어난 느낌이다. 김창이 대악마의 심장에 박았던 칼을 뽑아낼 때였다.

“···네 영혼의 격이 상승했구나, 칼잡이야.”

이 새끼 아직 안 죽었나? 세상에 심장 찌르면 안 죽는 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닌 모양이었다. 대악마쯤 되면 심장 찔려도 얼마 정도는 살 수 있는가 보다.

하기야 닭 같은 것도 머리 잘린 채로 몇 분 정도 발광하며 뛰어다니지 않나? 미물인 닭조차 그럴 수 있는데 대악마 정도면 심장 찔리고도 살아있는 게 영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죽기 전 잠깐의 시간일 뿐이다. 닭이 목 잘린 채로 영영 살 수는 없고 대악마도 심장 찔린 채로 영영 살 수는 없다.

대악마 칼레드리온의 몸에서 불길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건 마치 그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알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 몸을 불사른 거인의 마지막은 그를 죽였던 잿빛의 칼날처럼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김창은 점차 꺼져가는 대악마의 눈을 보며 물었다.

“그건 또 뭔 소리냐.”

“···뭔 소리긴? 너도 느꼈을 것 아니냐. 네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신성을 말하는 거냐? 근데 그게 뭐. 어차피 승천할 거 아니면 있어봤자 별 필요 없는 거 아닌가.”

무심하게 말하는 김창을 보며 칼레드리온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와서 별로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멍청한 놈. 너는 신성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냐? 신성을 얻을수록 네 비루한 육신이 승천자의 것과 같아진다는 걸 모르느냐? 네가 신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너는 신에 가까워진다는 소리다.”

김창은 문득 제 몸을 쳐다봤다. 분명 칼레드리온과의 전투로 지쳐 있어야 할 몸에 활력이 돌아와 있었다.

또한 몸 곳곳에 생겼던 타박상의 고통 역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사라지고 없었다. 이건 괴물 같은 재생력을 가진 정복자나 돼야 가능한 일인데.

김창은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들고서 주먹을 쥐었다. 단단한 돌멩이가 모래처럼 손쉽게 바스러지는 걸 보고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원래 플레이어의 육신은 게임 캐릭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라 이 세상 사람들 것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강력하다.

그러니 다른 플레이어 중에서도 돌멩이를 맨손으로 부술 수 있는 자들은 적지 않게 있다. 손으로 돌멩이 좀 부쉈다고 깜짝 놀랄 만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김창이 할 수 있는 재주는 아니었다. 그는 칼 들고 뭔가를 썰어 죽이는 칼잡이지, 맨손으로 사람 머리통 부수는 격투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젠 맨손으로 돌멩이 정도는 손쉽게 부술 수 있게 되었다. 이것도 신성 때문인가? 하지만 처음 신성을 얻었을 땐 몸에 아무 변화가 없었는데 왜 이제야?

그때 얻은 신성은 너무 양이 적어서 신체에 영향을 줄 만큼이 아니었나? 그럼 그때의 신성보다 지금 얻은 신성의 양이 더 많다는 것인가?

김창은 발밑에 흩어진 돌가루를 보고서 입을 꾹 다물었다.

“······흐흐흐, 대악마를 토벌하는 것은 과연 영혼의 격을 드높일 만한 과업이지. 하지만 칼잡이야, 명심해라. 모든 승천할 자가 신성을 쌓아 승천한 것은 아니었음을. 그들은 스스로가 이 땅에 새로운 빛을 몰고 올 존재라 여겼지만 대부분은 빛을 삼키고 몰락했다는 것을. 내가 볼 땐 너 또한 그럴 것 같구나. 너는 악의 대적자가 되거나 아니면 악 그 자체가 될 자로다······.”

김창은 칼레드리온이 뭐라고 지껄이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지금 신성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신성을 얻게 되면 그 육체 역시 신에 걸맞게 변한다. 지금이야 맨손으로 돌멩이를 박살 내는 정도지만 이보다 더 많은 신성을 얻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또 다른 승천할 자를 죽여 그 신성을 취한다면? 그러면 나는 반신이 될 것인가? 그때가 되면 진정으로 신성을 휘두르며 숭배자들을 거느리게 될까?

‘이 세상에는 보람을 느낄 만한 게 없었지.’

