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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 속 칼잡이-86화 (8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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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움에는 감사하도록 하지. 혹시 괜찮다면 어디의 누구인지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미친놈을 상대할 땐 상대를 자극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 테네벨레의 기수로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에리엇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 칼잡이의 눈을 봐라. 저건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썰어 온 백정의 눈이다. 지금도 다짜고짜 나타나서 사르칸의 목을 자르지 않았나?

저런 놈을 함부로 자극했다가는 눈이 돌아가서 이쪽을 향해 칼을 휘두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김창, 그냥 칼잡이.”

참으로 간략한 자기소개였다. 에리엇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내 소개는 아까 들었는지 모르겠군. 나는 테네벨레의 기수이자······.”

“그래, 어쩌고저쩌고 에리엇. 자기소개는 됐으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고.”

에리엇은 김창의 무심한 목소리에 잠깐 말문이 막혔다. 세간에 악명이 자자한 외눈의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왔으면서 저 긴장감 없는 태도는 뭔가?

물론 자신 역시 테네벨레의 기수로서 적이 두렵다거나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저런 태도는······.

에리엇은 김창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름을 듣자 하니 이방인인 것 같은데, 여긴 어쩐 일로 왔나?”

“개눈깔이 우리 애들 괴롭혀서 손 좀 봐주려고.”

성의 없는 설명이었지만 에리엇은 대충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외눈의 마왕이 원탁을 건드렸다는 소리일 테지.

“혹시 혼자 왔나? 원탁의 이방인들이 일당백의 실력을 가졌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혼자서 외눈의 마왕을 상대하긴 어려울 텐데······.”

“방금 마법사 목 자르는 걸 보고도 느낀 게 없나?”

“···뭐?”

김창이 무너진 길 위를 걸으며 말했다.

“그만한 실력의 마법사를 내가 단칼에 죽였는데 그거 보고 느낀 게 없냐고. 내가 이 정도로 센데, 겨우 개눈깔 잡으려고 밑에 애들 주렁주렁 달고 다녀야 하나?”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에리엇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건 허세 따위가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으니까.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따라 와. 빨리 개눈깔 잡고 다들 집에 가서 쉬어야 할 거 아니야.”

김창이 얼른 따라오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단명종 따위가 감히 요정에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건방진 짓거리였지만 에리엇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저 칼잡이에게 감히 요정의 자존심 따위를 들이밀어선 안 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기수님, 저 건방진 단명종 놈을 그냥 두실 겁니까?”

흑요정 전사 하나가 에리엇에게 속삭이자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외눈의 마왕은 강력한 적이다. 저만한 실력을 가진 칼잡이가 우리와 함께 싸워주겠다는데 그 도움을 내쳐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자존심이 대의보다 중요한가? 그깟 자존심이 우리의 의무보다 중요하냔 말이다.”

에리엇이 엄한 목소리로 말하자 흑요정 전사가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출발한다. 다들 혹시 모를 습격에 조심하며 따라오도록.”

에리엇의 흑요정 부대는 김창의 뒤를 따라 이동했다. 무너진 옛 성터 안에는 괴물들이 숨어 있을 만한 공간이 많았는데 그들이 전진할 때마다 여러 번의 습격이 발생했다.

혹독한 훈련으로 단련된 흑요정 부대는 당황하지 않고 적의 습격을 훌륭하게 막아냈다. 김창도 그들의 싸움에 한 손 보탰다.

괜히 누가 다치기라도 하면 자기 대신 똘마니들과 싸워줄 놈이 줄어들 테니까.

몇 번의 전투를 끝낸 후에 그들은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오랫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옛 성답게 안쪽에선 퀴퀴한 냄새가 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천장을 빤히 보던 김창이 말했다.

“저 위에 개눈깔이 있나?”

“···아까부터 개눈깔이 어쩌고 하던데, 그건 외눈의 마왕을 말하는 게 맞겠지?”

에리엇의 물음에 김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개눈깔이라는 게 별명 같은 건가?”

“내가 걔 눈 하나 애꾸로 만들어서 개눈깔이라고 부르는 건데 뭐 불만 있나?”

“그쪽이 외눈의 마왕의 한쪽 눈을 멀게 했다고? 잠깐, 그러면 전에 한 번 붙어본 적 있다는 소리인가?”

에리엇이 당황하며 묻자 김창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나 혼자면 충분하다고 했잖아. 전에 한 번 이긴 놈을 이번에는 못 이길까.”

