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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77화 (7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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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애라면 칼에 대한 로망이 있는 법이다. 그 왜 어릴 적에 놀이터에 가서 기다란 막대기 하나 주워서 칼싸움을 벌이고 놀던 적이 자주 있지 않나.

그땐 막대기를 칼이랍시고 휘두르며 자신이 용사가 된 것 같은 망상을 자주 하곤 했다. 김창에게도 당연히 어린 시절이란 게 있었으므로 그런 놀이를 몇 번 했었다.

그때야 설마 새벽에 게임 하다가 이상한 곳으로 끌려와서 사람이나 죽이고 다닐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릴 적에 검도 학원이라도 다녔어야 했나?

하지만 거기서도 사람 죽이는 건 가르쳐주지 않았을 테니 별 소용은 없었을 터다.

어쨌건 그런 놀이를 하는 건 초등학생 때까지였다. 그 뒤로는 그러고 놀 만한 시간이 없기도 했거니와 그런 짓을 하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턴 소설이나 만화를 읽으면서 머릿속으로만 망상했다. 성인이 돼서는 게임을즐겼다.

누구는 망겜이라고 했지만 별 상관은 없었다. 누가 뭐라든 나만 즐거우면 된 것 아닌가?

본래 어떤 게임이든 너무 오래 하면 지루해지는 법이지만 김창은 아니었다. 그는 몇 년 동안 같은 게임만 했고 한 캐릭터만 키웠다.

그러한 집착 아닌 집착에 신이 감동이라도 한 모양이다. 새벽에 게임 하고 있던 놈을 이딴 세상으로 날려 보낸 걸 보면.

김창은 자신과 함께 이곳에 끌려 온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를 보고 게임 하던 버릇 못 버린 정신병자들이라고 욕했지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새삼 다를 게 없는 일이었다.

오늘 내가 한 일을 봐라.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결국 게임 캐릭터가 쓰는 스킬 흉내나 내고 있질 않나?

이거야말로 게임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해 뉴스에 나온 놈이랑 다를 게 뭔가.

조금 있으면 아주 기술명도 외치면서 염병하고 있겠네······. 참 부끄러운 짓거리지만 왠지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김창은 자신이 한 일을 보고서 슬며시 웃음을 지었다. 온통 검정으로 물들어 있어 위와 아래의 구분이 모호했던 별 위로 기다란 선이 그어졌다.

비스듬히 잘린 공간은 천천히 아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이게 대체······.”

하이나의 목소리에서 떨림이 묻어났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을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난 궁수라도 태양을 쏴서 떨어트릴 수 없는 것처럼 일개 인간이 별을 무너트릴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김창은 해냈다. 비록 그가 승천할 자라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이나의 별은 다른 승천할 자와 싸울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공간이기에 절대 부서질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 칼잡이는 대체?

“···뭘 한 것이냐? 방금 그 일격은 대체 무엇이냐?”

김창은 간단히 대답했다.

“발도.”

“···발도? 그 왜 별 실전성도 없으면서 겉멋만 든 놈들이 하던 그거?”

새끼, 말 참 신랄하게 하네. 말투가 어쨌건 맞는 말이긴 해서 김창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

“어째서 그딴 기술을? 네가 가진 신성이라면 그것보다 더 대단한 것도 할 수 있을 텐데······.”

게임 속 칼잡이는 이것 말고 다양한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굳이 이걸 재현했느냐?

김창은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바로 대답했다.

“왜긴, 멋있으니까.”

“···멋있어서? 단지 그것뿐이라고?”

김창이 가만히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좆나 멋있으니까.”

하이나가 슬쩍 보니 농담을 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 진지하게 멋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기술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고작 그런 이유로 만들어진 기술에 당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구나. 별은 무적이야 했을 텐데······.”

공간이 무너지고 있었다. 하이나는 별 그 자체고, 별이 반으로 갈라진 순간부터 그녀의 싸움은 끝난 것이었다.

