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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개······.”
한석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꾹 눌러 참았다. 지금 여기선 정복자의 취임식이 진행 중이었고 무르익은 분위기를 망칠 수는 없었다.
누가 원탁을 건드릴 때마다 그가 보여줬던 일들을 생각하면 이건 초인적인 인내심에 가까웠다. 한석구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나 찾으면 급한 볼일 있어서 먼저 자리 떴다고 해. 괜한 이야기는 하지 말고.”
서수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한석구가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본 김창도 얼른 그 뒤를 따랐다.
서수민이 어디 가냐고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차원문 근처에서 한석구를 붙잡으며 말했다.
“어디 가냐.”
“···급한 일이 있어서 가는데 왜?”
“정복자의 취임식보다 더 급한 일인가 보지?”
한석구가 입을 우물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한테는 사실대로 말해도 될 것 같은데. 내가 어디 가서 비밀 떠벌리고 다닐 만한 입 싼 놈처럼 보였다면 좀 서운할 것 같군.”
한석구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한숨을 내뱉었다.
“···들었냐?”
“훔쳐 들으려고 한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근데 굳이 나 붙잡고 물어보는 걸 보니 전부 들은 건 아니군?”
“그래. 그냥 누가 죽었다는 것만 들었어.”
한석구가 주변을 확인하더니 차원문 안쪽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쪽 가서 이야기하자. 여긴 듣는 귀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김대걸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공식적으로 알리지 않았다. 한석구가 김대걸에게 가진 감정이 어쨌든 간에 원탁의 사람이 누군가한테 죽었다는 건 남한테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니까.
그런 상황에서 또 다른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그건 곧 원탁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한석구로서는 그 상황만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내 집무실로 가자.”
차원문을 통과해 원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혹시나 누가 볼세라 얼른 집무실로 이동했다.
한석구는 문을 잠근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침묵 마법까지 걸고서 입을 열었다.
“내 잘못이야······.”
뜬금없이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알 만했다. 지난번에 김대걸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지 않은 탓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이번 사건의 범인이 김대걸을 죽인 놈과 동일인인 거냐?”
김창이 묻자 한석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모르지···.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아니, 분명 같은 사람일 거야······.”
한석구의 목소리에서 괴로움이 느껴졌다. 그는 대전이 이후로 원탁을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누군가가 죽었으니 지금 그가 느끼는 괴로움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할 것이다.
“누가 범인인지는 조사를 해봐야 아는 거 아니냐. 전혀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잖아.”
“내가 볼 땐 아니야. 이번 사건이 몇 달 정도 기간을 두고 벌어진 거면 몰라도 며칠 사이에 연달아 벌어진 일이잖아. 누군가 원탁에 대한 악의를 가지고 이번 일을 벌인 게 분명해. 그러니까 이대로 두면 또 누군가 죽을지도······.”
한석구의 억눌림 목소리를 들으며 김창이 흠 소리를 냈다.
“연쇄 살인이든 아니든 결국 범인을 찾긴 해야겠군. 이번에 죽은 게 누구냐?”
“허석······.”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지난번에 그롬 성 영주 허스칼을 등쳐먹고 있던 용병 놈 아니던가?
얼굴 본 적 없는 사람이면 몰라도 그래도 몇 번 말 나눠본 적 있는 사람이 죽었다니 김창의 입맛도 썼다.
“어디서 죽었대?”
“에일런, 거기서 목 잘려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데.”
“거긴 왜 갔지? 용병 일 때문에?”
“그래.”
“설마 싸우다가 죽은 건 아닐 테고.”
“그건 아니야. 원래 일 받을 때 원탁 통해서 받아야 하는 거 알지? 그거 괜히 위험한 일 받았다가 죽는 거 막기 위해서 그러는 건데, 허석이 받아 간 일도 그다지 위험한 일은 아니었어. 그리고 설령 걔가 전쟁에서 졌다고 해도 원탁 소속인 거 뻔히 아는데 누가 목을 치겠어? 일단 잡아두고 몸값 요구하는 거면 몰라도.”