“조금 당황스러운데···. 나는 외눈의 마왕이 타락할 때 눈 하나를 대가로 바치고 사악한 힘을 얻을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그냥 댁한테 당한 거라고?”

김창이 픽 웃었다. 외눈의 마왕이라고 하니까 뭐 좀 대단한 사연이라도 있는 줄 알았나 보지.

그런데 실상은 그냥 웬 칼잡이한테 칼 맞아서 애꾸눈이 된 거니 당황스러울 만도 하겠다.

김창이 여전히 웃는 얼굴 그대로 말했다.

“개눈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그러면 걔가 원래 원탁 출신인 것도 몰랐겠어.”

“외눈의 마왕이 원탁 출신······? 그러면 그녀도 이방인이라는 말인가?”

“맞아.”

에리엇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가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이거 안 좋은데······.”

“안 좋을 게 뭐 있나. 그냥 가서 걔 죽이면 다 끝날 일인데.”

“아니, 이건 안 좋은 일인 게 맞아. 외눈의 마왕이 어째서 눈을 잃었는지는 차치하고서, 어쨌든 그녀가 사악한 힘을 받아들여 타락한 건 사실인데 실은 이방인 출신이었다는 건 큰 문제가 되지.”

그게 왜 문제가 되나? 플레이어가 마왕이 되면 그걸 빌미로 대륙 전역에서 플레이어 대한 탄압이 시작될 거라서?

원탁의 수호자인 한석구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진 않은데.

김창이 에리엇을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말했다.

“약자가 강자를 타락시킬 수는 없지. 언제나 강자만이 약자를 타락시킬 뿐이야. 그런데 이 세상의 주민보다 훨씬 강한 이방인이 누군가에 의해 타락했다면 그 뒤에는 대체 누가 있겠나? 대악마?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한 존재가 있을지도 모르지······.”

가만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개눈깔에게 힘을 나눠주고 타락시킬 만한 존재라면 분명 그녀보다 훨씬 더 강할 게 분명했다.

만약 개눈깔이 그저 그런 플레이어였다면 큰 문제가 안 됐을 테지만 그녀는 원탁에서 상위권에 드는 강자였다.

에리엇의 말대로 그런 존재라면 어쩌면 대악마보다 더 강할지도 모른다.

김창은 침묵했다. 에리엇은 그가 긴장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대악마나 승천할 자 말고도 죽일 만한 적이 또 있다고······.’

게임으로 치자면 컨텐츠가 너무 많아서 행복한 비명을 질러야 할 판이다. 김창이 혼자서 흐뭇하게 웃고 있을 때, 에리엇이 말했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단명종을 지키는 게 우리 일곱 요정 대가문의 의무니까. 어떤 강대한 적이 나오더라도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면 무찌를 수 있을 거야.”

뭔 헛소리야. 나 혼자 죽여야 하는데 뭘 다 같이 우르르 몰려가서 싸우나? 김창은 사냥터 통제라도 한 번 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고. 일단 개눈깔부터 처리하지.”

“그래, 일단 당장 직면한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법이니까.”

김창은 에리엇이 이끄는 흑요정 부대와 함께 위쪽으로 올라갔다. 원래라면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야 할 복도는 스산하기만 했다.

길고 긴 복도를 따라서 걸으니 저 끝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났다. 아마 괴물들이 있는 듯했다.

듣기에 소름 끼치는 울음이었지만 아무도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흑요정 부대가 결연한 얼굴로 전진했다.

그들은 몇 분 정도 걸어서 복도의 끝에 도달했다. 그리고 거대한 문을 발견했다.

원래 게임에선 이 문을 열면 그대로 보스룸이 나오는 법이다. 이번에도 그럴까? 김창이 혼자 웃으며 문을 좌우로 열었다.

끼이익 소리가 나더니 문 경첩이 그대로 툭 떨어졌다.

“겁도 없이 내 거처에 들어오는 자가 누구냐.”

목소리는 익히 들어본 것이었다. 김창이 거만한 자세로 선 개눈깔을 쳐다보며 말했다.

“나다, 씹새야.”

“······이 지긋지긋한 놈. 기어코 날 쫓아온 거냐?”

“넌 원탁에 있던 놈이 한석구 성격도 모르냐? 그 지랄을 해놨는데 걔가 널 그냥 둘 것 같았어?”

개눈깔이 하나 남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하기야 안 그러겠지. 그래서 날 죽이러 왔나?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옛날과는 다르다.”

“미안한데, 그건 나도 그래. 그럼 한 번 붙어볼까?”

“흥, 자신만만하군.”

