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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78화 (7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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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지배 선언에도 마법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감히 반항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서 가만히 한석구의 눈치를 봤다.

마법사들은 원탁의 악명에 대해선 익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시 싸워서 아산트 섬의 독립성을 지킬 재간은 없으니 조용히 지배를 받아들여야 할 텐데 공연한 반항으로 원탁의 심기를 거스를 이유는 없다.

게다가 원래 전쟁에서 지면 반항적인 사람부터 목이 잘리는 법 아닌가? 원탁도 이 땅을 지배하려면 본보기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으니 누군가는 죽게 될 터다.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조아려야 한다. 괜한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다들 말이 없군? 원탁이 이 땅을 먹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야.”

한석구가 장난처럼 말했지만 마법사들은 모두 당황했다. 그들 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마법사 하나가 다급히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어찌 감히······.”

“그럴 리가 없다고? 내가 볼 땐 그럴 리가 있어 보여. 이제부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놈의 지배를 받아야 할 텐데 아무 불만이 없으면 그거야말로 개소리 아닌가?”

“···아닙니다.”

마법사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본 한석구가 하하 웃었다.

“불만 많은 거 뻔히 보이는데 자꾸 아니라고 하네. 그러면 내가 어째야 할까? 댁부터 본보기 삼아서 조져야 하나? 원래 전쟁 끝나면 점령지 기강 잡으려고 자주 그러는 법이니까.”

웃으면서 할 소리는 아니다. 늙은 마법사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손이 약간 떨렸다. 그러나 곧 주먹을 쥐고서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죽어야 한다면 늙은 사람이 죽는 게 옳다. 젊은이들이 살아남는다면 언젠가 내 복수라도 해줄지 모르는 일 아닌가······.

“원하신다면······.”

“솔직히 진짜 죽을 마음도 없으면서 괜히 희생 심리에 휩쓸려서 그런 소리 하는 거 보니까 좀 우습네. 원한다면 죽이라고? 그러면 다시 들어가요.”

“···네?”

“딱히 죽일 생각 없으니까 다시 들어가라고. 아까 내가 점령지에서 본보기가 어쩌고 이야기해서 오해한 모양인데 난 그런 짓 안 해요. 내가 중세 야만인도 아니고 그런 짓을 왜 해?”

그런 것치고 아까 했던 말은 진심 같았는데. 늙은 마법사가 고개를 조아리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한석구가 다시 말했다.

“댁들이 나한테 불만 많은 거 나도 잘 알아. 갑자기 원탁의 지배를 받으라고 하니까 뭔 개소리냐는 생각도 들겠지. 하지만 이미 우리가 섬 먹었는데 어쩔 거야? 불만 있으면 덤비라는 말은 안 할게. 괜히 시체 늘리긴 싫으니까.”

마법사들이 한석구를 쳐다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우리 이럽시다. 솔직히 원래라면 댁들 싹 다 죽이거나 아니면 쇠고랑 채워서 어디 노역이나 보냈어야 맞아. 그런데 그건 좀 너무한 일 아냐? 그러니 댁들 모두 살려줄게. 그리고 그냥 내 말만 잘 들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모두 살려주겠다는 말에 마법사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서 여자 마법사 하나가 손을 들고 말했다.

“···그 말은 저희의 모든 권리를 그대로 보장해주겠다는 뜻인가요?”

“아니.”

여자 마법사의 얼굴이 굳었다. 그러면 역시 뭔가 불이익을 주려는 건가?

“내가 아까 오면서 보니까 여기 댁들 같은 마법사 말고 일반 사람들도 사는 것 같던데 맞나?”

“맞아요.”

“그리고 댁들은 그 사람들의 고혈 빨아서 떵떵거리며 사는 것도 맞고?”

여자 마법사가 얼른 대답하지 않고 입을 우물거리자 곁에 있던 다른 마법사가 소리쳤다.

“마법사가 비마법사를 지배하는 건 정당한 권리······.”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한석구가 손짓으로 그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입에서 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아나? 그게 뭔 정당한 권리야?”

손짓만으로 사람을 날려버린 걸 본 여자 마법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혈을 빨았던 건 아니고······.”

“아니고?”

“······비마법사에 대한 차별이나 가혹한 처우가 있었던 건 인정합니다.”

“당연히 인정해야지. 내가 보니 그 사람들 완전 거지처럼 살고 있던데.”

