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티샬레는 선수에 서서 샤카리오네를 쳐다봤다.
‘겁먹을 거 없어. 저건 진짜 용이 아니니까······.’
용은 반신적 존재다. 비록 신성을 얻어 승천할 수 없는 몸이긴 하지만 그 강함만 따지자면 진짜 반신과 다를 게 없다.
그만큼 강한 존재가 이런 곳에서 지나가는 선박이나 습격하고 있을 리는 없다. 그건 용의 이름값에 비하면 너무 격 떨어지는 짓이요, 또한 아산트 섬의 주인인 하이나의 권위를 무시하는 짓이니까.
그러니 저 바다 괴수는 진짜 용이 아니다. 거대한 덩치와 용을 닮은 생김새는 샤카리오네가 용의 먼 친척쯤 되는 멍청한 괴물이라는 사실만을 증명할 뿐이다.
‘만약 싸우다 정말 위험해지면 저 두 사람이 도와줄 테니까······.’
티샬레는 슬쩍 고개를 돌려 김창과 한석구를 쳐다봤다. 그들의 실력이라면 저깟 괴물 따위는 손쉽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그들은 지금 티샬레의 신분 보증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설마 그냥 죽게 두겠어?
“쟤 혼자 싸우게 둬도 되나? 저러다 죽으면?”
“그러면 죽는 거지 뭘. 쟤 없어도 섬에 들어가는 거야 어떻게든 되지 않겠냐.”
“뭐 정 안 되면 억지로 뚫고 들어갈 수도 있는 거니까.”
티샬레는 얼굴을 굳혔다. 아무래도 정말 나 안 구해줄 모양인데, 이러면 나 큰일 난 거 아닌가?
이거 진짜 죽기 살기로 싸워야 하는······.
“뭘 쳐다봐? 지금 너한테 짬 때렸다고 항의라도 하는 거냐.”
그냥 쳐다본 건데······. 티샬레가 투덜거리면서 등 뒤의 무기를 손에 쥐었다.
그녀의 무기는 베르고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창이었다. 원래 딜루키둠 가문은 일곱 요정 대가문 중에서 창을 가장 잘 쓰기로 유명한 곳이었기에 기수가 되려면 창술의 달인이 돼야 했다.
물론 티샬레는 기수 자리에 오르는 걸 원하지 않았지만 어쨌건 창술을 익히긴 했다. 그 실력이 베르고니아 이상이냐고 하면 솔직히 장담은 어렵지만······.
“이 벌레 같은 놈들아. 목숨이 아깝다면 내게 공물을 바쳐라.”
바닷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샤카리오네는 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새삼 거대하다. 저런 거대한 괴물을 나 혼자서 상대할 수 있을까?
티샬레는 뭔가 속이 꼬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 미친년. 그러니까 왜 쓸데없이 허세를 부려서.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어서 내게 공물을······.”
“아아, 시끄럽다! 이 티샬레가 널 죽여주마, 이 더러운 바다 괴물 녀석아!”
쩌렁쩌렁한 외침은 티샬레의 것이었다. 자기가 외치고도 깜짝 놀랄 만큼 커다란 외침이었다.
갑자기 왜 저런 외침을 날렸냐면, 속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더부룩한 탓이었다. 뭔가 소리라도 지르지 않으면 긴장으로 속에서 뭔가를 게워낼 것만 같다.
“······음? 요정?”
샤카리오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티샬레를 쳐다봤다. 이제는 도망칠 수 없다.
티샬레는 창대를 세게 쥐고서 전투 자세를 잡았다. 자세를 낮추고 창끝으로 샤카리오네를 겨누었다.
이쪽은 배 위에 있고 저쪽은 바닷속에 있다. 게다가 신장의 차이도 엄청나게 나고 있으니 저런 걸 상대하려면 어째야 하나?
“불어라!”
티샬레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발밑에서 강한 돌풍이 몰아쳤다.
“···마법?”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한석구가 흠 소리를 냈다. 저 요정, 창 쓰는 솜씨만 해도 상당한 것 같던데 거기에 마법까지 쓸 줄 아나?
물론 마법이라고 해봤자 별 대단한 실력은 아니지만 싸움을 보조하는 용도라면 저만치만 해도 충분할 터다.
