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대악마가 뭔 친구 타령이야.”
물론 악마라고 친구가 없으리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좀 우스운 일 아닌가. 김창이 혼자 비웃음을 흘리며 칼집에 칼을 꽂았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성기사들은 이미 전투를 끝낸 후였다. 신시아는 어디선가 가져온 끈으로 마법사 한 명을 단단히 결박하고 있었고 이든은 이쪽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이 왠지 딱딱하게 느껴졌다. 이미 전투는 다 끝났으니 이제 좀 웃어도 될 텐데 왜 저러고 있는 걸까.
설마 격렬한 전투 끝에 용변이 급해진 건 아닐 텐데. 김창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이든 쪽으로 다가갔다.
“왜 똥 마려운 개처럼 그러고 있냐. 칼레드리온이라면 완전히 소멸했으니 이제 걱정할 거 없어.”
이든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혹시 존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 새낀 갑자기 또 왜 이러나? 김창은 갑작스럽게 존댓말을 하는 이든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성기사가 왜 저러는지야 뻔했다. 김창이 방금 막 대악마 칼레드리온을 무찔렀기 때문이다.
그것도 그냥 지옥으로 쫓아내기만 한 게 아니라 완전히 숨통을 끊어 거대한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그건 성기사 두 명은 물론이고 한 부대가 달려들어도 불가능한 위업이다. 그걸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니 어찌 감히 말을 낮추겠나?
김창은 제 위업을 으스대며 자랑하는 사람은 아니기에 이런 반응이 별로 기껍진 않다. 이런 존댓말은 오히려 귀찮기만 할 뿐이다.
“갑자기 웬 존댓말이냐. 그냥 하던 대로 말해.”
“고마운 말씀이지만 제가 감히 어찌 그럴까요.”
김창은 잠깐 생각하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존댓말 하려면 그냥 하라고 했을 뿐인데 감사를 받을 건 또 뭔가. 김창은 지금껏 뭔가를 죽이고 나서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기에 기분이 영 이상했다.
그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하고서 말했다.
“내 이름을 물었던가? 김창이다.”
“플레이어였군요. 별의 바다를 지나 까마득히 먼 곳에서 온 이방인.”
이든도 나름대로 짐작은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태양신의 기사로서, 그리고 한 명의 독신자로서, 당신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은 정말 큰 위험에 빠졌을 겁니다.”
이든이 머리 숙여 인사하자 김창이 멀뚱히 그 정수리를 쳐다봤다.
“애초에 내가 댁 방해만 안 했어도 칼레드리온이 지상에 올라올 일도 없지 않았나? 딱히 감사의 말을 들을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칼레드리온이 완전한 죽음을 맞지 않았습니까? 결과를 따지자면 오히려 더 좋아진 셈이지요.”
하기야 그 말대로다. 칼레드리온을 지옥으로 쫓아내봤자 언젠가는 또 지상으로 기어 올라올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고 언제나 탐욕에 눈이 멀어 있으니까.
오늘 매장결사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또 다른 조직이 대악마를 불러내려 할 수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면 대악마를 죽인 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위험의 싹을 잘라낸 것과 같은 일이었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저쪽에서 좋게 봐주겠다는데 굳이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다.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 이든이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대단하군요. 아깐 당신의 말을 믿지 못한 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대악마와 홀로 맞서 싸우는 건 신전 제일의 성기사인 카룩스 경이나 가능한 일일 겁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창이 문득 물었다.
“카룩스인가 하는 걘 또 뭐냐? 태양신의 성기사 중 제일 강한 건 정복자 아니었나.”
그 말에 이든이 어물거리다가 대답했다.
“···물론 정복자 경도 강하지요. 분명 카룩스 경과 호각일 겁니다.”
정복자의 이름에 경을 붙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우습다. 그도 그럴 게 현실에서 기사 작위를 받는 건 죄다 외국인이라 한국인 이름 뒤에 경이 붙을 일이 없지 않은가.
게다가 정복자의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서 웃음이 나지 않을 수가 없다. 김창이 남모르게 웃고 있을 때 이든이 말했다.
“하지만 정복자 경은 아무래도······.”
말끝을 흐리는 이유야 알만했다. 정복자는 태양신의 성기사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캐릭터 설정이 그런 것뿐이다.