마법사들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한석구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이제부터 마법사들이 누리던 모든 특권을 없애고 비마법사와 같은 위치까지 끌어내리려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한석구는 마법사들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보고서 말했다.

“다들 뭔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너무 걱정하진 말아요. 나는 말이야, 마법이나 이종족이 있는 세상에선 절대로 민주주의가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 손에서 얼음 날릴 수 있는 놈이 그거 못하는 놈이랑 동등한 가치일 수가 있나? 그럴 리는 없지. 난 분명히 능력의 차이가 있는데 서로 동등한 위치로 끌어내리려는 건 오히려 역차별이라고 생각해.”

민주주의가 뭔지는 몰라도 한석구가 나쁜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라는 게 느껴졌다. 마법사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능력 있는 사람이 더 많이 가지는 게 나쁜 일은 아니지. 나는 그저 마법사가 아닌 사람들도 자신이 일한 만큼 대우를 받게 해주자는 것뿐이야. 어때, 이러면 댁들한테도 그리 나쁜 이야기 같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한석구의 말은 비마법사들이 일한 만큼 제 몫을 가져갈 수 있게 해주자는 이야기였다.

물론 그러면 마법사들의 몫이 줄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능력의 차이가 있으니 대우 면에서 그들이 월등하게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몫이 약간 준다고 해도 여전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은 많았다. 애초에 그들은 한석구에게 목숨을 구걸해야 할 처지였는데 대부분의 특권을 보장해주겠다고 하니 이것보다 좋은 제안은 없었다.

마법사들은 저들끼리 수군거리더니 곧 의견을 합치했다.

“그래주신다면, 저희야 기꺼이······.”

“좋아. 그러면 원탁이 이 땅을 지배하는 것에 동의하나?”

원래 원탁은 섬의 지배에 대한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이건 어떻게 보면 아산트 섬과 원탁과의 전쟁이었고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졌으니까.

그런데도 한석구는 굳이 지배를 동의하냐고 물었다. 제 입으로 지배에 동의한다고 말하는 건 굴종이지만 마법사들은 그걸 치욕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지배를 인정합니다.”

“좋군. 그러면 이제부터 많이 바빠질 겁니다. 일단 비마법사들에 대한 처우 개선부터 들어가야 할 텐데, 혹시 불만 있나?”

“없습니다.”

“그러면 난 일단 비마법사들이 거주 구역부터 새로 조성할 생각인데, 그건 아주 대규모 공사가 될 것 같거든? 혹시 공사에 자원하실 분? 물론 대우는 섭섭지 않게 해드릴 테고.”

마법사가 있으면 공사 진행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 그들은 사람이 들기 힘든 무거운 물건도 마법으로 휙휙 나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산트 섬의 마법사는 공사 감독으로 일한 적은 있어도 현장에서 직접 일한 적은 없었다.

그런 일은 비마법사 같은 천한 자들이나 하는 일이었으니까.

“제가 하지요.”

“저도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지원자는 많았다. 그건 새로운 지배자인 원탁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몸부림이기도 했고 이제 확연히 바뀌어버릴 섬의 상황에 대한 적응을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한석구는 마음에 들었다.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공사 이야기나 차후의 이야기에 대해 말씀 좀 나눌 사람이 필요한데, 여기 중에서 누가 대표할래요?”

이건 만장일치로 처음의 그 늙은 마법사가 뽑혔다. 한석구가 그와 웃으며 악수를 나눴다.

“일단 일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나도 원탁에 돌아가서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있으니까. 아, 그리고 나중에 원탁에서 영주 한 명 뽑아서 보낼 건데 그때 안내도 좀 잘 해주시고요.”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자 한서구가 그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하대하는 모습이 제법 능숙하다.

저런 것도 원탁 수장 노릇하면서 몸에 벤 버릇인가? 김창이 혼자 흠 소리를 냈다.

“우린 돌아갈 테니까 얌전히 잘 있어요. 나 없는 사이에 뒤통수라도 칠 준비하려면 하시고. 근데 나 같으면 안 그러겠네.”

마법사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한석구는 그들을 바라보더니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마력이 뭉쳐 차원문의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섬 안에서 차원문을 열 수 없지만 하이나가 죽은 탓에 그 제약이 사라졌다.