게다가 이미 창술을 익힌 상태에서 저만큼이나마 마법을 익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저런 걸 보면 요정 기수라는 것도 무시할 만한 존재는 아닌 모양이다.
“하압!”
요정 특유의 강력한 도약과 발바닥을 밀어내는 마법의 힘, 그 두 가지 덕분에 샤카리오네의 머리 위까지 뛰어오른 티샬레가 창끝으로 괴물의 정수리를 노렸다.
“···으음?”
샤카리오네는 자신의 머리 위로 티샬레가 떠오른 걸 보고도 멍청한 목소리만 내고 있었다.
싸울 생각이 없나? 아니면 그깟 요정 따윈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티샬레가 날카로운 창날로 정수리 위를 내리찍었다.
“크아아아악!”
덩치가 크면 뼈도 큰 법이다. 그리고 큰 뼈는 훨씬 더 두껍고 단단한 법이고.
티샬레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속도와 힘을 이용해 내려찍은 공격도 샤카리오네의 머리를 일격에 깨부수진 못했다.
하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공격은 아니었다. 샤카리오네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고통스럽게 몸을 흔들었으니까.
티샬레는 샤카리오네의 정수리에 단단히 박힌 창을 뽑고는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목덜미에 창을 꼽고 그대로 쭉 미끄러져 내려왔다.
콰드득! 단단한 비늘이 연달아 깨지면서 사방으로 빛이 반사됐다. 목덜미에서부터 허리까지 길게 이어진 상처에서 붉은 피가 확 하고 솟구쳤다.
창대를 붙잡은 채로 샤카리오네의 몸에 대롱대롱 매달린 티샬레가 마치 서커스라도 하는 것처럼 휙 하고 회전하더니 창대 위를 두 발로 밟고 섰다.
그리곤 창대 위에서 몇 번 통통 튀더니 반발력을 이용해 다시 위쪽으로 튀어 올라갔다. 그 상태에서 손목을 강하게 휘두르자 세찬 바람이 불어 샤카리오네의 몸에 박힌 창을 뽑아 위쪽으로 날려 보냈다.
티샬레는 손아귀에 착 하고 감긴 창을 빙그르르 회전시킨 후에 샤카리오네의 오른쪽 눈을 겨누었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투창하자 그건 빛살이 되어 공기를 가르고 날아갔다.
“자, 잠깐······. 이 빌어먹을 귀쟁이야, 나는······.”
샤카리오네가 뭐라고 말을 하든 티샬레는 듣지 않았다. 그녀의 단련된 근력과 마법의 힘이 합쳐진 투창은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눈까지 단련할 수는 없기에 날아온 창은 샤카리오네의 오른쪽 눈을 완전히 박살 냈다.
단순히 눈을 짓뭉갠 정도가 아니라 그 주변의 뼈까지 부러트리며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낸 일격이었다.
괴물의 커다란 비명이 바다 위에 거센 풍랑을 만들어냈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샤카리오네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두꺼운 꼬리를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그런 눈먼 공격에 티샬레가 맞을 리는 없었다.
바람의 힘을 이용해 공중에서도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티샬레는 샤카리오네의 눈을 부순 창을 회수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허리춤에서 두 자루의 단검을 꺼내 손에 쥐었을 뿐이다.
“나는 딜루키둠의 기수이자 어머니 나무의 자손인 티샬레! 감히 이 나에게 덤빈 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샤카리오네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비명만 내지르고 있었다. 티샬레는 그걸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자, 봤느냐? 내가 너희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강하다는 걸 똑똑히 봤겠지? 그러니까 이제 구박 그만하고 날 좀 잘 챙겨줘라.
티샬레는 요정 기수다운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바람의 힘을 이용해 공중에서 자세를 잡았다.
화살처럼 쏘아져 나간 그녀는 이미 너덜너덜해진 샤카리오네의 오른쪽 눈구멍 속으로 쏙 하고 들어갔다.
아까 전의 일격으로 오른쪽 눈 주변에 큰 구멍이 생기긴 했지만 저 안으로 들어간다고? 김창이 저게 웬 미친 짓이냐 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을 때, 샤카리오네의 왼쪽 눈에서 불쑥 단검이 튀어나왔다.
샤카리오네가 내지르는 비명 때문에 소리가 잘 들리진 않지만 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 것 같았다.