새벽에 게임 하던 놈을 갑자기 데려와서 너는 이제부터 태양신의 종복이라고 해봤자 뭔 반응이 나오겠는가?
정복자가 상식이 있는 놈이라서 다행이지, 다른 놈이었다면 성기사의 이름을 달고서 사람 죽이고 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게다가 정복자는 사실상 원탁의 이인자인 만큼 신전의 일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신앙심도 없고 성기사로서의 의무도 행하지 않는 자를 같은 성기사로 여기는 건 확실히 어려운 일이었다.
“하기야 걘 캐릭터가 성기사인 거지 진짜 성기사는 아니니까.”
이든은 캐릭터가 뭐냐고 굳이 묻진 않았다. 그냥 이방인이 하는 말이려니 할 뿐이었다.
김창이 물었다.
“그런데 그 카룩스라는 놈이 그렇게 강하나?”
“태양신을 섬기는 성기사 중 가장 강합니다. 아, 물론 정복자 경을 제외하고요.”
내가 볼 땐 그 새끼도 정복자한테는 안 될 텐데. 김창은 정복자를 싫어하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그와 칼을 맞대고 살아남은 사람은 정복자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어쨌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은 꼭 신전에 보고하여 위업에 걸맞은 감사를 받을 수 있게 해드리지요.”
김창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다.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나.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마법사를 끈으로 단단히 결박해서 끌고 온 신시아가 말했다.
“첫 만남 때의 무례를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제가 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난 그냥 돈 받고 내 할 일 한 것뿐인데 귀인이 어쩌고 소리 들을 거 없다. 정 감사 인사하려면 신전에 가서 황금이나 좀 받아오던지.”
대악마를 무찌른 용사치고 속물적인 발언이긴 하지만 신시아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만족하신다면, 그러지요.”
“그런데 너희는 이제 어쩔 거냐? 대악마도 죽었겠다, 신전으로 돌아가나?”
“그래야죠. 일단 이 마법사 놈을 데리고 가서 다른 악마숭배자들에 대한 정보를 토해내게 할 생각입니다.”
“신전으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날 따라와라. 칼라드로 가자.”
“···칼라드요? 거긴 갑자기 왜?”
“나는 칼라드에서 여기까지 차원문을 통해서 왔다. 원탁에 가면 마법사 하나가 있을 건데, 걔한테 부탁하면 신전까지 가는 차원문을 열어줄 거야. 그러니 그걸 통해서 가라.”
이든이 버릇처럼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감사한 말씀이군요! 덕분에 신전까지 돌아갈 수고를 덜었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거 아니야.”
애초에 자신이 차원문을 여는 것도 아니니 괜히 으쓱거릴 필요는 없는 일이다. 김창이 위로 올라가자는 듯 손가락을 들었다.
그걸 본 이든과 신시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지상으로 올라갔다.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군요.”
신시아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지상으로 올라오자 영주궁 주변을 여러 사람이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 같이 두려움이 가득 했다.
사람들은 지하에서 올라온 김창 일행을 보고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저 아래에서 뭔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도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는 건 알았기 때문이다.
“신시아 경, 사람들을 안심시키게. 대악마에 대한 건 굳이 말하지 말고.”
“네, 그러지요.”
신시아가 신전의 문양이 찍힌 칼을 꺼내 머리 위로 들었다. 그러자 시커먼 구름이 걷히고 한 줄기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걸 본 사람들이 오오 소리를 내뱉자 신시아가 엄숙히 말했다.
“이 땅은 이제 태양신의 가호 아래에 있습니다. 악은 사라졌으니 다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젠 안전하다는 소리에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일부는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 채로 무언가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기도를 하는 모양이었다.
“이쪽으로 가지.”
김창의 말에 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시아도 이제 칼을 내리고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등 뒤에서 여전히 기도 소리가 들렸다.
“여기다.”
김창이 숨겨져 있던 차원문을 가리키자 성기사들이 호오 소리를 냈다.
“차원문을 연 마법사의 실력이 대단한 모양이군요. 혼자서 이 정도로 오래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니.”
“대단하긴 하지. 그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지만.”
신랄한 말을 내뱉은 김창이 먼저 차원문을 통과했다. 연병장으로 돌아오자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넌 뭔데 여기서 자고 있냐.”
“음, 으음?”