왜 지금껏 쓰지도 않을 돈을 그토록 열심히 모았는가? 보람을 느끼기 위해서다. 게임에선 경험치로 명확히 나타나던 걸 여기서는 보수의 액수로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지 않나. 경험치는 모으면 레벨이 올라가지만 돈은 아무리 모아도 더 강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성은 어떠한가? 내 노력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며 또한 그걸 모으며 더 강해질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이게 경험치와 다를 게 뭐지? 모으지 않을 이유가 있나?

‘하지만 이젠 보람을 느낄 만한 일이 생겼군.’

영웅이 될 마음은 없다. 반신이 되어 숭배자들을 거느릴 생각이 없음은 물론이고 진짜 승천자가 되어 천상의 권좌를 차지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신성은 모아야겠다. 그래야 이 개 같은 세상에서 조금이나마 보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아, 이딴 식으로 뒈질 줄 알았으면 지상으로 올라오지 않는 건데. 저 버러지들을 보고 멍청했다고 욕했지만 나 역시 다를 건 없었군. 하기야 승천할 자가 있으리라 그 누가 생각했겠느냐.”

슬쩍 매장결사 쪽을 보니 거긴 제 주인이 칼잡이 하나에게 당해 쓰러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이든과 신시아에게 밀리는 형국이었는데 칼레드리온이 졌다는 것에 싸울 의지가 확 꺾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두 명의 성기사는 신나게 악마숭배자들의 목을 날려버릴 수 있었다. 개중에 몇 명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 차원문을 열어 도망치려 했지만 빛나는 칼날은 도주를 허용하지 않았다.

김창은 이든과 신시아가 심문을 위한 악마숭배자 하나만을 남겨두고 모두 죽이는 걸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젠 몸의 절반 넘게 재로 변한 칼레드리온이 말했다.

“칼잡이야, 너는 진정으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느냐?”

김창이 칼레드리온을 멀뚱히 보다가 말했다.

“넌 뭔데 아직 안 죽었냐.”

“······내 영혼의 격이 너무 커서 금방 소멸하지 않은 것뿐이다. 나도 이제 곧 뒈지겠지.”

“그래,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해라. 들어는 줄 테니까.”

칼레드리온의 몸은 이제 목과 머리만 남았다. 그 정도로도 말은 할 수 있는 모양이니 참 신기한 일이었다.

“날 이겼다고 해서 너무 기고만장하진 말아라. 내가 너에게 졌던 건 지상에 현현하면서 내 힘의 일부를 잃었기 때문이니까. 지옥에서 제대로 붙었다면 내가 이겼다는 소리다.”

졌으면 진 거지 혓바닥은 또 왜 이렇게 긴가. 그딴 말을 하면 추하기만 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새끼, 죽을 때가 됐으면 대악마답게 가오나 좀 잡을 것이지 이게 대체 뭔가? 있던 위엄도 다 떨어져 나갈 듯한 언행에 김창이 픽 웃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그게 다냐? 이젠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할 말 있으면 더 해.”

“······만네르헤임이라는 대악마를 아나? 그는 나의 강력한 경쟁자였지. 우리는 지옥에서 영겁의 시간 동안 다투며 서로의 강함을 인정했다. 나는 날 죽일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건 오직 만네르헤임뿐이라고 생각했지. 그건 그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칼잡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지 알겠느냐?”

“글쎄.”

칼레드리온이 스산한 웃음을 흘렸다. 바람이 불어와 재가 날아올랐다.

“만네르헤임이 널 찾아내 죽일 것이다! 그리고 네 신성을 갈취하겠지! 너는 대악마의 개가 되어 죽지도 못한 채로 부려질 것이라는 소리다!”

한바탕 외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는지 칼레드리온이 크게 웃었다. 김창은 그 모습을 보며 가만히 대답했다.

“그러냐? 그럼 나도 한 가지 좋은 걸 알려주지.”

“···뭐?”

김창이 웃으며 말했다.

“너 죽여달라고 나한테 부탁한 게 만네르헤임이다, 등신아.”

“뭐, 뭐?”

“걔가 너 죽여달라고 했다고.”

아니, 그럴 리가 없는데? 칼레드리온이 멍하니 있다가 중얼거렸다.

“만네르헤임 씹새끼, 나만 친구라고 생각한······.”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재를 날려보냈다. 대악마의 유언은 그걸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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