하이나의 마력과 신성이 흩어지며 별은 더는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별은 저 위에서부터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부실하게 지은 건물이 무너지는 것처럼 검은색 조각들이 쿵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김창은 가만히 서서 별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용한 죽음이었다. 인터넷에서 봤던 과학 다큐멘터리 영상이 무색할 정도로.

물론 하이나의 별은 이름이 별일 뿐 밤하늘의 별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별의 죽음이 아니라 승천할 자가 꿈꿨던 심상의 붕괴였다.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김창도 이번에 처음 경험해보는 종류의 죽음이었다. 그는 이 광경을 오랫동안 눈에 담았다.

세상에 몇 없는 승천할 자로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신이 되지 못한 자의 말로는 그 역시 알아야 할 일일 테니까.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붕괴는 멈췄다.

별이 죽었다.

“김창!”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한석구와 티샬레였다. 두 사람 다 아주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무사히 돌아온 김창을 보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씨발, 대체 뭐야? 하이나를 죽였다고 생각했더니 갑자기 너희 둘이 없어져 버리고······.”

김창은 간단히 대답했다.

“별이었어.”

“뭐?”

“별이었다고.”

“밤하늘의 그거? 반짝반짝 작은 별 할 때 그 별? 아니, 그러면 너희 둘이서 갑자기 우주 여행이라도 하고 왔다는 거냐?”

김창이 작게 웃었다.

“너는 말해도 몰라.”

“아니, 뭔······.”

한석구가 투덜거리는 가운데 티샬레가 말했다.

“저기 하이나가 있군요······.”

별이 붕괴하면서 그 육신조차 사라졌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김창이 고개를 돌리니 거기엔 과연 하이나가 있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모습이었다. 손발이 잘렸고 허리가 끊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면 확실히 멀쩡하다.

김창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하이나를 향해 다가갔다. 곧 죽을 테지만 그래도 말 몇 마디 정도는 나눌 수 있을 터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나?”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군.”

“네가 자랑하는 그 별이 무너진 게?”

“아니, 내가 죽는다는 이 상황 자체가.”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김창 역시 언젠가 찾아올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자신만은 절대 죽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건 지독한 오만이다.

그러나 승천할 자라면 그 정도 오만은 가지고 있어도 된다.

“나는 긴 세월을 살았다. 철없던 소녀는 자신이 마법사가 될 줄 몰랐고 언젠가 승천할 자가 되리란 것도 몰랐다. 그리고······ 내 죽음조차 몰랐지.”

하이나가 마른 입술을 억지로 움직였다.

“칼잡이야, 내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 하지.”

“하지 마라.”

“승천할 자들이 움직일 것이다. 네 목숨을 노리고서.”

하지 말라는 데 왜 굳이 충고를 하나? 김창이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왜? 네 복수라도 하려고? 생각보다 너희들끼리 친분이 두터운 모양이군.”

“그럴 리가. 우리는 모두 서로를 극히 싫어한다. 복수라고? 내가 죽은 걸 알면 오히려 춤이라도 추고 있을 거다.”

“그런데 왜 나를 노리나.”

“네가 오랜 규율을 깼으니까. 승천자의 규율, 한 시대에 신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한 명뿐이라는 규율······.”

김창은 그게 뭐냐고 묻지 않았다. 하이나가 알아서 술술 불었기 때문이다.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승천할 자라고 해서 모두가 신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벌써 나는 신이 되고도 남았겠지. 그런데 그러지 않은 것은 승천자의 규율 때문이다.”

“한 시대에 신이 될 수 있는 건 한 명뿐이라는 그거?”

“그래, 그 규율. 이 시대에는 너와 나처럼 여러 명의 승천할 자가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승천자의 규율에 따라 신이 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지. 그러면 내가 신이 되기 위해선 다른 누군가가 승천의 자격을 버려야 한다는 소리다. 그런데 누가 멍청하게 승천의 자격을 버리겠느냐?”

“그러면 억지로 버리게 해야겠군. 신이 되기 위해서.”