아직 잠기운이 남은 듯 눈을 비비고 있는 건 심민우였다. 아무래도 그가 차원문을 지키고 있는 모양인데 김창의 얼굴을 발견하자 헉 소리를 냈다.
“벌써 돌아오신 겁니까? 혹시 대악마를 못 죽여서 도망친 건 아니죠?”
“뭔 헛소리야. 가서 한석구나 데려와.”
“아, 넵.”
심민우가 한석구를 부르러 달려간 사이에 이든과 신시아, 그리고 붙잡힌 마법사가 차원문을 통과했다.
잠깐 기다리자 심민우가 한석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이야, 되게 빨리 돌아왔네? 대악마라는 놈도 별거 없던 모양이지?”
“그래도 좀 강하긴 하던데.”
대악마에 대한 평가는 그게 끝이었다. 한석구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걱정했던 내가 바보 같을 지경이네.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더니 네 걱정도 그러네. 하기야 널 누가 죽이겠냐마는. 그런데··· 뒤쪽에 그 사람들은?”
“성기사들. 이쪽은 이든이고 이쪽은 신시아. 붙잡힌 놈은 매장결사의 마법사고.”
김창이 호엔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한석구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허어, 그랬단 말이지? 그거참 큰일이로군.”
“뭐가 또 큰일이야? 대악마는 죽었고 도망친 매장결사 놈도 없는데.”
“아니, 네 말대로라면 호엔의 영주가 죽었다는 거 아니야?”
“그런데?”
“그리고 영지민들은 지금 불안에 떨고 있고.”
“그래서?”
“그러니 큰일이지. 영지의 주인은 죽고 영지민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그들을 지켜줄 사람은 없는 거잖아.”
이 새낀 또 갑자기 뭔 헛소리인가? 그게 대체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를 일이다.
김창이 미간을 찡그리자 한석구가 이든을 쳐다보며 물었다.
“거기 성기사 양반? 내가 왕국법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뭐 하나 물어봅시다.”
“음? 나 말이오? 어, 어어, 물어보시오. 뭘 물으려는 건진 모르겠지만······.”
“내 알기로 영주가 죽으면 영지는 자식에게 상속되는 게 맞나?”
“맞소. 자식이 없으면 친척이 물려받겠지.”
“혹시 호엔의 영주에게 자식이 있나? 아니면 친척은?”
“···내가 알기론 없을 거요.”
“그럼 자식도 없고 친척도 없으면 누가 물려받지?”
이든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성실히 대답했다.
“그런 경우는 잘 없지만······. 보통은 영주가 남긴 유서에 따라 다르겠지. 믿을 만한 가신에게 영지를 넘긴다고 하면 그가 다음 영주가 될 거요.”
“그거 잘됐네.”
잘 되긴 뭐가? 김창이 물으려는데 한석구가 말했다.
“먹자, 그거.”
“뭘?”
“호엔, 그거 우리가 먹자고. 어차피 이제 주인도 없는 땅인데 우리가 홀랑 먹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어?”
미쳤나? 김창이 어이없어 하는 사이에 이든이 다급히 말했다.
“아니, 영주가 유서를 남기지 않았는데 어떻게 원탁이 호엔의 주인이 된다는 거요?”
“유서? 그거 그냥 조작하면 되는 거 아닌가?”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이든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막말로 유서 좀 조작했다고 누가 알 거야? 설령 누가 안다고 해도 뭘 어쩔 건데? 나한테 와서 따질 수 있나? 이거 조작됐다고 누가 와서 따질 건데?
그리고 오해할까 봐 말하는 건데 이거 다 좋은 뜻에서 하는 거야. 내가 그 거지 동네 먹어서 뭘 하겠어? 오히려 나가는 돈만 많겠지. 그런데 왜 굳이 먹냐고? 그거야 거기 사람들이 불쌍하니까 그러지.
생각해봐. 거기 안 그래도 살기 힘든 동네인데 웬 정신 나간 놈이 새 영주로 들어오면 어쩔 거야. 그런 일 생기기 전에 내가 먼저 자리 잡고 지켜주겠다는 건데 뭐 어때? 물론 명목상 세금은 좀 걷겠지만 그거야 원래 영주의 적법한 권리 아닌가······.”
미친놈. 진짜 조폭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영업하진 않겠다. 김창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