마법사들은 한석구가 너무나도 쉽게 차원문을 여는 걸 보고서 감탄했다. 원탁의 이방인은 모두 괴물이라더니······.

“심민우가 차원문 여는 거 보면 아주 기절하겠네.”

“걘 진짜 밥 먹고 그것만 연습했나 봐. 나도 걔 속도나 안정성은 못 따라가겠던데.”

“돌아갈 땐 차원문이군요? 덕분에 편히 가겠네요.”

김창 일행은 저들끼리 떠들면서 차원문을 통과했다. 수십 명의 마법사는 고개를 숙여 그들을 배웅했다.

그 모습이 마치 깡패 두목을 보내는 조직원들 같아서 김창은 슬며시 웃음이 났다. 슬며시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차원문이 닫힐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갔다 오는 데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 영 몸이 뻐근하네. 하기야 싸움이 격렬했으니 그럴 만도 한가? 사제한테 치유라도 좀 받아볼까······.”

원탁에 돌아온 김창이 그리 말하면서 슬쩍 한석구를 쳐다봤다. 새롭게 땅도 하나 먹었겠다, 의기양양하게 설쳐대리라 생각했던 그가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쟤가 또 왜 저러나? 김창이 슬쩍 말을 걸었다.

“너 뭔 일 있냐? 왜 그리 조용해?”

“뭔 일이라면 있지······. 그냥 기분이 좀 그러네.”

“갑자기 왜?”

한석구가 슬쩍 티샬레의 눈치를 봤다.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둘이서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자리 좀 비켜줄래?”

“네, 그러죠. 그러면 저는 정원으로 돌아가 볼게요.”

티샬레가 바로 자리를 비켜줬다. 이제 복도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할 말 있으면 해라. 왜 그러는데?”

“하이나 말이야.”

걔가 또 왜? 설마 반했나? 요정 얼굴 보고도 안 반하던 놈이니 그건 아닐 텐데······.

“강하더라고. 난 말이야,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세다고 생각은 안 했어도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은 했거든? 솔직히 날 이길 수 있는 놈은 같은 원탁 출신뿐이라고 생각했는데······.”

김창이 아하 하고 소리를 냈다. 이 자식이 왜 이러나 이제야 알 것 같다.

자기 나름대로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그랬을 텐데 하이나한테 밀렸던 게 자존심 상한 모양이지?

게다가 이 세상에 플레이어 말고도 강한 놈이 있다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을 테고.

“난 원탁을 위협할 만한 적 같은 건 이 세상에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야. 언젠가 원탁도 더 강한 적한테 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울적하네. 나도 이제부터 마법 수련이라도 해야 하나? 갑자기 그런 걸 한다고 확 강해질 것 같진 않지만······.”

김창은 이제 더 강해지려면 신성을 얻어서 승천할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새롭게 강력한 경쟁자가 생길까 봐 그런 게 아니라 한석구가 승천할 자가 되면 그를 죽여야 하니까 그랬다.

아무리 그래도 알던 사람을 죽일 수는 없지 않나?

“너무 우울해하진 마라. 하이나 같은 놈이 흔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겠지? 그리고 내가 못 이겨도 너라면 이길 수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나.”

그렇게 말하는 한석구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우울한 모습은 영 어울리지 않는데 저 상태가 한 며칠은 갈 것 같다.

이걸 어째야 하나, 정복자한테 말해서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하라고 해야 하나. 김창이 고민하고 있을 때, 복도 저 끝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저렇게 복도에서 뛰어다니나? 가만히 쳐다보니 웬 남자였다. 한석구가 그를 얼른 알아보고 외쳤다.

“하오성? 너 이 새끼, 그동안 출근도 안 하다가 오늘은 또 뭔 바람이 불어서 이러고 있냐?”

하오성이라는 이름을 듣자 김창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그는 원탁의 랭커 중 하나이자 지하 감옥의 간수장이었다. 물론 다른 랭커들이 으레 그러하듯 제대로 출근도 안 하고 놀기 바쁜 한량이다.

직업은 아마 도적이었나? 도둑놈이 어디서 뭘 훔치다가 들킨 것도 아니고 왜 저렇게 다급히 달리고 있을까?

다급히 달리던 하오성이 한석구를 발견하고 외쳤다.

“석구야, 우리 좆됐어! 감옥에서 그 새끼 도망쳤어!”

한석구도 바로 대답했다.

“미친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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