눈구멍을 통해 머릿속으로 들어간 티샬레가 그 안을 마구잡이로 헤집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샤카리오네라고 해도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공격에 대해선 어쩔 도리가 없을 터다.
몇 분 정도 끔찍한 비명이 이어지고 눈구멍을 통해 뭔지 모를 것들이 휙휙 내던져졌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에 갑자기 샤카리오네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딱 멈췄다.
빳빳하게 굳은 샤카리오네의 입이 들썩거리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다. 그건 분홍색 고깃덩어리를 손에 든 티샬레였다.
“후, 별거 아니군요.”
그녀가 주름진 고깃덩어리를 바다에 던져버리곤 자신도 그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샤카리오네의 몸이 기우뚱하더니 그대로 바닷속에 처박혔다.
거대한 바다 괴물은 그대로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만하면.”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갑판 위에 착지한 건 티샬레였다. 그녀는 몸에 묻은 오물을 바닷물로 씻어버리곤 젖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넘겼다.
내리쬐는 햇살과 젖은 머리카락이 부딪쳐 반짝임을 만들어냈다.
“내 가치는 충분히 증명한 것 같습니다만?”
이 요정, 왠지 거만해진 것 같다. 김창이 차갑게 쳐다보든 말든 티샬레는 혼자서 훗 하고 웃고 있었다.
“다, 당신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거는 건 마법사들이었다. 아까 선원들이 그리 애타게 찾았는데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야 나타난단 말인가?
“흠, 늦었군요. 하지만 타박하진 않겠습니다. 저만한 괴물을 상대로 겁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저런 괴물을 겁내지 않고 싸운 저는 좀 대단하지 않습니까? 칭찬해도 좋아요. 내가 허락하죠.”
얼른 칭찬해.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티샬레를 보며 마법사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주, 죽였나? 샤카리오네를 죽였다고? 정말로? 그냥 기절시키고 그런 게 아니라 아주 죽였다 이거야?”
“물론입니다. 확실하게 죽였으니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어요. 고맙다고요? 뭘요, 별거 아니었어요.”
여전히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티샬레를 향해 마법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우린 다 뒈졌다······.”
“음? 뒈진 건 우리가 아니라 샤카리오네······.”
“입 닥쳐, 이 멍청한 귀쟁이 년아!”
갑작스러운 외침에 티샬레가 눈만 끔뻑거렸다. 아니, 왜 저러지? 샤카리오네를 무찔러 줬는데 이 반응은 대체······.
“샤카리오네는 바다 괴물 같은 게 아니야! 하이나 님이 기르는 애완동물이라고! 그걸 죽이면 어쩌자는 거냐!”
“···엥?”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샤카리오네가 무차별적으로 선박을 습격하는 괴물이 아니라 하이나가 기르는 애완동물이라고?
그러면 저 멍청한 괴물 놈은 왜 하이나의 부하들이 탄 배까지 공격했단 말인가?
“하, 하지만 저 괴물이 먼저 공격을······.”
“공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샤카리오네는 우리를 공격하러 온 게 아니야! 먹을 걸 받으러 온 거지! 저 멍청한 바다뱀 새낀 우리가 주는 먹이를 자기한테 바치는 공물로 이해하고 있단 말이다! 애초에 부모한테 버려진 덜떨어진 바다뱀 새끼가 배를 공격하긴 뭘 해? 우리가 저깟 놈을 못 죽여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러면 내가 한 짓은 전부 헛짓거리였단 말인가? 어쩐지 공격도 제대로 안 하고 싸울 줄도 모르는 것 같더라니······.
티샬레의 흰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변했다.
“모두 저 귀쟁이 년을 붙잡아! 하이나 님에게 죽지 않으려면 저년이라도 데려가야 해!”
마법사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티샬레를 둘러쌌다. 그걸 보고 당황한 그녀가 고개를 돌려 김창과 한석구를 쳐다봤다.
“저, 저기··· 저 좀 도와······.”
그걸 본 마법사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뭐야, 너희도 이 귀쟁이랑 일행이냐?”
한석구가 빙긋 웃으며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설마요, 모르는 요정입니다.”
아니, 아는 요정이잖아! 티샬레가 소리쳤지만 무시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