“그러면 누군가 일부러 허석을 노리고 죽였다는 거군. 걔 그래도 제법 잘 싸우지 않나?”
“너보다는 아니어도 그 정도만 해도 어디 가서 영웅 소리 들을 실력이긴 하지. 그러니까 더 환장하겠다는 거야. 원탁에는 허석보다 약한 애들도 많아. 만약 범인이 걔네 노리고 사람 죽이기 시작하면? 생각만으로 끔찍하네······.”
이번 사건의 범인이 김대걸을 죽인 놈과 동일인이라면 원탁에 대한 위협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은 사망자가 나오기 전에 반드시 범인을 잡아야 했다. 그리고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했다.
“범인 잡을 거라면 내가 좀 도와주지. 수사 같은 건 못 해도 걔 썰어주는 건 할 수 있어.”
김창의 말에 한석구가 반색했다.
“정말? 도와주면 너무 고맙지.”
“일단은 김대걸 시체부터 찾아보자. 두 시체를 찾아서 비교하면 범인이 동일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아, 그러면 일단 탑으로 가는 차원문부터 열게.”
한석구는 지난번에 탑을 방문한 덕분에 심민우 없이도 차원문을 열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차원문을 통과해서 탑으로 향하자 마법사가 반갑게 인사했다.
“며칠 전에 보고 또 보네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저번에 김대걸 시체 찾은 적 있지? 걔 지금 어디 있어?”
다짜고짜 묻는 한석구의 얼굴을 보고서 마법사는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저 간단히 대답했을 뿐이다.
“제가 차원문을 열어드리지요. 가실까요?”
그들이 차원문을 통해 도착한 곳은 칼론이라는 도시였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보통의 도시일 뿐이었는데 특이한 점은 옛날에 김대걸이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전시하다가 한석구와 정복자에게 붙잡혔다는 것이다.
김대걸 역시 마법사이니 차원문을 열고 이쪽으로 도망쳤으리라. 다른 도시도 아니고 굳이 이곳으로 온 건 옛날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이쪽입니다.”
마법사가 김창과 한석구를 데리고 간 곳은 신원 미상의 시체를 보관하는 안치소였다. 이곳의 직원의 말로는 대개 며칠 정도 보관했다가 찾아가는 사람이 없으면 그대로 화장한다고 했다.
다행히도 김대걸의 시체는 아직 남아 있었다. 다급히 그 시체를 확인하니 허석과 마찬가지로 목이 잘려 죽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머리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어쩌면 범인이 가져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절단면이 깔끔하군. 제법 실력 있는 놈이 한 것 같은데.”
김창은 칼잡이로서 사람의 머리를 일격에 날려버리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근육은 생각보다 질기며 뼈는 아주 단단하니까. 머리를 단칼에 날려버리려면 힘과 실력, 두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어야만 한다.
시체의 상태를 보면 단 일격에 김대걸을 죽인 것 같은데 그건 범인이 생각 이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했다.
일반인이 상대면 몰라도 플레이어를 상대로 그러긴 쉽지 않은 일일 테니까.
“머리는 왜 없지? 잃어버린 건가?”
“직원 말로는 처음부터 없었대. 범인이 가져갔나 봐.”
“그걸 왜 가져가? 사슴 사냥해서 그 머리 박제해두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사슴 머리 장식해두는 것처럼 사람 머리도 그러나 보지.”
한석구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안치소 직원에게 말했다.
“이거 우리가 아는 사람인데 시체 가져가도 되나?”
“보관 비용 지불하면요.”
한석구가 신경질적으로 주머니에서 은화 몇 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김창이 김대걸을 시체 가방에 담아서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면 다시 탑으로 돌아가시렵니까? 아니면 다른 갈 데 있으신가요?”
마법사가 묻자 한석구가 대답했다.