개눈깔이 칼을 뽑고는 휙 하고 허공을 갈랐다. 처음에는 뭐 하는 짓인가 했더니 칼날이 지난 곳이 갈라져 틈 같은 게 생겼다.

그리고 그 안에서 끔찍한 비명과 함께 이형의 괴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왕이 되면 저런 것도 할 수 있는 건가? 이러면 나도 차라리 칼잡이 그만두고 마왕 하는 게 낫겠는데.

김창이 실없는 생각을 하며 칼을 뽑았다.

“쟤넨 너희가 맡아라.”

“···혼자서 괜찮겠나?”

“금방 끝내고 도와줄 테니까 잘 버티고 있어.”

김창의 말에 에리엇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곧 얼굴을 굳히고선 차원의 틈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테네벨레를 위하여!”

그것은 전투 개시의 신호가 되었다. 흑요정 전사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괴물들을 향해 용감히 돌진했다.

당연하게도 그 선두에는 테네벨레의 기수인 에리엇이 있었다. 그는 기수답게 확연히 눈에 띌 만큼 뛰어난 무용을 선보였다.

김창은 그쪽을 잠깐 보다가 다시 개눈깔을 쳐다봤다.

“덤벼라, 개눈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개눈깔 소리 듣기 싫으면 싸워서 이겨 봐.”

개눈깔이 얼굴을 찡그리며 칼자루를 세게 쥐었다. 그러자 칼날에 초록색 빛이 맺히는 게 보였다.

오러는 아닐 텐데 아마 마왕이 되면서 얻은 새로운 힘인 모양이지. 김창도 기다렸다는 듯이 오러를 뽑아냈다.

개눈깔은 그걸 보고 잠깐 당황한 듯 했으나 곧 아무렇지 않은 척 칼을 들고 달렸다. 김창 역시 적의 공격을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다.

두 명의 칼잡이가 서로를 향해 질주했고 칼날이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김창과 개눈깔은 방어 따윈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공격에만 집중했다. 두 명 모두 공격적인 성향을 가진 칼잡이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서로 어지럽게 얽히는 칼날은 가히 폭풍이라 할 만했다. 빠르고 날카롭게 움직이는 칼날이 부딪힐 때마다 일어나는 소리는 거친 비바람과 같았다.

사나운 폭풍이 으레 그러하듯, 그것은 주변 모든 것에 날카로운 상처를 남겼다. 이리저리 움직이는 칼날이 바닥이며 벽을 종잇장처럼 잘라버리고 있었다.

폭풍의 중심에 있는 칼잡이들 역시 그 여파로부터 무사할 수는 없었다. 김창과 개눈깔의 옷이 잘게 찢어지며 곧 피부 위에도 자잘한 상처가 남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공격은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그건 일종의 광기 같기도 했다. 내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적만 죽이면 그만이라는 광기.

당연히 그런 식으로 싸우면 결판은 쉽사리 나고 만다. 바로 지금 김창의 칼이 개눈깔의 빈틈을 찔러버린 것처럼.

“야, 개눈깔.”

칼날이 번쩍이고 빛살이 질주했다. 움직임을 눈으로 쫓아갈 새도 없이 칼날이 개눈깔의 왼쪽 어깨를 잘라버렸다.

너무나 깔끔하게 잘려서 얼른 단면을 접합하면 다시 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개눈깔은 왼쪽 어깨가 날아간 걸 보고 미간을 꿈틀거렸다.

“옛날이랑 달라졌다며. 아니잖아, 새끼야.”

김창의 칼날을 한 번 털었다. 오러 때문에 뭐가 묻을 리가 없는데 반사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왼쪽 어깨를 잃은 개눈깔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녀는 잠깐 생각하는 듯 가만히 있다가 곧 한숨을 내쉬었다.

“···너 따위를 상대로 이 힘까지 써야 하는 건가.”

저거 또 지랄이네. 마왕외 되더니 이상한 허세만 늘어서. 김창이 쯧 하고 혀를 차며 개눈깔의 목을 찌르려고 할 때였다.

개눈깔이 오른손에 칼을 든 채로 자신의 안대를 벗겼다. 그러자 순간 묵직한 중압감이 공기를 짓눌렀다.

김창이 눈을 부릅떴다. 개눈깔의 마력이 확연하게 늘어나 있었다.

“인정하지. 나는 칼잡이로선 너에게 졌다. 그러나 영혼 약탈자로선 어떨까? 지금껏 억눌러 왔던 내 진정한 힘을 맛봐라!”

저 미친년,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김창이 헛웃음을 흘리며 칼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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