“그래. 신이 되기 위해선 다른 승천할 자를 죽이고 그 신성을 흡수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껏 싸우지 않았지. 그건 암묵적인 합의였다. 한 명만이 신이 될 수 있다면 누구도 신이 되지 말자고.”

아무리 신이 되는 게 중요해도 죽으면 결국 끝이다. 하지만 싸우지 않으면 지상에서 신과 같은 권력을 누릴 수 있는데 그런 도박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다.

그러니 승천할 자들은 싸우지 않는다.

그건 꼭 원탁에서 플레이어들끼리 싸우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플레이어고 승천할 자고, 둘 다 잃을 게 많으니까······.

“그런데 너는 나와 싸웠다. 곧 다른 승천할 자들이 내 죽음을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내 신성을 갈취한 것도 알게 될 것이고. 합의는 깨졌다. 이제 승천을 위한 싸움은 피할 수 없어······.”

김창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내면의 신성이 훨씬 더 커진 걸 느꼈다. 승천할 자들을 다 죽이면 진짜 신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참 기쁜 소리군.”

“···뭐?”

“걔네가 나 죽이러 온다며? 알아서 신성 바치러 오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칼잡이야. 네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다. 날 죽일 정도니까. 하지만 너무 자만하진 말아라. 나 역시 내가 죽을지 몰랐지만 결국 죽지 않았느냐?”

“죽으면 죽는 거지 뭘. 죽는 게 무섭다고 안 싸우나? 그런 놈이라면 애초에 신 될 자격도 없어.”

김창의 말에 하이나가 눈을 끔뻑였다.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신이 되려면 그 정도는······.”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하이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의 승천할 자가 죽고 다른 하나의 승천할 자가 신에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다른 승천할 자 역시 신이 되기 위한 싸움을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뭔가를 죽이는 건 그가 제일 잘하는 일이기에.

“···이걸로 다 끝난 걸까요?”

티샬레가 김창의 눈치를 봤다. 이 칼잡이가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결국 혼자서 승천할 자를 끝장낼 줄이야······.

이 정도면 딜루키둠 가문에서 그를 제어할 수 있는 수준은 확실히 넘어섰다. 하여튼 아라비타스 그 머리 굳은 노인네, 뱉는다고 다 말인 줄 아나.

“끝난 것 같은데. 아니면 바깥에서 여기 눈치만 보고 있는 마법사들까지 싸그리 다 죽일까.”

티샬레가 슬쩍 뒤를 돌아보니 반쯤 부서진 문 사이로 마법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이 섬의 주인이 죽었다는 사실에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은 마법사고 제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을 테니까.

승천할 자를 죽인 존재를 자기들이 대체 뭔 수로 상대하나? 마법사들은 지금 어떤 식으로 목숨을 구걸해야 할지 열심히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요, 그럴 것까지야. 하이나도 죽었으니 저들도 함부로 움직이진 않겠죠.”

“그래, 내 생각도 그래. 쟤네도 살려두면 다 쓸모가 있는데 싹 다 죽일 수는 없지.”

한석구의 말에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뒤처리는 네가 알아서 해라.”

“그래도 되나? 나도 열심히 싸우긴 했지만 결국 마무리한 건 넌데 내 맘대로 처리할 수는······.”

“그래도 되니까 알아서 하라고. 내가 언제 그런 거 탐내는 거 봤나?”

하기야 김창은 이상할 정도로 권력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것치고 돈은 열심히 모으던데, 어쨌든 한석구로선 감사한 말이었다.

“그러면 내 마음대로 처리하지. 일단 저 친구들한테 뭔 상황인지 좀 알려줄까?”

한석구가 씩 웃으며 성큼성큼 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가 쾅 소리가 나게 문을 열자 이미 너덜거리던 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복도를 꽉 채우고 있던 마법사들의 시선이 불안했다. 그들은 이 위험해 보이는 마법사가 얼마나 강한지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석구가 고개를 돌려 사람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너희 주인은 뒈졌다. 여긴 이제부터 원탁이 지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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