“혹시 에일런까지 차원문 열 수 있나?”
“물론이죠.”
이 마법사 생각보다 유능하다. 사람도 잘 찾고 차원문 마법도 잘 쓴다. 이 정도면 마누라를 못 찾는 게 아니라 안 찾는 게 아닐까?
그 왜 시험에서 빵점을 맞으려면 답을 몰라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답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던가.
어쩌면 이 마법사도 아내가 어디 있는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거기만 안 찾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다 됐습니다. 그럼 가시죠.”
마법사가 에일런으로 향하는 차원문을 열자 세 사람은 바로 움직였다.
이번에 그들이 향한 곳은 시체 안치소가 아니라 영주궁이었다. 허석의 시체를 보관하고 있는 게 에일런의 영주였기 때문이다.
“아, 아니, 어찌 이리 갑자기······. 오신다고 미리 말씀이라도 해주셨으면······.”
에일런의 영주는 중년의 남성이었는데 다짜고짜 영주궁으로 쳐들어온 한석구를 보고서 몹시 당황한 눈치였다.
허석이 죽었으니 그 분노가 자신에게 향하리라 생각한 모양일까? 하기야 에일런 영주는 원탁에게 허석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빌렸는데 그걸 망가트린 셈이니 지레 겁을 먹을 만도 했다.
한석구는 벌컥 화를 내는 대신에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석의 시체는 어디 있지?”
“아,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곧 대령하겠습니다!”
영주가 얼른 하인을 시켜 허석의 시체를 가져오게 했다. 시체 안치소에 대충 던져져 있던 김대걸의 시체와 달리 허석의 것은 값비싼 천으로 싸여 있었다.
영주는 혹여나 한석구의 심기를 거스를까 전전긍긍하며 눈치를 봤다. 한석구는 영주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고서 허석의 시체를 쳐다봤다.
“역시 이것도 머리는 없군. 이걸 보면 범인은 동일인이라는 게 분명해.”
김창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런 것 같네. 그런데 이상하군. 김대걸이 죽은 곳에서 여기까진 걸어서 몇 주는 걸릴 만한 거리야. 하지만 범인은 김대걸을 죽이고 겨우 며칠 만에 또 허석을 죽였지. 범인은 아마 날붙이를 무기로 쓰는 놈일 텐데 이건 차원문 마법을 쓸 수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야.”
“혹시 직업이 마검사인가?”
“마검사 스킬에는 차원문 마법이 없어. 아마 마법사 조력자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범인이 한 명인 줄 알았는데 두 명이라는 소리다. 실질적으로 범행을 주도한 건 한 명이라고 해도 둘 다 잡아야 한다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한석구가 부득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것만으로는 범인을 찾기 어려울 것 같은데. 뭔가 흔적 같은 게 있지 않는 이상······.”
김창은 입을 다물고서 허석의 시체를 쳐다봤다. 그가 뭔가 골똘히 생각했다.
“뭐 발견한 거 있어?”
한석구의 물음에 김창이 입을 열었다.
“허석의 시체를 보면 상처가 상당히 많군. 가만뒀어도 죽었을 텐데 범인은 굳이 목을 잘라서 죽였어.”
“그런데?”
“목을 자르지 않아도 죽일 수 있었는데 굳이 그런 식으로 죽였다는 건 범인이 그런 살해 방식을 선호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허석의 상처를 보면 범인은 상당히 강한 놈이라는 걸 알 수 있고.”
한석구가 뭔가 생각하는 듯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동안 김창의 말이 이어졌다.
“허석을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하고, 목 잘라 죽이는데 집착하는 놈은 별로 없지. 내 생각이 맞다면 범인은 걔야.”
“···그게 누군데?”
“개눈깔.”
한석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개눈깔? 그 왜 옛날에 너한테 깝치다가 한쪽 눈 애꾸 된 걔? 내 알기로 랭킹 3위였던가 그랬던······.”
김창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걘 이제 나한테 밀려서 4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